#41화. 첫 대면2022.03.21.
라윤 갤러리에 출근한 지 오 일째. 재희는 무혁에게 라윤 갤러리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오늘도 늦어요?”
라윤 갤러리로 같이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무혁의 퇴근은 더욱 늦어졌다. 아침 식사는 꼬박꼬박 같이하지만, 재희는 무혁이 귀가한 모습을 못 본 지 오래였다. 한번 마음먹고 기다렸지만, 눈을 떠보면 침대에 누워 있었고 무혁도 곁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렇다 보니 무혁과 대화하는 시간은 아침 식사와, 이렇게 출근할 때가 고작이었다.
“아마 그럴 겁니다.”
무혁의 시선이 시계로 향했다. 그의 눈길을 놓치지 않고 본 재희가 물었다.
“혹시 저 데려다주는 것 때문에 무리하고 있는 거예요?”
“아닙니다. 일이 바쁜 것뿐입니다.”
“무혁 씨.”
“재희 씨가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보다 여긴 오르막길이니 좀 더 위에서 내리는 건 어떻습니까.”
무혁이 딱 잘라 말하니 더는 할 말이 없어진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조금 더 올라가면 다른 직원들과 마주칠 거예요.”
“상관있습니까.”
“비서실 사람들은 무혁 씨를 알 거니까요. 어머님이 말하지 말라고 당부까지 하셨는데, 직원들이 알게 되면 제 입장도 곤란해지고요.”
그 말에 무혁이 하는 수 없이 고집을 꺾었다. 재희가 안전벨트를 풀려고 하자, 무혁이 그 손을 막았다. 그러곤 상체를 살짝 기울이며 팔을 뻗어 손수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고마…….”
재희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던 무혁이 그대로 재희의 입술을 삼켜버리고 만 것이다. 처음엔 당황스러워하던 재희가 무혁의 옷깃을 잡으며 얌전히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무혁은 제 욕심껏 재희를 탐한 뒤에야 놓아주었다. 입술을 살짝 맞댄 채 무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23일 저녁 R 호텔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예약 잡아놨습니다.”
“……정말요?”
R 호텔의 프렌치 레스토랑은 벚꽃 명소로도 유명했다. 해마다 이 시즌이면 예약이 풀로 차서 식사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때면 벚꽃이 많이 저물어 있겠지만, 그래도 무혁과 함께 단둘이 식사를 하며 야간 벚꽃을 볼 생각에 재희는 절로 설렜다.
“네. 알았어요. 그때 꼭 시간을 비워둘게요.”
재희가 밝은 얼굴로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리곤 핸들에 올려진 무혁의 손등을 가볍게 톡톡 두드려 주며 말했다.
“얼른 가봐요. 늦겠어요.”
차에서 내려 오르막길을 오르는 재희의 모습을 지켜보며 무혁이 그녀의 손이 닿았던 제 손등을 볼에 가져다 대었다. 희미하게 그녀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도 했다. 이윽고 재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무혁은 그제야 차를 돌렸다. * * *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재희 씨.”
첫날 걱정했던 거에 비하면 아직까지 비서실 생활은 순조로웠다. 그렇게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배척하지도 않았다. 비서실 직원들은 딱 정해진 선을 지켰다. 재희가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부팅시키는 사이 직원 몇몇이 대화를 나누었다.
“아침에 봤어?”
“아아. 여기 아래에 있던 그 차?”
“누구 차인지 궁금하네. 선팅되어 있어서 차주는 안 보이지만, 왜 매일 아침마다 그 자리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러게요. 무슨 목적이 있나? 설마 범죄를 계획하는 거 아니에요?”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나도 그런 차에 타고 싶다. 나는 못 사겠지만 대신 누가 좀 안 태워주나.”
진실을 알고 있는 재희는 직원들이 하는 대화를 일부러 못 들은 척하며 업무 준비를 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한 비서를 대동한 혜란이 들어왔다. 비서실 사람들이 칼같이 일어나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혜란이 대충 직원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시선 하나 돌리지 않은 채 비서실을 가로질러 관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재희는 굳게 닫힌 관장실 문을 물끄러미 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재희 씨. 이거 디자인팀에 전해주고 와. 이틀 전에 보고했던 5월의 연회 콘셉트 디자인, 어제 관장님이 수정 사항을 피드백해 주셨어.”
“네.”
미경이 건네는 서류를 받아든 재희는 비서실을 나섰다. 짧은 기간 동안 라윤 갤러리에서 일하면서 느낀 건, 혜란이 5월의 연회와 50주년 특별 전시회에 꽤 공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재희는 비록 깊게 관여하지는 못했지만, 하루에도 수 번씩 오고 가는 콘셉트 디자인을 관리하거나 5월의 연회 초대명단을 작성하는 등 매일매일 바빴다. 그리고 그 수많은 일은 반드시 혜란의 손을 거쳤다. 디자인팀에 콘셉트 디자인을 전달하고 비서실로 돌아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문득 곁에서 풍기는 화사한 향수 냄새에 재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향수 냄새의 주인을 확인하자마자, 재희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저 사람은.’
얼마 전 라윤 갤러리에 처음 방문했을 때 로비에서 봤던 여자였다. 패턴이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여자의 외모 자체가 화려해서 과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재희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양손에 디저트 상자를 들고 있던 여자가 돌아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향수 냄새의 주인공인 한유라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띵. 엘리베이터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한유라가 성큼 안으로 발을 디뎠다.
“안 타세요?”
“죄송합니다.”
유라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재희가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탔다. 재희가 올라타자마자 유라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5층 눌러주세요.”
“네?”
“5층이요. 보시다시피 손이 없어서요.”
“아, 네.”
유라가 양손 가득 든 디저트 상자를 들어 보이자, 재희는 찜찜한 기분으로 마지못해 버튼을 눌렀다. 재희는 LED 판의 숫자가 바뀌는 걸 보고 있었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5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유라가 먼저 내렸다. 당연하게도 비서실 문은 닫혀있었다. 유라가 몸을 살짝 틀어 재희를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이거 열어주세요.”
라윤 갤러리 보안정책을 떠올리며 재희가 말했다.
“방문 허가증 먼저 보여주세요.”
얼마 전에 라윤 갤러리 로비에서 혜란과 유라의 다정한 모습을 본 적이 있지만, 어쨌든 그녀는 외부인이었다. 그러자 유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황당한 소리를 다 들어보겠다는 의도가 명확하게 담긴 웃음이었다.
“저 보셨잖아요. 저번에 갤러리 로비에서요.”
역시 그때 눈이 마주쳤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재희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유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전 어머니 초대로 온 거예요. 못 믿으시겠다면 어머니를 여기로 부르셔도 되구요.”
어머니. 혜란을 부르는 호칭이 제법 친근하다.
“어머니께서 라윤 갤러리 관장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도 된다고 하셨지만, 손님인 제가 어떻게 그러겠어요. 탄다면 어머니와 함께 타야죠. 안 그래요?”
유라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친근하고 예쁜 웃음이지만 왠지 껄끄러웠다. 재희는 일전에 로비에서 봤던 혜란과 유라의 모녀 같은 모습을 다시금 떠올렸다. 관장 전용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혜란과 유라. 그리고 재희는 손님용 엘리베이터를 탔었다. 혜란이 얼마나 재희를 못마땅해하는지 보여주는 일면 중 하나였다. 그러니 여기서 유라에게 잘못했다간 혜란은 분명 자존심 상해할 것이다.
“알겠어요.”
결국, 하는 수 없이 재희가 보안 센서에 출입 카드를 댔다. 문이 열리자 유라가 그대로 재희를 지나쳐 비서실에 거침없이 들어서며 말했다.
“모두 고생하시네요. 저 왔어요.”
유라의 등장으로 조용한 사무실이 순식간에 활기가 돌았다. 업무에 집중하던 직원들이 하나둘 반가운 얼굴로 일어섰다.
“유라 씨 아니에요? 웬일이에요?”
“어머니께서 놀러 오라고 하셔서 왔어요. 마침 연차이기도 하고. 아,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 간식 좀 사 왔어요.”
“와아. 매번 이렇게 얻어먹어서 어쩌지? 세상에! 이거 S 백화점 지하 매장에서 파는 마카롱 아냐? 어떻게 이걸 사 왔어요? 인기 많아서 사기 힘든데.”
“많이 사 왔으니까 양껏 드세요.”
재희는 비서실 직원들과 친분이 있는 듯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유라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록달록 달콤한 마카롱에 비서실 직원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 피어났다.
“관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입구에서 주춤 서 있는 재희를 본 한 비서가 적당히 수습하며 유라를 직접 관장실로 안내했다. 유라가 한 비서와 함께 관장실에 들어가자, 비서실 직원들이 각자 마음에 드는 마카롱을 하나씩 먹으며 말했다.
“언제봐도 성격 좋단 말이야. 처음엔 다가가기 힘든 이미지였는데 성격도 정반대고.”
“그러니까 관장님이 그렇게 이뻐하시지. 관장님 취향도 귀신같이 알고 잘 맞춰주잖아.”
“친딸도 저렇게 친하진 못할 거야.”
재희는 비서실 직원들의 대화를 애써 못 들은 척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관장님은 유라 씨를 며느리로 점 찍지 않았어?”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삼삼오오 모인 비서실 직원들은 여전히 수다를 떠는 데 여념이 없었다.
“큰 아드님이 관장님 강요에 맞선을 보러 나갔다가 선본 여자랑 대뜸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관장님이 꽤 반대했었지. 대단했어.”
“뭐 결국 큰 아드님의 고집을 못 이겨서 결혼은 허락하셨지만, 직원들은 결혼식에 올 필요 없다고 하시기까지 하셨지. 그 며느리분은 괜찮으신가 몰라.”
작은 목소리로 수다 떨고 있었지만, 모두 재희 귀에 쏙쏙 들어왔다. 재희는 차게 식은 손을 조용히 말아쥐었다.
“다들 업무 하지 않고 뭐 하고 있습니까.”
마침 돌아온 한 비서가 엄하게 말했다. 수다 떨던 직원들이 서둘러 하나둘 자리에 돌아가자 한 비서가 경고하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입이 가벼웠습니까. 비서실에서 근무한다면 입이 무거워야 한다는 거 모릅니까.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눈에 보이면 그땐 엄중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비서실 직원들이 눈치를 보며 죄송하다고 말한 뒤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재희 역시 업무에 집중하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직원들이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었다. 혜란이 저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을. 상견례에서도 호의적이지 않았고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혜란이 따로 며느리로 생각해둔 여자가 있는데, 아들이 다른 여자와 결혼했으니 못마땅할 만도 했다. 재희는 무혁만을 보고 결혼을 결정한 만큼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눈앞에서 시어머니가 다른 사람, 그것도 며느리로 점 찍었던 여자를 예뻐하는 모습을 보는 건 가슴 아팠다.
‘멀었구나.’
혜란은 이왕이면 갤러리를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했지만, 재희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감히 제가 넘볼 수 없다고 생각했고, 기대가 없는 만큼 당연히 욕심도 나지 않았다. 다만 재희는 라윤 갤러리에 들어오면서, 작은 희망을 품었다. 비록 지금은 혜란과 사이가 좋지 않지만, 언젠간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작은 희망. 냉랭한 시선으로 저를 보는 것과 다르게 유라를 보는 혜란의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어도 말이다.
“재희 씨.”
“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한 비서가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재희가 퍼뜩 고개를 들자, 한 비서가 조금 곤란한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잠시 탕비실에서 저 좀 볼까요.”
“네. 알겠습니다.”
탕비실에 들어서자 한 비서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직원들 말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한 비서도 직원들의 수다를 들은 모양이었다. 한 비서가 곤란해하자 재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신경 안 써요.”
“그럼 다행입니다만.”
“그보다 무슨 일이세요?”
재희가 말을 돌렸지만, 한 비서는 여전히 신경 쓰이는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원래는 제가 담당했습니다만, 관장님께서 작은 사모님에게 차를 내오라고 하셨습니다.”
“네.”
“관장님께서는 홍차에 꽤 까다로운 입맛을 가지고 계십시다. 그래서 알려드리려고 탕비실로 잠시 뵙기를 요청한 겁니다.”
한 비서의 마음 씀씀이에 재희가 부드럽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여기 맨 위 선반에 홍차가 있습니다. 관장님께서 즐겨 마시는 홍차니까 평소에는 이걸로 내가시면 됩니다. 날씨에 따라 다르게 드시는데 오늘처럼 날이 화창한 날에는…….”
재희는 한 비서가 알려주는 내용을 진지하게 들으며 숙지했다. 이윽고 딱 맞는 물의 온도까지 알려준 한 비서가 먼저 시범적으로 적당히 우려낸 홍차와 유라가 사 온 마카롱 몇 개를 예쁜 접시에 담았다.
“이대로 가지고 가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
“관장님의 며느리는 바로 작은 사모님이십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는 한 비서를 보며 재희가 웃어 보였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한 비서가 다과상을 든 재희 대신 관장실 문을 노크했다. 잠시의 틈을 두고 한 비서가 문을 열어주자 재희는 관장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