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보고 싶어.2022.02.14.
재희 앞을 가로막은 박정수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서렸다.
“야. 신재희. 아무리 우리가 헤어진 사이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런 반응은 아니잖아.”
“우리가 대화까지 나눌 사이는 아니잖아요.”
재희가 날카롭게 대꾸하자 박정수가 기가 막힌 듯 하, 웃었다.
“너 많이 당돌해졌다. 예전엔 제대로 제 의견도 말 못 하더니. 남편을 등에 업었다 이거지.”
“할 말 없으니 비켜요.”
무시하고 지나치려 하는 재희를 향해 박정수가 이죽거렸다.
“근데 너 연락은 하고 온 거냐? 무혁이는 약속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거 진짜 싫어하는데.”
“…….”
재희의 발걸음이 멈추자 박정수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네 전 남자친구였잖아? 특별히 의리로 말해주는 거야. 아내랍시고 연락도 없이 찾아갔다가 무혁이랑 싸우면 곤란하지 않겠어?”
무시하자. 무시해야 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재희는 박정수의 말을 무시하지 못했다. 약속도 없이 찾아오는 걸 무혁이 싫어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대답 없는 재희를 보며 박정수가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같이 가자. 나 방금 무혁이 보고 나왔지만, 내가 특별히 너 데리고 가줄게. 내가 잘 말해주면 무혁이가 너한테 화는 안 낼 거야.”
“필요 없…….”
재희가 거절하려는 순간, 뒤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 혹시 재희 씨?”
외근을 마치고 오던 민석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재희 씨 맞네요. 긴가민가했는데. 여기서 다 뵙네요. 우리 이전에 한 번 만났죠? 한민석이라고 합니다.”
재희는 잠시 눈앞의 남자가 누군지 생각했다. 곧 카페에서 박 부장의 멱살을 잡은 무혁을 뜯어말리던 민석을 기억해 냈다.
‘하필 이럴 때.’
썩 좋지 않은 타이밍에 민석을 만나자 재희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 좋은 일이지만 카페에서 한번 뵀었죠. 그때 제대로 인사 못 드렸어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 뭐 한 게 있다고요. 아, 재희 씨라고 불러도 되죠?”
“네. 괜찮아요.”
민석이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자 재희가 어색하게 악수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무슨 일이세요? 무혁이 만나러 왔어요?”
“네. 좀 전해줄 것이 있어서…….”
“마침 잘 오셨네. 무혁이 오늘은 여기에 잠깐 출근했거든요. 들어가세요. 제가 무혁이 사무실까지 데려다줄게요.”
“아뇨. 전.”
약속도 없이 찾아오면 화를 낸다는 박정수의 말에 재희는 선뜻 민석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재희는 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도시락 가방을 내밀었다.
“조금 급한 일이 생겨서요. 죄송하지만 이거 도시락인데 무혁 씨한테 좀 전해주세요.”
“네? 직접 전해주면 기뻐할 텐데요.”
“아니요. 그럼 부탁드려요.”
그렇게 말한 재희가 서둘러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났다. 얼결에 도시락 가방을 든 민석이 얼떨떨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내가 뭐 실수했나?”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민석은 재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는 박정수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넌 왜 여기 있냐.”
재희에게 말했던 목소리와 전혀 다른 서늘한 목소리. 그러나 박정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친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긴. 무혁이 얼굴이나 보려고 왔지.”
“무혁이는 업무 중에 약속 안 된 손님의 방문은 질색한다는 거 모르냐.”
안 그래도 약속 없이 갔다가 비서실에서부터 쫓겨났던지라 기분이 심히 안 좋은 상태였다. 그러나 박정수는 그런 제 감정을 감추고 넉살 좋게 웃었다.
“그래도 넌 아까 무혁이 와이프는 데리고 들어가려고 했잖아.”
민석이 진심으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랑 재희 씨랑 같냐?”
“하하. 그러게. 내가 눈치가 없었네. 네 얼굴이라도 봤으니 이제 난 그만 간다. 다음엔 약속 잡고 올게.”
선을 확실하게 긋는 민석의 태도에도 박정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웃으며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박정수를 보며 민석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분명 재희 씨랑 저 자식이 무슨 대화를 했었는데.’
멀리서 봤지만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도망치듯 가버리는 재희와 그런 재희를 보는 박정수. 왠지 꺼림칙한 기분에 민석이 중얼거렸다.
“무혁이한테 말해줘야겠네.”
민석이 빌딩 안으로 사라지자 숨어서 지켜보던 박정수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표정을 싹 바꾸며 퉤, 가래침을 바닥에 뱉었다.
“재수 없는 새끼.”
언젠간 민석을 크게 혼내주겠다고 생각하던 박정수는 재희를 떠올렸다. 떨리는 어깨와 손, 귀까지 붉어진 얼굴. 틀림없었다.
‘아직도 날 좋아하는 게 분명해.’
재희를 이용하면 무혁은 분명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지도 몰랐다.
‘역시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니까.’
박정수는 씨익 웃었다. * * *
“아메리카노 뜨거운 거로 하나 주세요.”
눈에 보이는 카페에 무작정 들어온 재희는 커피를 주문한 뒤 창가 자리에 앉았다. 곧 커피가 나오자 재희는 뜨거운 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꾹 쥐었다. 잔을 쥔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
무혁에게 도시락을 전해주려고 한 것뿐인데 박정수와의 갑작스러운 조우는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박정수와는 예식 때 잠깐 마주쳤을 뿐, 그 후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박정수의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아서 만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는.
‘그런데 하필 다른 곳도 아니고 무혁 씨의 회사 앞이라니.’
저보다 무혁에 대해 더 잘 아는 듯 선심 쓰듯 말하는 박정수의 얼굴을 떠올리자 재희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 * * 박정수는 사귄 지 3개월이 채 되기도 전에 헤어진 재희의 첫 남자친구였다. 적극적으로 다가왔던 박정수는 사귄 지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변했다. 데이트 장소도 메뉴도 모두 일방적으로 자기 취향대로 결정했다. 재희가 메뉴를 보며 조금이라도 고민할라치면,
“어차피 다 그게 그건데 뭘 고민하냐. 여기 등심 돈가스 두 개 주세요!”
라며 제멋대로 정해 버렸다. 재희는 치즈 돈가스를 먹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하면 박정수가 타박하고 싫어할까 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때? 맛있지? 비싼 가게 가 봐야 다 그게 그거야. 여기 등심 돈가스가 최고라니까.”
“응. 정말 맛있다.”
내 입은 짧아서 웬만한 건 성에 안 찬다느니 주절대는 박정수를 보며 재희는 밥과 김치가 무한 리필되는 가게의 6,000원짜리 돈가스를 묵묵히 입에 밀어 넣었다.
“배가 부르니까 달콤한 게 먹고 싶네. 네가 살 거지?”
데이트 통장 카드로 으스대며 돈가스를 계산한 박정수가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카페에서 가장 비싼 음료만 골라 마시는 박정수를 보며 재희는 그저 웃어 보였다. 괜한 말로 그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음식이 입에 안 맞아도, 데이트 장소도 제멋대로 정하고 배려하지 않아도 그래도 괜찮았다. 처음으로 자신이 좋다며 다가온 남자였으니까. 그날은 박정수의 친구들을 소개받는 자리였다. 통금시간이 다가오자 친구들과 자리를 비운 박정수를 찾으러 나갔을 때였다. 골목에서 박정수를 발견하고 다가가려던 재희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야, 여자친구 이쁘더라. 쪼잔한 새끼가 능력도 좋네.”
친구가 낄낄거리자 박정수는 어깨를 잔뜩 올리고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이쁘면 뭐 하냐? 같이 있으면 얼마나 지루한 줄 아냐?”
“왜? 잘 웃고 얌전한 것 같은데.”
“그것뿐이야. 여자애가 사근사근한 맛이 없어. 저번에 전시회를 같이 갔었는데 재미도 없고 지루해서 토할 뻔했다. 거기다 얼마나 잘난 척하던지. 그때 내 자존심이 어땠겠냐. 남자 기를 세워주지 못할망정 잘난 체나 하고.”
항상 박정수에게 맞춰 주던 재희가 처음으로 보고 싶은 전시회가 있어서 같이 가자고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박정수는 흔쾌히 전시회에 같이 가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박정수는 전시회가 영 재미없어 보였다.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며 그림을 대충 훑어보곤 자꾸만 가자며 채근했다. 왠지 미안해진 재희는 그림에 얽힌 뒷이야기를 해 주면 좀 덜 지루할까 싶어, 열심히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그게 잘난 척으로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작 재희는 잔뜩 기대한 전시회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쫓기듯 나와야 했다. 박정수는 재희가 원하는 걸 들어줬으니 점심이나 사라며 당연하게 이야기했다. 당시 재희는 너무 미안해서 알겠다고 했고, 점심값만 10만 원 가까이 계산했다.
“그럼 왜 사귀냐? 헤어지면 되지.”
“왜겠냐. 일단 외모 하나는 끝내주게 예쁜 데다 미대 여신이잖아, 걔. 학교 홍보 모델 제의도 많이 받았는데, 안 했다고 하더라. 집에서 반대한다나, 뭐라나. 아무튼 옆에 끼고 다니면 쏟아지는 그 부러운 시선 너희는 모를 거다.”
“뭐야. 과시용이냐?”
“당연하지. 조금만 잘해 줘도 내 말을 고분고분 잘 듣거든. 제멋대로 굴어도 걘 웃기만 해. 가성비가 완전히 끝내준다니까.”
“이 자식. 너 진짜 쓰레기야.”
저질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소름 끼쳤다. 충격으로 굳어 있던 재희가 도망치듯 막 자리를 뜨려 할 때쯤 이어진 박정수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어, 혜미다.”
“혜미? 걔는 또 뭐냐?”
“나랑 썸 타는 여자.”
“뭐? 이 새끼가. 너 지금 여신급 여친 두고 양다리 걸치냐?”
“걔랑 조만간 헤어질 건데 뭐 어때. 미리 여친 만들어 둬야 안 외롭지.”
“와, 진짜 쓰레기.”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걔랑 한번 키스라도 해 봐야 하진 않겠냐. 어찌나 빼는지, 입술 근처에도 못 가봤다. 그동안 들인 공을 생각하면 이렇게 못 헤어지지. 기다려 봐. 내친김에 더한 진도까지 나갈 거니까.”
알고 있었다. 박정수가 처음 같지 않다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약속을 아무렇게나 깨고, 다음 날 듣기 좋은 말로 기분을 풀어 주었다. 학생이 감당하기 힘든 비싼 선물도 사 달라고 요구했고 같이 있어도 저에게 집중하기는커녕 건성으로 듣고 대꾸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틈만 나면 달콤한 말로 꼬드기며 자고 가라고 했었다. 그런데도 박정수를 놓지 못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재희는 애정에 목말랐고, 또한 사랑받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
역겨움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재희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다잡고 그 자리에서 도망쳐 나왔다. 밤새도록 박정수에게서 미친 듯이 연락이 왔지만, 재희는 무시했다. 나중엔 아예 휴대전화 전원을 끄고 하루 동안 꼬박 앓았다. 몸이 채 낫기도 전에 재희는 곧바로 박정수에게 이별을 고했고, 이후로 남자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몇 년이 지난 지금 박정수가 사과를 했다. 물론 재희는 그게 진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재희가 보인 반응에 박정수가 자신을 손바닥에 놓고 좌지우지하려는 그 성격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
재희는 눈을 떴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떠올리자 명치 부근이 답답해져 왔다. 재희는 흐릿한 눈으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겨울이 지나간 3월의 거리는 활기찼다. 밝은 햇살 아래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무미건조한 사람도 있고, 즐거운 듯 웃는 사람도 있고, 바쁘게 다니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나 활기찬 3월인데 어쩐지 세상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바뀐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박정수 따위가 나타난 것뿐인데.
‘박정수에게 감정은 없어. 없지만.’
그때 박정수가 친구와 나눴던 대화로 받은 상처는 아물기는커녕 고름으로 고여있었다. 앞으로도 박정수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무혁의 친구인 이상 얼마든지 만날 가능성은 컸다. 그 사실이 재희는 참담했다.
‘보고 싶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며 기다려주고 안아주는 남자. 맞선을 본 그날 백화점 앞에서 따뜻하게 잡아줬던 것처럼 무혁이 그 커다란 손으로 제 손을 한번 잡아줬으면 했다. 그 깊은 눈으로, 짙은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며 품에 안아줬으면 했다. 지금 당장 연락해도 답장이 오기까지 한참이 걸린다는 것도, 바로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재희는 무혁이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털썩. 그때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기척에 재희가 깜짝 놀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