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혜란의 제안2022.02.28.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라윤 갤러리. 하얀 외관에 넓은 정원 산책로, 통유리로 된 한쪽 벽이 인상적인 라윤 갤러리는 대학생 때 딱 한 번 온 게 전부였다. 그땐 전시회를 관람할 목적으로 왔었으나 지금 재희는 시어머니인 혜란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했다. 재희는 라윤 갤러리 입구 앞에서 커다란 꽃다발과 S 호텔 애플파이를 손에 든 채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곤 제 차림이 이상하지 않은지, 머리 모양은 괜찮은지 몇 번이나 체크한 뒤 걸음을 옮겼다. 마침 평일인지라 갤러리에 관람객은 많지 않았다. 혜란이 오라고 해서 오긴 했으나 어떻게 가야 할지 고민하던 재희는 결국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관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관장님과 약속은 하셨습니까?”
“네. 신재희라고 합니다.”
“그럼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친절한 직원이 내선을 연결해 몇 마디 나누더니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전화를 끊은 뒤 어색하게 웃으며 직원이 말했다.
“잠시 저쪽 휴게실에 앉아계시겠습니까. 관장님께서는 지금 다른 손님을 만나고 계시다고 하십니다.”
“네.”
재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갤러리를 둘러보았다. 먼지 한 톨도 없을 것 같은 넓고 깔끔한 갤러리엔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발걸음 소리조차도 절로 조심스러워지는 차분한 분위기의 라윤 갤러리를 재희는 참 좋아했다. 대학교 재학 시절 라윤 갤러리 취업을 목표로 했을 때도 있었지만, 채용 조건에는 유학 경력이 붙어 있었다. 감히 유학을 가고 싶다는 말조차 입에 담지 못한 재희는 결국 디자인 회사에 입사했지만 말이다.
‘좋아하시면 좋겠는데.’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혜란의 직장에 처음 방문하는 만큼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화려한 꽃다발을 주문하고, 뭘 사갈지 몰라서 유명한 곳을 검색하고 또 검색해서 S호텔 베이커리의 시그니처인 애플파이를 샀다. 그렇게 준비했어도 혜란의 입맛이나 취향을 알 수 없으니 걱정이 앞섰다. 재희는 고개를 돌려 라윤 갤러리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라윤 갤러리의 정원은 계절에 맞춰 사시사철 내내 특색있고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했다.
‘저기서 5월의 연회를 여는 거겠지.’
일 년에 한 번 저 정원에서 극소수 VVIP만 초청하여 5월의 연회를 연다고 했었다. 매년 초대를 받는 재벌가 손녀인 대학 동기가 5월의 연회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다들 가고 싶다며 부러워하곤 했었다. 지금은 봄인 만큼 정원에는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벚꽃을 보며 재희는 5월의 연회를 상상하면서 차분하게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재희는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기다린 지 30분이 지나 있었다. 차 한잔 없이 가만히 기다리던 재희가 안내 데스크로 다가갔다.
“저, 혹시 관장님에게서 온 연락은 없을까요.”
“아. 그게…….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아직 손님이 계셔서요.”
“얼마나 걸릴까요?”
“그게 저도 잘…….”
직원이 곤란한 듯 웃으며 말끝을 흐리자 재희는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10분, 20분, 30분……. 시간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흘렀다. 기다림에 조금 지칠 무렵 재희의 시야에 로비로 나오는 혜란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던 재희는 멈칫했다. 환하게 웃는 혜란과 함께 화려한 옷을 입고 서 있는 여자 때문이었다. 가슴께까지 오는 굵은 컬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는 멀리서 봐도 눈에 확 띄는 화려한 미인이었다. 여자는 흡사 친엄마를 대하는 것처럼 혜란과 스스럼이 없어 보였다. 그런 여자를 보는 혜란의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처음 보는 혜란의 모습에 재희는 왠지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
착각이었을까. 혜란의 배웅을 받으며 걸음을 옮기던 여자와 아주 잠깐 시선이 마주친 것은. 여자가 사라지자 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혜란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혜란은 재희를 발견했음에도 아는 척을 하기는커녕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버렸다. 잠시 후 안내 데스크 직원이 다가왔다.
“관장님께서 올라오셔도 된다고 하십니다. 5층이고 좌측 손님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기 출입명부 작성 부탁드립니다.”
재희는 출입명부를 작성한 뒤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재희는 혜란과 여자가 걸어 나오던 라윤 갤러리 관장 전용 엘리베이터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손님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비서실에 용건을 말하고 허락을 받은 뒤에야 겨우 재희는 혜란이 있는 관장실에 입성할 수 있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관장실 가운데 혜란이 앉아 있었다. 재희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 혜란에게 인사를 했다.
“어머님. 저 왔어요.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그제야 혜란은 문에서 주춤 서 있는 재희에게 시선을 주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거기 앉으렴.”
라윤 갤러리에 온 지 한 시간 만에 겨우 혜란을 만나게 된 재희는 그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파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았다. 혜란이 반대편에 앉자 재희가 꽃다발과 파이 상자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별거 아니지만 어머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 사 왔어요.”
“그래. 정말 별거 아니구나.”
혜란은 재희가 고심해서 고르고 고른 꽃다발과 S 호텔 로고가 새겨진 애플파이 상자를 대충 옆으로 밀어냈다. 혜란은 민망한 얼굴을 한 재희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그래. 결혼 생활은 좀 익숙해졌니?”
“네. 어머님 덕분에요.”
“덕분에? 너 지금 내가 시어머니 짓 한 걸 비꼬는 거니?”
순간 재희의 얼굴이 당혹감이 서렸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어이가 없어서. 아침, 저녁 차린 걸 사진 찍는 게 싫으면 그렇다고 얘기를 했어야지. 그걸 무혁이에게 고자질하니?”
“어머님. 오해가 있으세요.”
그런 적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혜란은 재희의 말을 듣지 않았다.
“됐다. 내 아들이 날 아주 원수 보듯이 하는데 기가 막혀서 원. 네가 큰일을 했어.”
그날 무혁이 먼저 알아봤다고 했지만 혜란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분명 재희가 뒤에서 고자질하고 무혁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겠지. 혜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얌전한 얼굴로 여우짓을 하니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가끔 안부 전화하는 재희가 괘씸했지만, 혜란은 더 이상 시어머니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지나간 일이니 이쯤 접어두고. 일러스트인지 뭔지 여전히 그 일 하고 있는 거니?”
“네. 이제 외주를 좀 많이 늘리려고요.”
“그 일 잠깐 그만두렴.”
“네?”
“그 일 그만두라고.”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앉아있는 재희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며 혜란이 말을 이었다.
“미리 말해둘 테니 다음 주 월요일부터 여기 비서실로 출근을 하도록 해.”
재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여전히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서도 출근하라는 제안, 아니 강요를 하는 혜란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도 될까요.”
혜란의 속내를 알 길이 없어 결국 재희는 용기를 내 물었다. 그러자 혜란의 고운 미간이 단숨에 좁혀졌다. 거기서 무혁의 버릇을 발견한 재희는 아주 잠깐 무혁이 어머님과도 많이 닮았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 나한테 널 이해시킬 만한 이유를 대란 거니?”
“그게 아니라…….”
“기가 막혀서 정말.”
혜란이 기분 나쁜 티를 냈으나 재희는 꿋꿋이 대답을 기다렸다.
“넌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니? 라윤 갤러리야. 내 어머니한테 물려받아 평생을 바쳐 꾸려온, 내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라윤 갤러리.”
혜란의 목소리에는 자긍심이 가득했다.
“11월이 되면 라윤 갤러리가 개관한 지 50주년을 맞게 돼. 그때의 라윤 갤러리는 특별해야 해. 국내든, 해외든 그 어느 갤러리보다도 더.”
“…….”
“그럼 그런 특별한 날 뭘 하면 좋을까.”
“특별한 전시회…… 인가요?”
재희의 대답에 혜란은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웠다.
“맞아. 라윤 갤러리에서 특별히 초대된 VVIP들과 함께 5월의 연회가 곧 열릴 거야. 그때 라윤 갤러리 50주년을 알리고 특별한 이를 초대하려고 몇 년 전부터 공을 들이는 사람이 있지. 바로 프랑스 화가 미셸이야.”
미셸이라면 재희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얼굴 없는 프랑스 화가 미셸. 미셸의 전시회는 언젠가 재희가 꼭 가 보고 싶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꾸준히 연락을 넣었지만, 번번이 거절하던 미셸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5월의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연락이 왔단다.”
“…….”
매년 초대장을 보냈지만 미셸은 고사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별 기대 없이 보낸 초대장이었는데 뜻밖에도 미셸의 에이전트에서 참석 의사를 밝혀온 것이다.
“그때 베일에 싸인 그 얼굴을 비칠지 아니면 에이전트를 대신 보낼지 알 수 없지만 좋은 기회지. 미셸을 잡을 기회.”
‘조건이 하나 붙긴 했지만. 상관없어.’
절판된 동화책에 실린 삽화를 그린, 지금은 사라진 일러스트레이터를 찾아달라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건 신경 쓸 바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찾는 건 금방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건 둘째치고 미셸부터 잡는 게 먼저였다.
“라윤 갤러리는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온 곳이야. 그러니 이번 5월의 연회와 11월에 열릴 50주년 전시회는 특별해야 해. 그러니 네가 당분간 여기 출근하면서 일을 배우렴.”
혜란은 소파 팔걸이에 비스듬하게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라윤 갤러리만큼은 가족에게 물려주고 싶어. 나에겐 딸도 없고 그렇다고 무혁이나 우진이에게 물려주기엔 투박한 아들놈뿐이니, 남은 게 너밖에 더 있니?”
가족. 무혁과 결혼하기 전에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재희는 없었다. 무혁과 결혼하면서 겨우 작은 가족이 생겼지만, 평생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은 혜란이 먼저 가족을 입에 올리자 재희는 심장이 묘하게 두근거렸다.
“일러스트 일을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겠어. 다만 라윤 갤러리의 가장 큰 행사인 5월의 연회와 50주년 기념 전시회 진행을 보고 배우렴. 그러려면 비서실이 가장 배우기 편하겠지. 그때까지만 출근하도록 해. 불편할 수 있으니 내 며느리라는 말은 하지 말고.”
바로 대답하지 않는 재희를 보며 혜란이 단호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이건 명령이야.”
* * * 재희는 무혁의 운전기사였던 이 실장에게 조금 걷다 오겠다고 말한 뒤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부암동의 예스러운 건물과 산, 그리고 한적한 거리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언뜻 들으면 좋은 제안이야.’
라윤 갤러리는 대학 동창들 사이에서도 꼭 취업하고 싶은 곳으로 꼽혔다. 재희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직원으로서지, 라윤 갤러리 관장인 혜란이 시어머니인 이상 부담스러운 제안일 뿐이었다.
‘거절하는 게 맞지만.’
재희는 거절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의 말투에 길들여진 재희는 명령조나 강압적인 말투에 약했다. 그리고 라윤 갤러리에서 일해 보고 싶다는 욕심도 조금 있었다. 재희는 이끼가 낀 오래된 담벼락에 기대섰다. 등에 껄끄럽고 서늘한 돌의 감촉과 이끼의 미끈한 감촉이 느껴졌다. 재희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작성했다.
[오늘도 늦어요? 저 할 말이 있어요. 오늘은 늦더라도 기다릴게요. 잠시라도 시간 내줘요.]
무혁에게 메시지를 보낸 재희는 나지막한 한숨을 흘렸다. 흐려진 재희의 눈동자에 부암동 일대의 전경이 비쳤다. 눈동자에 비친 4월의 부암동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부암동을 바라보는 재희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 * * 그 시각. 혜란은 재희가 가져온 꽃다발과 애플파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무혁이 한바탕 난리를 치고 간 후 혜란은 재희에게 더 이상 연락 따위 하지 않았다. 그 작은 목소리도 듣기 싫었고 아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며느리 따위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선물 가져온 센스하고는.”
아직도 무혁이 제게 소리친 앙금이 남아 있는 터라 혜란은 한 비서를 불러들였다.
“한 비서. 아까 유라가 사 온 애플파이 있죠? 그거랑 홍차를 가지고 와요. 아, 그리고 유라가 사 온 꽃다발은 이번에 새로 들여온 화병에 꽂아서 잘 보이게 장식해 두고요.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5월의 연회와 50주년 특별 전시회 준비를 같이할 새 직원이 출근할 거니까 준비해두세요. 그리고.”
혜란은 한쪽으로 밀어둔 재희의 꽃다발과 애플파이를 힐끗 보며 말했다.
“저거 다 버려요. 보기 싫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