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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장세라 (40/128)

#40화. 장세라2022.03.17.

첫날부터 쉽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배워야 할 게 많았고, 점심시간에 직원들의 대화를 들은 뒤라 실수하지 않기 위해 긴장하고 업무를 하다 보니 퇴근할 때 즈음엔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사수인 미경은 친절하지도 못되지도 않았다. 그저 딱 선을 그은 채 최소한의 일을 가르쳐 줄 뿐, 오히려 무관심에 가까운 태도였다.

16549511308916.jpg“자자.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관장님께서도 오늘 일찍 들어가셨으니 모두들 퇴근하세요.”

혜란이 먼저 돌아간 뒤 한 비서가 손바닥을 부딪치며 말했다. 재희는 비서실 식구 한 명 한 명에게 인사하고는 퇴근했다. 갤러리 밖으로 나오자마자 봄꽃 냄새와 오래된 이끼 낀 담벼락의 냄새가 흠씬 맡아졌다.

1654951130892.jpg“해가 길어졌네.”

달이 바뀌었을 뿐인데 처음 결혼했을 때와 달리 해가 길어져 있었다. 재희는 택시를 타기 위해 서둘러 큰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출근 첫날인 만큼 아무래도 갤러리 직원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던 재희는 이 실장에게 택시를 타고 돌아간다고 미리 일러둔 상태였다. 라윤 갤러리에서 조금 내려오자 한적한 거리와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세단이 보였다. 어쩐지 익숙한 세단에 재희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이윽고 세단에서 한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렸다.

1654951130892.jpg“무혁 씨?”

지금쯤이면 회사에 있어야 할 무혁이었다. 놀란 재희가 멈춰 서자, 무혁이 성큼 다가왔다.

16549511308928.jpg“퇴근했습니까.”

1654951130892.jpg“네. 그런데 무혁 씨가 여긴 왜…….”

16549511308928.jpg“이 실장에게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기에 제가 대신 왔습니다.”

1654951130892.jpg“네?”

재희가 당황한 얼굴로 보자, 무혁이 덤덤한 얼굴로 재희의 손에 들려있는 가방을 들었다.

16549511308928.jpg“갑시다.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

1654951130892.jpg“괜찮아요. 무혁 씨. 전 택시 타고 가면 돼요. 그보다 바쁘면서 왜 여기까지 왔어요.”

16549511308928.jpg“이 실장더러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온 것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듯 무혁이 덤덤하게 말했다. 얼른 안 타고 뭐 하냐고 묻는 듯한 무혁을 보며 재희가 말했다.

1654951130892.jpg“미안해요.”

16549511308928.jpg“뭐가 말입니까.”

1654951130892.jpg“출근 첫날이다 보니 사람들 시선이 신경 쓰여서 일부러 택시 타고 가겠다고 한 거였어요. 그런데 그게 바쁜 무혁 씨를 오게 만드는 거였다면 그냥 이 실장님 부를 걸 그랬어요.”

16549511308928.jpg“괜찮습니다. 재희 씨를 한 번 더 볼 수 있으니 더없이 만족합니다.”

직구로 꽂히는 무혁의 말에 재희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분명 무혁에게 미안한 마음인데, 그와 상반되는 간질간질한 설렘이 한쪽 가슴에 자리 잡았다.

16549511308928.jpg“타십시오.”

무혁이 직접 조수석 문까지 열어주자 재희는 결국 차에 탔다. 재희가 안전벨트를 매는 동안 운전석에 탄 무혁이 물었다.

16549511308928.jpg“어땠습니까. 오늘 하루.”

1654951130892.jpg“재미있었어요. 오랜만에 회사를 다녀서 그런지.”

조금 안 좋은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할머니에게 들었던 폭언이나, 신채근이나 홍연화의 무관심 등에 단련된 재희로서는 그럭저럭 참을만했다.

16549511308928.jpg“분위기는 어땠습니까.”

1654951130892.jpg“괜찮았어요. 다들 자부심이 있어서 그런지 열심인 분위기이고.”

그래서 그들 사이에서 재희는 외부인이었다. 아직은 서먹하겠지만, 차차 나아지겠지. 재희는 그런 자그마한 희망도 품었다.

16549511308928.jpg“어머니는 별말씀 없으셨습니까.”

1654951130892.jpg“어머님은 절 직원으로 대하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인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으셔서요. 사실 저도 그게 편하기도 하고.”

혜란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며느리가 아닌 직원으로서 재희를 대했다. 재희는 종일 일을 하면서도 혜란의 얼굴을 본 건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퇴근 때 한 번. 세 번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혜란은 재희에게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한 비서는 재희를 여느 직원들과 똑같이 대했다. 그래서 환영식 겸, 5월의 연회 준비로 박차를 가하기 전 사기를 돋우기 위해 회식을 하기로 했다. 할머니에 의해 강제로 회사를 그만둔 뒤 재희는 줄곧 프리랜서로 일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하는 회식 소식에 조금 들떴다.

1654951130892.jpg“회식도 하기로 했어요. 저 오랜만에 회식을 해봐요.”

16549511308928.jpg“회식 좋아합니까?”

1654951130892.jpg“좋아했었어요. 전 회사 다닐 땐 워낙 바빠서 회식을 잘 못 했었지만요.”

16549511308928.jpg“주로 어디로 자주 갔습니까.”

1654951130892.jpg“고깃집으로 갔어요. 가끔 패밀리 레스토랑도 갔지만, 다들 술과 고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법카를 써야 하니까 이왕이면 비싼 걸 먹고 싶어 했거든요.”

회식하면 그만큼 그 집에 늦게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좋아했다. 그리고 사원들끼리 사이도 좋아서 분위기도 즐거웠다.

16549511308928.jpg“재희 씨는 고기 좋아합니까.”

1654951130892.jpg“많이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다 같이 먹으니까 맛있었어요. 전 회사에서 자주 다니던 가게 이름이 ‘날아라 꽃등심’이었는데, 정작 꽃등심은 별로였어요.”

이왕 법카 쓰는 거 비싼 거 먹자며 간 고깃집이었다. 가장 비싼 꽃등심은 별로였지만, 다른 부위는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법카로 뽕을 뽑겠다며 술과 고기를 열심히 시키던 지혜를 떠올리며 재희가 작게 웃었다. 그런 재희를 무혁이 응시했다. 마치 찰나 스치는 표정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서점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재희를 마지막으로 보고 헤어지고 난 후 무혁은 공부와 일에 매진했었다. 그러나 그의 시간은 재희와 함께했던 그때 그 노을 서점에 멈추어 있었다. 무혁은 다시 재희를 만나기 전까지 줄곧 그리워했고, 어떻게 지낼까,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때 당시 무혁에게 재희는 아무리 그리워해도 손에 닿지 않는 꿈같은 존재였다. 지독한 갈증이 일었다. 자신이 모르는 그때의 재희를 더, 더 많이 알고 싶었다. 작은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갈증을 나타내듯 핸들을 잡은 무혁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16549511308928.jpg“그럼 뭐가 재희 씨 입맛에 가장 맞았습니까.”

1654951130892.jpg“저는 사실 꽃등심만 아니면 다 좋았어요.”

16549511308928.jpg“술은 잘합니까.”

1654951130892.jpg“술은 잘 못해요. 그래서 항상 술고래인 팀장님이나 팀원들 택시에 태워 보내는 건 항상 제 차지였어요. 힘들었지만, 재미있었어요.”

16549511308928.jpg“회사가 즐거웠습니까.”

1654951130892.jpg“그럼요. 야근과 철야가 많았지만, 즐거웠어요.”

16549511308928.jpg“일이 힘들진 않았습니까.”

1654951130892.jpg“아무래도 이 계통이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다들 회식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어요.”

재잘재잘 얘기하던 재희가 문득 말을 멈추고 무혁을 바라보았다.

1654951130892.jpg“무혁 씨는요? 회식 좋아해요?”

16549511308928.jpg“네.”

1654951130892.jpg“그럼 회식으로 어딜 주로 가요?”

16549511308928.jpg“그보다, 마저 얘기해 해주십시오.”

1654951130892.jpg“네?”

16549511308928.jpg“2차 회식 장소로 재희 씨가 정한 곳이 왜 하필 ‘닭은 날았다’인지 궁금합니다.”

1654951130892.jpg“아……, 그냥 그 당시 유행이었나 봐요. ‘돼지가 꿀하고 날아오르다’ 식으로 주변 가게 이름이 다 그런 식이었어요.”

재희는 무혁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무혁이 진중한 얼굴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서 차마 말을 끊을 수가 없었다. 재희는 하는 수 없이 재미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어느덧 두 사람이 탄 차는 멈춰 있었다. 무혁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재희를 짙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무혁은 일에 관련된 것을 제외하고는 상상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회사에 다니며 회식을 즐기는 재희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어느덧 무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휴대전화에서 메시지는 쉴새 없이 뜨고 있었지만 무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저녁 일정을 모조리 내일로 미룬 보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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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인천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막 입국장으로 나온 장세라는 자꾸만 다른 데로 시선을 빼앗겨 부산스러운 도화에게 주의를 주었다.

16549511423799.jpg“장도화. 너 그러다 또 엄마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넘어지니까 제대로 보고 걸어.”

16549511423799.jpg“그치만 엄마아. 여기 너무너무 번쩍번쩍하고 넓고 신기한걸. 마치 미래 세계에 온 것 같아. 어? 엄마. 저기 로봇이다, 로봇!”

장세라는 로봇 쪽으로 튀어 나가려는 도화의 손을 꽉 잡았다.

16549511423799.jpg“한눈팔지 말랬지.”

16549511423799.jpg“이잉. 엄마 나 로봇 보구 싶어. 보고 가자아.”

도화가 바지를 붙잡으며 칭얼대자 장세라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6549511423799.jpg“누굴 닮아서 이렇게 제멋대로인지.”

16549511308916.jpg“누구 닮기는. 널 닮았지.”

한국행을 결정한 그 순간부터 내내 입이 댓 발 튀어나왔던 케빈이 투덜댔다. 화가명 미셸. 본명은 장세라. 장세라의 에이전트 매니저인 케빈은 한국행을 탐탁지 않아 했다. 결국 도화는 원했던 대로 인천공항 로봇 에어스타 앞에서 갖가지 포즈를 잡으면서 사진 찍기에 여념 없었다. 그런 도화를 애정 가득한 눈으로 보는 세라를 보며 케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16549511308916.jpg“근데 갑자기 웬 한국행이야. 절대 네 발로 한국에 올 일 없을 거라고 했으면서.”

16549511423799.jpg“찾을 사람이 있어서.”

16549511308916.jpg“누구.”

16549511423799.jpg“도화의 은인.”

16549511308916.jpg“그 절판된 동화책 삽화 그렸던 일러스트레이터?”

16549511423799.jpg“응. 만난 적 있었거든.”

16549511308916.jpg“무슨 소리야.”

16549511423799.jpg“몽마르트르에서 만났어. 집에 와서 알았고.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인사하고 싶었어.”

세라는 아직도 도화의 방 한편에 보관되어 있는, 너덜너덜해진 동화책을 떠올렸다. 이혼 후 프랑스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도화가 아팠었다. 세라에게나 도화에게나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친척이 가져다준 동화책 한 권. 삽화 몇 장이 전부인, 얇은 동화책이었지만 도화는 잘 때도 끼고 잘 정도로 좋아했었다. 세라는 아직도 입이 댓 발 나와 있는 케빈을 보며 빙긋 웃었다.

16549511423799.jpg“내가 이해 안 간다는 표정이네.”

16549511308916.jpg“당연하지.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갤러리한테, 사람을 찾아주면 5월의 연회 참석이나 전시회를 고려해 보겠다고 제안하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16549511423799.jpg“그런가.”

16549511308916.jpg“그래. 베일에 가려진 화가 미셸이 제멋대로인 건 하루 이틀도 아니지만, 이번엔 스케일이 아주 크다, 커.”

16549511423799.jpg“도화가 누굴 닮아서 제멋대로겠어? 날 닮았잖아.”

케빈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 * * 재희를 집에 데려다준 무혁은 노을 서점 앞에 서서 민석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16549511465519.jpg“일단 주변 상인들은 호의적이야. 아무래도 노을 서점이 이곳 상징물과 같다 보니, 유지만 잘해준다면 주변을 어떻게 조경을 하든 괜찮다고 해.”

16549511308928.jpg“…….”

16549511465519.jpg“큰 이슈가 있지 않은 이상은 리모델링이나 주변 조경도 예정대로 끝날 것 같아.”

16549511308928.jpg“그래.”

무혁이 성큼, 노을 서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을 뻗어 노을 서점 문을 잡았다. 덜컹, 낡디 낡은 문은 어긋난 문지방에 걸려 쉽게 열리지 않는다. 무혁은 몇 번 덜컹거리던 문을 완전히 열고 서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들어서자마자 무혁을 제일 먼저 반긴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묵은 책 내음과 습기 머금은 나무 냄새였다. 무혁은 잠시 서서 그리운 이 냄새를 가만히 들이마셨다. 순식간에 향수에 젖어 들어가는 듯했다.

16549511465519.jpg“언제 와도 레트로한 곳이야. 이런 곳은 잘 보기 힘든데 말야.”

민석은 감탄하며 노을 서점 곳곳을 둘러봤다. 서점 안을 빈틈없이 꽉 채운 책더미와 약간 어두컴컴한 내부는 갑갑하다기보다는 아늑했다. 60~90년대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조차도 향수에 젖게 만드는 노을 서점은 그 어떤 건물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무혁은 예전 그때처럼 책장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내부는 몇 년이 지났어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마실을 다녀온 서점 할아버지가 들어오실 것 같았다. 그러곤 춥지 않냐며 오래된 난로에 땔감을 던져 넣으며 여기저기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를 올려두실 것 같다. 보글보글, 양은 주전자 안의 물이 끓기 시작할 때쯤엔 서점은 금세 훈훈한 공기로 채워지겠지. 그리고. 그때쯤엔…….

16549511308928.jpg‘재희가 왔었지.’

몇 년이 흐름 지금, 이젠 재희는 이곳에 오지 않는다. 그러나 왠지 이렇게 등을 기대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저 낡은 문이 덜컹 열리면서, 콩콩 발소리를 내며 수줍게 인사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6549511465519.jpg“여기 명당인걸.”

민석이 재희가 앉았던 책장에 기대앉았다. 노을 서점 곳곳이 명당이지만 여긴 특히 더 명당 같았다. 서점 입구와 마주 보는 위치여서 그런지 불투명한 유리문에 고인 노을이 장관이었다.

16549511308928.jpg“일어나.”

16549511465519.jpg“왜.”

16549511308928.jpg“그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

싸늘한 무혁의 목소리에 무슨 소리냐며 반박하려던 민석이 머리를 긁으며 머쓱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49511465519.jpg“그냥 재희 씨한테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16549511308928.jpg“…….”

16549511465519.jpg“노을 서점의 그 비밀 친구가 너였다고. 재희 씨를 위해서 무리해 가면서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16549511308928.jpg“…….”

16549511465519.jpg“네가 말을 안 하면 재희 씨가 어떻게 알겠냐.”

재희를 처음 만났던 날. 그녀는 울고 있었다. 무혁에겐 소중한 추억이 있는 곳이지만, 과연 재희도 그럴까. 알고 있다. 그때 그 겨울이 재희에게 마냥 끔찍한 계절은 아니었음을. 그런데도 무혁이 갈등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16549511308928.jpg“여기는 재희가 가장 힘들 때 오던 곳이다.”

16549511465519.jpg“…….”

16549511308928.jpg“그때도, 맞선을 봤을 때도, 재희가 도시락을 가지러 왔을 때도…… 재희와 함께 지내면서 난 줄곧 다짐했다.”

16549511465519.jpg“뭐.”

16549511308928.jpg“재희 입으로 결코 고통스러운 이야기는 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16549511465519.jpg“너 말야…….”

16549511308928.jpg“그런 얘기 꺼낼 수 없도록 즐겁고 행복한 기억만 안겨주고 싶다고,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고.”

16549511465519.jpg“…….”

16549511308928.jpg“나는 재희가 적어도 과거의 힘든 일은 떠올리지 않길 바라.”

노을 서점에서의 추억은 무혁에겐 소중하지만, 재희에겐 가장 괴로웠던 시기에 유일했던 안식처였다. 무혁은 재희가 그때 그 슬픔을 기억하지 못하길 바랐다. 적어도 무혁은, 재희가 간간이 보여준 그 맑은 웃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재희가 과거 비밀 친구였던 자신을 기억하고 떠올리는 게 기쁘면서도 씁쓸했다. 비밀 친구가 나였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밀 친구를 잊어버렸으면 했다. 재희를 위해서 아버지와 거래를 해가며 겨우 지켜낸 노을 서점. 재희가 부디 그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몰라도 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상반된 두 감정에 무혁은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무혁은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무엇이 가장 재희를 위한 최선인가를.

16549511465519.jpg“미련한 자식아. 재희 씨랑 결혼하려고 그렇게 무리해 가면서 밀어붙인 놈 맞냐? 왜 정작 중요한 건 말 못 하냐.”

민석이 타박했지만 무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16549511308928.jpg‘미련한 게 맞을지도.’

어지러운 감정을 뒤로한 채 무혁은 눈을 감았다. 노을 서점 위로 노을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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