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첫 방문.2022.02.17.
털썩. 그때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기척에 재희가 깜짝 놀라 돌아봤다.
“무혁 씨……?”
고개를 돌리자 거짓말처럼 무혁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사무실에서부터 급하게 온 듯 그의 옷매무새는 흐트러져 있었고, 아침에 재희가 손수 정리해 넘겨준 머리도 엉망진창이었다. 달려오느라 가빠진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무혁이 잔을 쥔 재희의 손을 잡아챘다.
“여긴 어떻게…….”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무혁이 재희의 말을 자르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무혁이 뜨거운 잔을 쥐어서 새빨갛게 달아오른 재희의 손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제야 재희는 손바닥이 뜨겁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게…….”
무혁이 차가운 물수건으로 재희의 손바닥을 감싸주었다. 깨지기 쉬운 얇은 유리 다루듯 무혁은 진지한 얼굴로 빨갛게 달아오른 재희의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저보다 훨씬 크고 두터우며 거친 그 손으로.
“…….”
진흙에 빠진 것처럼 질척거리던 박정수와의 싫은 기억이 정화수에 씻기듯 재희의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졌다. 그저, 그저 무혁이 제 손을 감싸 쥔 것뿐인데도. 열이 오른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찬 기운에 재희는 떨리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조금 생각할 게 있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무슨 생각 말입니까.”
“오늘 처음 싸본 도시락이 무혁 씨 입에 맞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요.”
“…….”
재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어 보이려고 노력했다. 부디 무혁이 잠시나마 혼란스러웠던 제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길 바라며. 무혁이 묵묵히 물수건으로 다른 손바닥도 감싸주었다. 다행히 화상 입을 정도는 아니어서 손바닥을 달구었던 열기는 금세 식었다. 무혁이 아직 발간 재희의 손을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사무실에 들어오지, 왜 그냥 갔습니까.”
“생각해 보니 약속 없이 오면 무혁 씨가 싫어할 것 같아서요.”
온통 재희의 손바닥에만 시선을 두었던 무혁의 시선이 슬쩍 올라갔다. 그녀의 생각을 파악하려는 듯한 시선. 재희는 간파당할 것 같은 그 짙은 시선을 차마 피하지 못했다. 다행히 무혁은 그냥 넘어가 주었다.
“재희 씨는 아닙니다.”
“…….”
“제 모든 일에는 재희 씨는 항상 예외입니다.”
“무혁 씨.”
“눈치 보지 마십시오.”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어도 불안했다. 카페에 들어오기 전 봤던 재희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린다. 그때 느꼈던 끔찍한 감정을 떠올리면 무혁은 심장이 차게 식는 걸 느꼈다. 그러나 무혁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속도 모른 채 재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인가요? 정말 무혁 씨 일에서 전 항상 예외예요? 무혁 씨가 싫어하는 일을 해도?”
“당연합니다.”
무혁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재희의 안색이 밝아졌다.
‘바보 같아. 신재희. 박정수 말 따위에 휘둘리기나 하고.’
무혁은 입이 무거웠지만, 그가 입 밖으로 내는 말은 모두 항상 진심이었고 거짓은 없었다. 아직 무혁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은 재희였지만,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재희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재희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구부려 무혁의 손을 잡았다. 무혁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 굳었다. 단단하고 거칠며 커다란 손이 주는 온기는 티끌만큼 남아 있던 불안감마저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이 손의 온기가 너무나도 그리웠던 재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힐 때쯤.
“웃어보십시오.”
“네?”
갑작스러운 무혁의 요구. 입가에 희미하게 서리려던 미소가 사라진 재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웃어보십시오.”
무혁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요구했다. 그걸 알면서도 가끔 재희는 당황스러웠다.
“이, 이렇게요?”
재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
어색하게 웃던 재희의 표정이 일순 당황으로 물들었다. 무혁이 커다란 손으로 두 뺨을 감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를 바라보는 시선. 무혁은 가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짙은 시선으로 자신을 보곤 했다. 방금 전까지 이 짙은 시선이 그리웠으나, 막상 마주하게 되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공간이 차단된 것처럼 커피를 뽑아내는 커피 머신 소리도, 카페의 음악도, 사람들의 목소리도 뚝 끊긴 채 짙은 시선으로 저를 보고 있는 무혁만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엄지가 보드라운 볼을 부드럽게 쓸었다. 단순한 쓰다듬인데도 묘한 긴장감이 재희의 허리를 쓸고 올라갔다.
“…….”
재희의 눈동자가 긴장감으로 잘게 떨렸다. 그런 재희를 물끄러미 보던 무혁이 재희의 손을 잡은 채 몸을 일으켰다.
“사무실로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미묘하게 당겨지던 긴장감이 파삭, 깨지며 순식간에 현실로 끌려 나왔다.
“무혁 씨.”
당장이라도 사무실로 데려갈 기세에 재희가 무혁의 손을 가만히 잡아당겼다.
“괜찮아요. 도시락만 전해주려고 잠시 온 거였어요. 전 이만 가볼 테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무혁의 일하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말도 없이 찾아온 데다 혹시라도 폐가 될까 봐 재희가 거절했지만, 무혁은 단호했다.
“이대로 보내기 싫습니다. 잠시라도 와서 쉬다 가십시오.”
“하지만.”
“한 번도 회사에 온 적이 없지 않습니까.”
물러서지 않는 무혁을 보며 재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제가 가도 괜찮아요?”
“갑시다.”
열 마디 말보다 행동이 더 확실한 무혁은 재희의 손을 잡고 성큼 걸음을 옮겼다. 재희는 볼을 붉힌 채 무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KM 건축사 사무소. 황금색 바탕의 네모난 간판에 새겨진 상호를 신기한 눈으로 보던 재희는 사무실로 들어서는 무혁을 따라 걸음을 뗐다. 커피를 들고 퀭한 얼굴로 슬리퍼를 질질 끌며 자리로 가던 직원이 무혁을 보자 허리를 곧게 세웠다.
“대표님. 다녀오셨습니까.”
무혁은 따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익숙한 일인 듯 개의치 않는 직원의 시선이 재희에게로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그분은……. 어, 혹시 사모님이십니까.”
직원의 말의 파급력은 컸다. 한창 바쁘게 일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미어캣처럼 고개를 쭉 빼고 쳐다본 것이다. 그에 놀란 재희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서려 하자 무혁이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직원들이 단번에 시선을 거두고 자기 할 일에 몰두하는 척하기 시작했다.
“들어갑시다.”
무혁이 재희를 데리고 대표실로 사라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봤냐? 봤어?”
“결혼식에서 봤던 사모님 맞지?”
“와. 대표님이 직접 사무실까지 데리고 오다니. 완전히 천지가 개벽할 일이 아니냐.”
가족이라 하더라도 사적인 일로 사무실에 절대 데리고 오지 않는 무혁이어서 직원들의 놀라움은 더 컸다. 제멋대로 찾아오는 혜란은 애초에 예외였다.
“아까 왜 급하게 뛰쳐나가시나 했더니, 사모님 쫓아 나간 거였어.”
“우리 대표님. 의외로 로맨티스트셨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대표님의 그런 모습도 보고.”
우진은 직원들의 웅성거림을 들으며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았다. 어지럽게 널려진 서류 위로 볼펜으로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우리 형. 의외로 로맨티스트였네.”
우진은 직원들이 잡담하는 걸 굳이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재희의 등장으로 지루한 사무실에 불어 넣어진 활기를 즐겼다.
“우리 형수님. 제법이야.”
우진은 턱을 괴고 대표실에 시선을 두며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 * *
“어?”
대표실에서 무혁이 오길 기다리고 있던 민석이 같이 들어온 무혁과 재희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가.”
무혁은 할 말이 아주 많은 듯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는 민석을 냉정하게 쫓아냈다. 민석이 나가자 재희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저, 역시 전 그냥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사무실에 들어설 때부터 느껴진 직원들의 시선과 민석의 반응에 재희는 부담스러워졌다. 오면 안 되는 곳을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무혁은 단호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재희의 시선이 무혁의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에 쌓인 설계도와 서류 더미는 무혁이 얼마나 바쁜 남자인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무혁은 눈치를 보는 재희를 소파에 앉혔다.
“마실 거라도 가져올 테니 잠시 기다리십시오.”
소파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어색하게 앉은 재희는 차를 타는 무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보다 덩치가 몇 배는 더 큰 남자가 묵묵히 차를 타는 모습이 왠지 낯설면서도 웃음이 났다.
‘여기가 무혁 씨의 사무실.’
재희는 신기한 눈으로 사무실 내부를 둘러봤다. 어지러운 무혁의 책상과는 다르게 사무실은 굉장히 깔끔했다. 어느 곳 하나 삐뚤어진 곳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사무실은 마치 무혁의 철두철미한 성격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던 중, 선반 하나가 재희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저게 뭐지?’
재희는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선반 쪽으로 다가갔다. 선반에는 실제 건물을 미니어처로 만들어둔 듯한 가지각색의 모형이 나란히 정렬되어 있었다.
‘귀엽다.’
모형을 신기한 눈으로 구경하던 재희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멎었다.
‘이건.’
그때 커다란 손이 쑥 뻗어 나오더니 재희가 보고 있던 모형을 집어 들었다. 깜짝 놀란 재희가 시선을 들자 무혁이 덤덤한 얼굴로 모형을 보지 못하게 다른 곳으로 치워버렸다.
“아. 그게.”
허락도 없이 봐서 기분 나빴을까. 다행히 무혁에게선 기분이 상한 기색은 없었다.
“실패한 모형입니다.”
무혁이 재희의 어깨를 감싸며 다시 소파로 안내했다. 재희는 무혁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힐끔 선반 쪽으로 몇 번이나 돌아봤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건 분명.
‘노을 서점이었어.’
건물 모형은 영락없는 노을 서점 내부였다. 노을 서점이 모르는 사람에게 매각된 뒤로 오랫동안 가지 못했지만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 따뜻한 분위기를, 온기를, 냄새를, 추억을, 그리고…… 비밀 친구를.
‘무혁 씨도 노을 서점을 아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파 끄트머리에 불편하게 앉는 재희를 본 무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앗!”
무혁은 재희의 허리를 잡더니 그대로 끌어당겨 소파 깊숙이 기대게 했다. 덕분에 재희는 소파에 놓인 푹신한 쿠션 사이에 몸이 푹 파묻히고 말았다. 무혁은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는 재희에게 말없이 따뜻한 차를 탄 컵을 불쑥 내밀었다.
“고, 고마워요.”
진하게 우려진 찻물을 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던 재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혹시 무혁 씨. 혹시 노을 서점이라고 알아요?”
“모릅니다.”
단번에 나온 무혁의 대답에 할 말이 없어진 재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일까. 그렇지만 너무 똑같아.’
직접 보지 않고서는 절대 나올 수 없었다. 모형은 말 그대로 색이며 느낌이며 노을 서점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처럼 똑같았다. 그러나 재희의 생각은 다음에 나온 무혁의 말에 싹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