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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무혁의 사정 (33/128)

#33화. 무혁의 사정2022.02.21.

16549509206909.jpg“앞으론 아침 준비할 필요 없습니다.”

16549509206914.jpg“무혁 씨.”

재희는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분명 일전에 자신이 원해서 준비하는 거라고 말했고 무혁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그 후로 말이 없어서 그 이야기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무혁은 아닌 모양이었다. 무혁은 이상할 정도로 아침밥에 집착하고 있었다.

16549509206914.jpg“아직도 그 소리예요?”

16549509206909.jpg“어차피 늦을 테니 저녁도 준비할 필요 없습니다.”

16549509206914.jpg“무혁 씨.”

16549509206909.jpg“사진을 찍어서 어머니에게 전송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제 그만두십시오.”

직설적인 무혁의 말에 재희가 흠칫 몸을 굳혔다.

16549509206909.jpg“어머니 때문에 그동안 억지로 준비하느라 고생했습니다. 이제 안 그래도 됩니다. 어머니도 더 이상 아무 말씀 하지 않기로 했으니.”

덤덤한 얼굴로 말하는 무혁을 보며 재희는 시선을 내렸다. 불안함 때문에 손가락 끝이 잘게 떨려왔다.

16549509206914.jpg“……어떻게.”

16549509206909.jpg“얼마 전에 어머니께서 사무실로 찾아오셨습니다. 평소와 다른 말씀을 하셔서 제가 알아본 겁니다.”

16549509206914.jpg“혹시 어머님께 화를 내거나 그런 건…….”

16549509206909.jpg“재희 씨.”

16549509206914.jpg“저한테…… 저한테 먼저 물어보지 그랬어요. 그럼 제가 얼마든지 설명을 했을 텐데요.”

애써 침착하게 말하려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혜란이 제게 더 이상 사진 찍을 필요 없다고 말했구나. 무혁이 따져서. 결국 저 때문에 모자 사이가 갈라진 걸까. 또 저 때문에 집안이 시끄러워지는 걸까. 재희의 불안함을 나타내듯 찻물이 잘게 흔들렸다. 그때 커다란 손이 덜덜 떨리는 재희의 손을 감쌌다. 내려졌던 재희의 시선이 올라갔다. 무혁이 재희의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숙인 채 응시하고 있었다.

16549509206909.jpg“어머니가 잘못하신 겁니다. 어머니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강요했습니다.”

16549509206914.jpg“…….”

16549509206909.jpg“재희 씨 탓이 아닙니다. 이 일로 시끄러워질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재희는 대답 대신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불안함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마 무혁의 말에 실린 믿음과 강직함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무혁이 아직도 오해하는 부분이 있었다.

16549509206914.jpg‘어머님 때문에 시작한 건 맞지만 이젠 그게 아닌데.’

유일하게 무혁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아침 식사 때였다. 그 시간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무혁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그 시간마저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쩌면 무혁은 같이 식사하는 걸 즐기지 않는 거일 수도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자 재희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16549509206914.jpg“혹시 무혁 씨는 저랑 같이 아침 먹는 게 싫은가요?”

16549509206909.jpg“재희 씨.”

16549509206914.jpg“그러면 그렇다고 말해줘요.”

16549509206909.jpg“…….”

항상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하던 무혁은 무거운 시선으로 볼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을 긍정으로 여긴 재희는 손에 힘이 빠져 컵을 깨뜨릴까 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재희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풀었다.

16549509206914.jpg“알았어요. 앞으로는…….”

재희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무혁이 말꼬리를 자르며 말했다.

16549509206909.jpg“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16549509206914.jpg“네?”

16549509206909.jpg“왜 제가 재희 씨랑 같이 식사하는 걸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16549509206914.jpg“하지만 무혁 씨가 자꾸 제가 억지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고 생각하니까…….”

16549509206909.jpg“아닙니까.”

16549509206914.jpg“아니에요.”

재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대화 흐름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목이 말라진 재희가 차를 마시자 무혁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안을 찻물로 적시며 생각을 정리한 재희가 말을 이었다.

16549509206914.jpg“처음엔 어머님이 말씀하셔서 준비했던 건 맞아요. 그렇지만 저번에도 말했듯이 이젠 제가 원해서 하는 거예요. 사실 아침 식사 때 아니면 무혁 씨랑 대화할 시간이 적으니까요.”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재희가 마음에 담았던 말을 꺼냈다.

16549509206914.jpg“그래서 그 시간은 제겐 소중해요.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무혁은 재희의 말에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벅차고 말랑말랑한 감정과 다르게 무혁의 입에선 딱딱한 말이 나왔다.

16549509206909.jpg“내일부턴 출근 시간을 좀 더 늦추겠습니다.”

16549509206914.jpg“네?”

16549509206909.jpg“식사는 아주머니에게 맡기십시오.”

16549509206914.jpg“무혁 씨.”

16549509206909.jpg“제가 양보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16549509206914.jpg“……그게 무슨.”

16549509206909.jpg“제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식사 준비하지 마십시오.”

재희가 원해서라고는 하나 무혁은 역시 그녀의 손에 물이 묻는 건 탐탁지 않았다. 아무리 재희가 여기서 더 싫다고 고집부려도 무혁은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16549509206914.jpg“알았어요. 준비 안 할게요.”

무혁이 왜 이렇게까지 아침 식사 준비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데 집착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재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고집을 피워도 무혁이 절대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재희가 결국 항복했다. 기어이 재희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들은 무혁이 비로소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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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안 바래다줘도 된다는 재희를 기어이 집까지 데려다주고 사무실로 돌아온 무혁은 도시락을 묵묵히 응시했다. 무혁은 정성스럽게 포장된 도시락을 하나하나 풀어보았다. 음식이 정갈하게 담긴 도시락은 척 보기에도 맛있어 보였다.

16549509206909.jpg"……."

도시락을 착잡한 눈으로 보던 무혁은 아까 일을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 * *

16549509301002.jpg“무혁아. 이거 네 거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노크도 없이 대표실에 들어온 민석이 도시락을 내밀었다. 무혁이 치우라고 말하기도 전에 민석이 먼저 말했다.  

16549509301002.jpg“여기 앞에서 재희 씨 만났어. 너한테 줄 도시락이라고 전해달라고 하더라. 너한테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도 거절하더라고. 그나저나 내가 좀 걸리는 게……. 야, 강무혁!”

  민석의 말을 끝까지 들을 여유 따위 없었다. 무혁은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쏟아지는 직원들의 놀란 시선을 느낄 새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20층에서부터 단번에 뛰어 내려왔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틈도 없는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왜인지 빨리 재희를 만나야 한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헤치며 재희를 찾던 무혁의 발이 뚝 멈췄다.

16549509206909.jpg‘……재희.’

길 건너편 카페 창가에 앉아 있는 재희의 모습이 단번에 시야에 들어왔다. 재희를 발견한 무혁의 가슴이 격하게 뛰었다. 무혁은 당장 뛰어 들어가 묻고 싶었다.

16549509206909.jpg‘왜.’

그런 표정으로 앉아 있냐고. 그러나 격정적인 감정과는 정반대로 심장은 차게 가라앉았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마자 무혁은 뛰었다. 왜일까. 왜 이 순간 그때 재희의 말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까. 처음 만났던 겨울이 지나고 벚꽃이 화사하게 피는 4월. 학교에 관한 이야기, 친구와 지낸 이야기 등 시시콜콜한 재희의 일상을 듣고 대화하는 그 시간이 무척이나 소중했었다. 그리고 그즈음 재희의 목소리는 4월만큼이나 밝았다. 그날도 무혁은 책장에 등을 기댄 채 재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무혁이 유일하게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 드르륵,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콩콩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굳이 안 봐도 알 수 있다. 이건 재희의 발소리였다.  

16549509206909.jpg“……?”

이상했다. 항상 자기 왔다며 인사하던 재희였는데 평소와 달리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의아했지만 무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16549509206909.jpg“왔어?”

16549509206914.jpg“응.”

  짧게 대답한 재희의 목소리는 어두웠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무혁은 늘 그랬듯 끈기 있게 재희를 기다려주었다.

16549509206914.jpg“이번 4월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앞뒤 다 자른 말이었지만, 재희의 목소리에 체념이 담겨 있었다. 순간 무혁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무혁은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몰래 재희를 훔쳐보았다. 그때 처음 본 재희의 얼굴.  

16549509206914.jpg“부디 무사히.”

  말조차 끝맺지 못한 재희는 상처도 슬픔도 아닌 그저 견디는 얼굴이었다. 그때 무혁은 차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못했다. 어린 재희가 지었던 그 표정이 가슴을 저미는 것처럼 아파서. 재희를 누르는 아픔을 스스로 꺼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16549509206909.jpg‘그랬는데.’

다시는 볼 일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재희가 맞선 자리에서 지었던 그때 그 흐릿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지금을 묵묵히 견디는 그 얼굴로.

16549509206909.jpg“…….”

무혁은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재희에게 성큼 다가갔다. 무혁이 온 줄도 모르고 재희는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상념을 깨뜨리고 싶었다. 털썩. 일부러 재희 앞에 소리 나도록 앉았다. 내가 여기 있다고. 나를 보라고. 그런 얼굴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무혁은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숨이 막혀왔다. 폭발할 듯 부풀어 꽉 찬 감정이 밖으로 나오기는커녕 무혁의 숨구멍을 틀어막아 버렸다. 기척에 깜짝 놀란 재희가 돌아봤다. 무혁의 심장을 차게 가라앉게 만든 표정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동시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부풀었던 감정이 쪼그라들었다. 커피잔을 쥐어서 발개진 재희의 손을 보며 무혁은 물었다.

16549509206909.jpg“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여전히 묻고 싶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앉아 있냐고. 무엇을 견디고 있느냐고. 문득 서점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16549509354474.jpg“무혁아. 재희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을 거란다. 과보호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날 재희와 헤어지고 때마침 마실을 다녀온 서점 할아버지가 무혁을 보자마자 한 말이었다. 서점 할아버지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16549509354474.jpg“진솔한 대화는 필요하단다.”

  무혁은 서점 할아버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재희는 약했다. 약해서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그 괴로움을 말없이 삼켰다. 그런 괴로움을 굳이 끄집어내게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묻지 못했고, 정말 듣고 싶은 대답을 듣지 못했다. 아무것도 거칠 게 없는 무혁조차도 재희가 상처를 기억해서 입 밖으로 끄집어내게 하는 순간 지을 그 표정을 보기가 두려웠다. 재희는 무혁에게 그런 존재였다. 유일하게 무혁을 두렵게 만들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조심스럽게 만드는 여자. 그리고 그 어떤 누구보다 소중하고 소중해서 반드시 지켜주고 싶은 그런 유일무이한 존재. * * *

16549509206909.jpg‘그런데.’

상념에서 깨어난 무혁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재희를 데려다주고 오자마자 민석이 했던 말이 걸렸다.  

16549509301002.jpg“아까 회사 앞에서 재희 씨랑 정수가 같이 있는 모습을 봤다. 멀리서 보긴 했지만 영 꺼림칙 해. 표정도 안 좋았고.”

박정수는 후계 다툼에서 형들에게 밀려났다. 태생이 쪼잔하고 좀스러운 박정수는 자기 자신에게 쓰는 돈은 아낌이 없었지만, 남들에게 쓰는 돈에는 박했다. 그러면서도 집안 배경을 이용해 여자는 밝히고 다녀서 아버지에 의해서 결국 쫓겨나다시피 유학을 갔었다. 몇 년 만에 다시 입국한 뒤 귀찮을 정도로 무혁에게 접근하던 박정수였다. 식품 제조업을 하는 박정수의 집안 역시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집안이 아니기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으나.

16549509206909.jpg‘재희에게 접근한다고. 둘이 같은 대학교 다녔었지.’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무혁은 윤 비서에게 간단히 지시를 내린 뒤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며 노을 서점 모형에 시선을 두었다. 좀처럼 혼란스러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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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며칠 후. KJ 건설에 출근한 무혁은 윤 비서의 보고를 묵묵히 들었다.

16549509354503.jpg“알아본 결과 박정수는 사모님께서 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잠깐 사귀었던 남자친구였다고 합니다.”

순간, 책상 위에 손을 올린 무혁이 세게 주먹을 쥐었다. 표정은 덤덤했으나 손등에 불거진 힘줄은 그의 감정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윤 비서가 기민하게 무혁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16549509354503.jpg“3개월도 되기 전에 사모님이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했다고 합니다. 그 직후 박정수는 아시다시피 여성 편력 문제와 후계 싸움에서 밀려 강제로 유학 보내진 뒤 사모님과 더 이상 접점은 없었습니다.”

16549509206909.jpg“헤어진 이유는?”

16549509354503.jpg“알려진 바 없습니다. 대학 동기들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다만, 사모님이 그때 크게 앓았다고 했습니다.”

16549509206909.jpg“…… 박정수가 폭력을 행사했습니까.”

덤덤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격렬했다. 윤 비서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16549509354503.jpg“그런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오히려 박정수가 사모님에게 매달려서 대학 동기들도 왜 헤어졌는지 의문이었다고 합니다.”

16549509206909.jpg“알겠습니다. 그리고 재희에게 이 실장을 붙이십시오. 어딜 가든 함께하도록.”

16549509354503.jpg“…… 이 실장 말입니까.”

16549509206909.jpg“네. 그 이 실장.”

이 실장은 무혁의 운전기사이자 경호원으로 겉으론 인자한 인상의 중년 남자였지만 경호 무술 유단자였다. 어릴 때부터 무혁을 돌봐준 이 실장은 무혁의 신임을 받는 남자였다. 무혁이 유학 갔을 때는 물론 지금까지 함께한 이 실장을 재희에게 붙여준다는 건 윤 비서로서도 믿기지 않았다.

16549509354503.jpg‘농담하시는 건가.’

잠시 무혁의 생각에 의문을 품었지만 윤 비서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무혁이 농담을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바로 이 실장을 사모님에게 붙여두라니. 윤 비서는 믿기지 않으면서도 정중하게 대답했다.

16549509354503.jpg“알겠습니다.”

윤 비서가 나가자 무혁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러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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