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4월2022.02.24.
청담동의 고급 바. 그곳에서 박정수는 양주를 마시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무혁에게 연락이 온 건 며칠 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며 좀처럼 만나주지 않던 무혁이 먼저 연락해 온 것이다. 무슨 일인진 모르나 박정수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아버지에게 빌고 빌어 겨우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집에선 애물단지 그 자체였다. 형들은 이미 일찌감치 계열사를 받아서 입지를 탄탄하게 다지고 있는데 아버지는 박정수를 변방 계열사에 입사시켜 버린 것이다. 그것도 거의 일이 없어서 한가한 부서의 팀장으로. 그 말은 즉 놀고 있는 꼴은 보기 싫고, 일을 맡기기엔 믿을 수 없으니 말 그대로 보여주기식으로 얌전히 숨죽이고 살라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누구 마음대로.’
박정수는 능력은 없지만 야망이 큰 남자였다. 늘 형들과 비교를 당해서 자존심이 상해 있었고, 아버지는 늘 강무혁을 좀 본받으라며 혼내기 일쑤였다. 강무혁과 같이 있으면 제가 꼭 쓸모없고 초라한 인간 같아서 자존심도 상하고 짜증났지만, 그래도 친해지면 아버지도 조금은 인정해 줄지도 몰랐다.
‘그럼 형들과 똑같이 큰 계열사 하나쯤은 주시겠지.’
그거 하나 노리고 자존심도 굽혀가며 주변을 맴도는데 강무혁은 도무지 곁을 주지 않았다.
‘두고 봐. 이 거지 같은 회사에서 얼른 벗어나 버릴 거니까.’
강무혁이 계속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신재희라도 이용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신재희는 아직도 날 좋아하니까 잘 구슬려보라고 해야지.’
박정수는 완벽한 자신의 계획에 자화자찬하며 즐겁게 독한 양주를 원샷 했다.
“박정수.”
“어, 무혁아.”
약속 장소에 무혁이 도착하자 박정수가 화색을 띠며 반겼다. 무혁은 그런 박정수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같은 술로 주문을 했다.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는 무혁에게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박정수는 사람 좋은 웃음을 머금었다.
“요즘 네 얼굴 보기 왜 이렇게 힘드냐. 네 소식 들었다. KJ 건설에 들어갔다며?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너한테 그런 큰 회사가 딱 어울리지. 어울려.”
박정수가 아부를 떨었지만 무혁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잔에 담긴 술을 가볍게 흔들 뿐이었다. 한참이나 박정수의 아부를 듣던 무혁이 입을 열었다.
“대학 시절 재희와 사귀었다지.”
“어?”
웃고 있던 박정수의 얼굴에 실금이 그어졌다.
“야. 무혁아.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사귀긴 했어도 아무 일도…….”
“박정수.”
무혁이 박정수의 말을 잘랐다. 왠지 모를 위압감에 박정수의 입이 다물어졌다.
“과거는 관심 없다. 그러나 재희 앞에 나타나지 마라.”
“……뭐야. 너 질투하냐? 하하하.”
“그래.”
분위기를 풀려고 농담을 시도하던 박정수는 그대로 굳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무혁이, 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무혁이 쉽게 긍정하자 제 귀를 의심했다.
“……뭐?”
“다시는 재희 앞에 나타나지 마라. 박금호 회장님 생각해서 네 선 넘은 행동 봐주는 건 여기까지다.”
네 아버지의 얼굴을 봐서 여기까지 참아주겠지만, 허튼짓을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박정수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무혁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잔을 내려놓고 굳어 있는 박정수를 뒤로한 채 그대로 바에서 나왔다. * * * 박정수와 독대한 시간은 단 10분이었다. 그 10분의 부재는 어마어마한 일거리로 돌아왔고, 겨우 그 일을 마무리 짓고 귀가했을 땐 새벽 2시였다. 무혁은 씻은 뒤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갔다.
“왔어요?”
발소리를 죽였는데도 재희가 귀신같이 알아채고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혁이 침대에 앉으며 재희를 제 허벅지에 가만히 머리를 베고 눕게 해주었다. 재희는 순순히 무혁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 때문에 깼습니까.”
“아뇨. 막 잠들었어요.”
“기다리지 말라니까.”
“안 기다렸어요. 잠이 안 와서 좀 늦게 잠든 것뿐이지.”
가볍게 농담까지 던지는 재희를 보며 무혁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서렸다. 박정수와 왜 헤어졌는지 굳이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 확실한 건 헤어질 당시 재희가 앓았을 정도였다면 그녀에게 분명 괴로운 일이 있었다는 거다. 속에서 들끓는 질투와 분노는 둘째치고 무혁은 재희가 그 괴로운 일을 말하길 원치 않았다. 그저 이렇게 좋은 것만 보고 듣고 웃었으면 했다.
“내일부터 이 실장이 재희 씨의 운전기사를 할 겁니다.”
“이 실장이라면 무혁 씨 기사 아니에요? 그분을 왜…….”
재희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무혁은 가만히 다시 눕혔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무혁의 허벅지에 누운 재희가 물었다.
“이유를 물어도 돼요?”
“아무리 외출을 잘 안 하더라도 언제까지 택시를 타고 다닐 수 없습니다.”
“무혁 씨. 전 괜찮아요. 택시 타고 다녀도 돼요.”
“제가 싫습니다.”
“무혁 씨.”
“이 실장이라면 믿을만합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 그럼 무혁 씨는 어떻게 해요?”
“이미 새로운 기사를 구했습니다.”
“정말 그게 다예요?”
“무슨 말입니까.”
“제 운전기사로 이 실장을 지명한 이유가 정말 그것뿐이에요?”
“물론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무혁의 대답에 재희는 입속 살을 사려 물었다가 풀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정말 그 이유가 다일까. 잠시 그런 의문이 생겼지만, 재희는 수긍했다. 적어도 무혁이 저를 속이거나 감출 건 없다고 믿으니까. 그런데도 왠지 마음 한구석이 껄끄러웠다.
* * * 4월로 접어들자 겨울의 흔적은 사라지고 세상에 봄이 드리워졌다. 재희는 달력에 빨간색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러곤 그 동그라미 위에 작은 뿔 두 개도 달아주었다. 빨갛게 그린 동그라미를 어두운 얼굴로 응시하던 재희는 달력을 보이지 않게 엎어놨다. 드레스룸 문을 노크하며 재희가 말했다.
“들어갈게요.”
드레스룸으로 들어간 어제 골라둔 타이를 골라 커프스를 채우고 있는 무혁에게 다가갔다. 무혁이 익숙하게 허리를 숙여 재희와 시선을 맞췄다.
“무혁 씨한테는 밝은 건 안 어울리니까 차분한 색으로 골라봤어요.”
무혁은 타이를 매주며 말하는 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에서 박정수에게 경고한 뒤 박정수는 더 이상 무혁의 회사에 찾아오지 않았다. 재희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내심 안도하며 무혁이 말했다.
“23일 날 저녁 시간 비워 두십시오.”
타이를 매주던 재희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재희는 곧 아무렇지도 않게 타이를 마저 매주었다.
“그날 무슨 일 있어요?”
“생일이니까 저녁을 같이할까 합니다.”
생일. 재희에겐 생일이지만 동시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친모와 동생의 기일. 한 번도 생일을 챙겨 받은 적 없는 재희에겐 그날이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
자신을 위해 바쁜 와중에 시간까지 비우겠다는 무혁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기쁨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상반되는 감정이 치열하게 부딪치는 와중에도 재희는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무리하지 마세요.”
“어째서입니까.”
“무혁 씨가 바쁠 테니까요.”
“아무리 바빠도 재희 씨 생일이 먼저입니다.”
“늦겠어요. 얼른 가야죠.”
말을 돌리는 재희를 물끄러미 보던 무혁이 팔을 뻗어 허리와 머리를 감싸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재희는 익숙하게 무혁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이어지는 뜨거운 키스. 눅진하고 뜨거운 키스에 숨이 막힌 재희가 남자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자, 아쉬운 듯 무혁이 떨어졌다.
“이제 정말 가야죠.”
무혁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으나 재희는 그의 눈동자에서 조금은 저를 향한 남자의 욕심을 읽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무혁은 재희의 입술을 삼켰다. 아까보다 더 격렬하고 뜨거운 키스에 재희는 무혁의 품에 안겨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였다.
“그만…….”
이러다 정말 이 남자에게 휘말려 일을 치를 것 같아서 재희가 억지로 무혁을 밀어냈다. 무혁이 순순히 떨어지자 재희가 구겨진 슈트와 타이를 다시 정돈해 주었다.
“얼른 출근해요. 정말 늦어요.”
다행히 무혁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23일 저녁입니다.”
무혁은 끝까지 당부를 잊지 않았다. 두 달간 무혁과 함께 살면서 조금씩 이 남자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아침 식사 문제로 갈등이 있었으나 재희는 결국 아침을 준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무혁은 약속대로 출근 시간을 늦추고 함께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많은 대화가 오가지 않았으나 종일 바쁜 무혁과 유일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무혁은 이렇게 드레스룸에서 은밀하고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이제 재희는 아침마다 나누는 입맞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줄 알게 되었다. 드레스룸 키스는 무혁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게 해 주었다. 외에도, 무혁의 잠버릇은 자신을 끌어안고 잔다는 것, 항상 퇴근은 늦어도 재희가 도망가고 싶어 할 정도로 뜨겁게 안는다는 것, 말은 여전히 많지 않지만 직설적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말하지 않는 것은 무혁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굳이 깊게 파고들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줄곧 걸리는 건, 무혁 역시 자신에 대해 잘 말하지 않는다는 점. 재희는 아직도 무혁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사모님. 서재에 커피와 간단한 쿠키를 가져다 뒀어요. 조금씩 드세요.”
무혁을 배웅하고 나자 경자가 친근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항상 고마워요.”
“아유. 뭘요. 사모님이 일전에 그려주신 그림을 제 손녀딸에게 주니까 너무 좋아하던데요. 할머니 최고라며 어찌나 좋아하던지. 고 자그마한 애가 손가락 하트를 그려주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요즘 그 애 보는 맛으로 산답니다.”
“마음에 들어 한다니 다행이에요.”
손녀딸만 입에 올리면 유독 말이 많아지는 경자였다. 경자의 표정에 애정이 한껏 드러나 있어 재희는 가끔 경자의 딸이나 손녀딸이 부럽기도 했다. 잠깐 경자와 이야기를 나눈 뒤 재희는 서재로 들어왔다. 책상엔 경자가 준비해둔 간단한 쿠키와 커피가 놓여있었다. 재희는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4월 23일 날씨를 검색했다. 다행히 그날 눈이나 비 소식은 없었다.
“다행이야. 눈 온다는 소식이 없어서.”
기상이변으로 4월의 눈이 내린 날 친모는 사망했다. 그래서 재희는 매년 4월이 되면 습관처럼 날씨를 확인했다. 가끔 4월인데도 눈이 내리면 항상 안 좋은 일이 생겨서 재희에겐 4월이 무척이나 무섭고 두려운 달이었다. 4월 23일이 되면 재희는 종일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이번엔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올해부터는 좀 다를지도 몰라.”
무혁이 생일이니까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한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재희는 벌써 그날 뭐 입을까. 즐거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무혁 씨랑 저녁을 같이하기로 했다고 말씀드리면 할머니도 그 집에 오라고 하지 않으실 거야.’
항상 재희를 통제하려 했던 할머니의 연락도 뜸해졌고, 식사 준비로 구박하던 혜란의 연락 역시 뜸해졌다. 재혁은 가끔 메시지로 안부만 물을 뿐이었고 아버지인 신채근도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시아버지인 강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끔 재희가 안부 인사차 전화를 하면 혜란은 받지 않거나 짧게 대답만 했고, 강진은 ‘음. 그래.’ 정도의 대답만 할 뿐 길게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사모님이란 호칭은 아직 어색했지만 언젠간 익숙해질지도 몰랐다. 외주 작업도 전보다 많이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외출도 자유로워졌다. 덕분에 재희의 안색 역시 조금은 밝아졌다. 이렇게 결혼함으로써 무혁에게 큰 변화가 생겼지만, 재희에게도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다. Rrrr Rrrr 휴대전화가 울렸다. 막 작업을 시작하려던 재희는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님.”
-너 지금 바로 갤러리로 오거라.
역시 이번 4월은 뭔가 달라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