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박정수 (30/128)

#30화. 박정수2022.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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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혁의 기세에 잠시 눌렸던 혜란이 불쾌하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16549508516809.jpg“무슨 짓이라니? 갑자기 와선 무슨 소리니?”

평화로운 오전의 일상을 방해받은 것에 대한 불쾌감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혜란을 보며 무혁이 한 자 한 자 씹어먹듯 내뱉었다.

16549508516813.jpg“재희에게 아침, 저녁상을 차리고 사진을 찍어서 보내라고 하셨다면서요.”

16549508516809.jpg“나 참. 그 애는 그 며칠을 못 참고 너한테 결국 고자질을 했니? 못 쓰겠네.”

16549508516813.jpg“제가 알아봤습니다.”

솔직한 무혁의 대답에 혜란이 짜증 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16549508516809.jpg“그래서? 너도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겨우 고작 그런 일로 지금 이렇게 온 거니?”

16549508516813.jpg“……정말 그러라고 하셨습니까.”

혜란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16549508516809.jpg“그래. 그랬어. 그게 왜? 잘못된 거니?”

16549508516813.jpg“왜 그러셨습니까.”

16549508516809.jpg“엄마가 아들 끼니 걱정하는 게 이상한 일이니?”

16549508516813.jpg“그게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16549508516809.jpg“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로서 좀 가르쳐준 것뿐이다. 그 애, 네 식성도 전혀 모르더구나. 그래서 좀 가르쳐줬다.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니?”

뻔뻔한 혜란의 말에 무혁이 짧은 한숨을 터뜨렸다. 마호가니 책상을 내려진 손을 주먹으로 꾹 말아쥐었다. 처음엔 설마 했었다. 혜란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재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자신의 일이 우선인 혜란이어서 처음엔 믿지 않았다. 혜란이 그럴 리가 없다고. 하지만.  

16549508545016.jpg“얼마 전부터 큰 사모님께서 대표님의 식성을 물어봤다고 합니다. 평창동의 강원 댁은 드디어 대표님에게 관심을 가지신다고 좋아하면서 알려주었다고 하더군요.”

  윤 비서에게 보고 받은 무혁은 경자에게 바로 확인했다. 처음엔 말을 아끼던 경자가 곧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16549508545016.jpg“그게 조금 됐어요. 작은 사모님께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사진을 찍어서 보내시더라구요. 처음엔 시어머니에게 예쁨 받으려고 그러시는 줄 알았는데…….”

  사진을 찍어 보내면 곧바로 혜란에게 전화가 왔었다고. 그럼 재희는 서재에 들어갔고, 서재에서 나올 땐 항상 안색이 어두웠다고. 괜찮다고 했는데도 재희가 꾸역꾸역 아침과 저녁을 차려놓는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침이며 저녁이며 즐기지 않는 반찬이 하나둘 사라지고 좋아하는 음식만 올라오는 이유도. 모든 이유를 알게 되자 무혁은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루고 바로 혜란에게 찾아온 것이다. 무혁은 감정을 꾹 억누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16549508516813.jpg“재희에게 신경 끄십시오.”

16549508516809.jpg“뭐?”

16549508516813.jpg“어머니께서 재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무혁은 충격으로 바르르 떠는 혜란을 똑바로 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16549508516813.jpg“어머니의 심술과 화풀이를 묵묵히 받아내고 있는 재희를 더는 괴롭히지 마십시오. ”

짝! 살과 살이 날카롭게 부딪치는 소리가 관장실에 울려 퍼졌다. 뺨을 얻어맞은 무혁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혜란을 응시했다. 혜란은 그런 아들이 괘씸해서 얼굴이 빨개진 채 흥분으로 거칠어진 숨을 씨근씨근 몰아쉬었다.

16549508516809.jpg“뭐? 참견하지 마? 괴롭히지 마? 심술? 화풀이? 네가 어떻게 엄마한테 그런 소릴 해!”

혜란이 결국 화를 누르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평소엔 우아하고 말을 조곤조곤하게 하는 혜란이었지만 수가 틀리면 쉽게 화를 냈다. 반면 고요한 표정으로 혜란을 보던 무혁이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화를 내는 혜란과 달리 무혁의 표정은 덤덤했다.

16549508516813.jpg“전 특별히 가리는 음식은 없습니다”

16549508516809.jpg“……뭐?”

16549508516813.jpg“달래도, 굴도, 딸기도, 생선도 모두 잘 먹습니다.”

혜란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무혁이 말한 음식은 모두 혜란이 무혁이 못 먹는 음식이라고 재희에게 말해준 것들이었다. 아직도 남편의 식성 하나 파악하지 못했냐고 타박하며.

16549508516809.jpg“거짓말하지 마! 강원 댁이 나한테 거짓말할 리가 없잖니! 너 그 애 감싼다고 이젠 거짓말까지 하니?”

강원 댁은 혜란이 친정에서부터 데리고 온 고용인이었다. 그래서 강원 댁에 대한 믿음은 컸다.

16549508516813.jpg“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을 겁니다. 못 먹는 게 아니라 제가 즐기지 않는 음식이라고.”

16549508516809.jpg“……!”

무혁이 먹지 않는 음식을 물어봤을 때 강원 댁은 즐기지 않는 음식이라며 알려준 게 그제야 떠올랐다. 혜란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재희를 그렇게 구박한 것이다.

16549508516813.jpg“모르셨을 겁니다. 늘 식사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셨으니까요.”

혜란은 누가 무엇을 먹는지 관심이 없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이 지긋한 식사가 얼른 끝나길 바랐다. 당연히 아들인 무혁과 우진이 뭘 잘 먹고, 못 먹는지 한 번도, 단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16549508516813.jpg“저는 이대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화가 사라진 무혁의 얼굴엔 냉기만이 감돌았다. 차라리 경멸이나, 실망이나 그런 감정이 담겼다면 이렇게 등골이 서늘하지 않았을 터였다. 지금 무혁에게선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16549508516813.jpg“그러니 어머니도 지금까지처럼 평소와 똑같이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프랑스 화가 미셸에게 신경 쓰셔야 할 때입니다.”

미셸은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화가였다. 나이도, 성별도 모르는 미셸은 항상 에이전트를 통해서 소통을 해왔다. 미술학계에서 미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로,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베일에 싸인 화가인 데다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전시회를 연 적이 없었다. 수많은 유명 갤러리에서 미셸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시기 일쑤였다. 곧 있으면 라윤 갤러리 50주년 기념일이었다. 혜란은 이 특별한 날에 꼭 미셸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몇 년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왔다. 무혁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6549508516809.jpg“그,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야?”

혜란이 부들부들 떨었다. 알고 있다. 무혁이 무슨 뜻으로 말을 하는지. 무혁은 지금 철저하게 재희와 혜란의 사이에 선을 그었다. 그래도 혜란은 무혁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니길 바랐다. 여자 한 명 때문에 지금까지 자신에게 싫은 소리 한 번도 한 적 없는 무혁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그러나 무혁은 혜란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16549508516813.jpg“그렇게 하신다면 지금까지처럼 어머니가 바라는 아들로서 있겠습니다.”

정략으로 이루어진 결혼. 남편이 낯설고 무섭기만 했던 혜란은 무혁과 우진을 낳았어도 영 정이 가지 않았다. 키우는 것도 모두 유모에게 맡기고 젖 한번 물리지 않았다. 거기에 일 욕심이 많았던 혜란은 칭얼대는 어린 무혁을 밀어냈다. 라윤 갤러리에만 신경 쓰는 사이 무혁은 자랐고, 가족들 사이에선 깊은 골이 생겨버렸다. 보는 눈이 중요한 혜란은 중요한 자리에 듬직한 무혁이나 우진을 데리고 꼭 나갔었다. 그러면 모임에 나온 사모들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뽐내길 좋아하는 혜란은 그게 마냥 만족스러웠다.

16549508516809.jpg“이…….”

혜란이 이를 뿌득 갈았다.

16549508516813.jpg“재희는 어머니에게 그런 취급 받아도 되는 여자가 아닙니다.”

오랜 시간 기다리고 기다려 겨우 만난 내 소중한 재희. 내 유일한 안식처이자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재희. 노을 서점에서 처음 만난 그때부터 그랬다. 무혁은 시린 겨울 같은 마음이 사르르 녹고 따뜻함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본가에서 느낄 수 없는 따뜻함을, 웃음을. 다정함을, 편안함을, 행복을 재희는 무혁에게 알려주었다.

16549508516813.jpg‘그런 재희를.’

자신이 모르는 사이 재희가 혜란에게 이런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이 무혁은 괴로웠다.

16549508516813.jpg“재희는 하나뿐인 누구보다 소중한 내 아내입니다.”

쐐기를 박는 무혁의 말에 혜란이 비명 지르듯 소리 질렀다.

16549508516809.jpg“지금 그깟 여자에게 눈이 돌아가서 나한테 이따위로 해? 이 미친놈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깟 여자한테 미쳐서!”

16549508516813.jpg“네. 여자에게 미친놈 맞습니다.”

16549508516809.jpg“뭐?”

16549508516813.jpg“그러니 여기서 그만두십시오. 제가 더 미치기 전에.”

부탁이 아닌 경고. 그렇게 말한 무혁이 나가버리자,

16549508516809.jpg“아악!”

혜란이 소리 지르며 찻잔을 내팽개쳤다. 쨍그랑! 늘 이 시간대 티타임을 즐길 때 항상 같이하던 아끼는 찻잔이 바닥에 무참하게 부서졌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집기를 손으로 내팽개치며 한참을 씩씩대며 화를 내던 혜란이 휴대 전화를 거칠게 낚아챘다.

16549508516809.jpg‘그래. 좋아. 네 말대로 그만둬 주마. 시어머니 짓은.’

혜란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16549508516809.jpg“나다.”

흥분이 가신 차가운 목소리로 혜란이 용건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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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KM 건축사 사무소가 있는 빌딩 앞. 재희는 긴장된 가슴을 손을 쓸어내리며 높은 빌딩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재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 오전에 혜란에게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16549508516809.jpg‘생각해 보니 밤늦게 뭔가 먹는 건 속에 안 좋잖니. 오늘은 도시락이나 싸서 직접 전해주렴. 오늘은 KM 건축사 사무소에 있을 거야. 그리고 이제 아침이든 저녁이든 나에게 사진 같은 거 안 보내도 돼. 지금 무혁은 한창 바쁠 시간이니 귀찮게 연락은 하지 말고.’

  혜란은 재희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의아했지만 재희는 일단 혜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서둘러 저녁 반찬으로 쓰려고 했던 재료들을 꺼내 도시락을 만들었다. 출발하기 전 무혁에게 전화를 할까, 고민하다 관두었다. 안 그래도 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혜란의 말을 어겨서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16549508625901.jpg‘들어가도 될까.’

일단 여기까지 왔지만 막상 들어가려니 망설여졌다. 프론트 데스크에 맡기고 돌아갈까, 아니면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을 보고 갈까 한참 동안 망설이다 직접 얼굴 보고 도시락을 전달해 주기로 마음을 굳혔다. 막 빌딩 안으로 걸음을 옮기던 재희는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누군가에게 부딪쳤다.

16549508625901.jpg“죄송합니다.”

누군지 얼굴을 살필 새도 없이 재희가 습관적으로 사과를 했다. 그러나 부딪친 상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고개를 든 재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16549508545016.jpg“신재희?”

전 남자친구 박정수였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박정수는 당황한 얼굴로 재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재희가 굳은 채 못 박힌 듯 서 있자, 박정수가 주변을 휘휘 돌아보더니 재희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16549508625901.jpg“……!”

탁. 순간 소름이 돋은 재희가 박정수의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재희의 격한 반응에 박정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가 곧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16549508545016.jpg“오랜만에 봤는데 반응이 너무 격한데? 신재희.”

바로 어제 만난 사람처럼 박정수가 친근하게 굴었다.

16549508545016.jpg“결혼식 이후로 처음이지?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 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다.”

16549508625901.jpg“여긴 무슨 일이예요.”

재희는 올라오는 구역감을 참으며 물었다. 박정수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16549508545016.jpg“어? 너 몰랐어? 나 무혁이랑 아주 친한데. 여기 자주 놀러 오곤 해.”

16549508625901.jpg“……친하다고요?”

16549508545016.jpg“응. 무혁이에게 네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 너랑 그렇게 어이없게 헤어지고 나서 줄곧 마음이 불편했거든. 재희야.”

재희는 헛웃음이 나왔다.

16549508625901.jpg‘어이없게…….’

화가 나서 열이 귀까지 달아올라서 빨개졌다. 박정수에겐 헤어진 원인이 그냥 어이없는 일이었구나. 박정수가 옛날에 재희에게 들이댔던 방식으로 다정하고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16549508545016.jpg“재희야. 나 용서해주라. 그땐 내 본심이 아니었어.”

지금은 거의 잊었지만, 박정수는 재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일까. 재희는 지금 박정수와 마주 보고 있는 지금도 끔찍했다.

16549508545016.jpg“혹시 무혁이한테 가려는 거야? 신혼부부라 그런지 뜨겁다. 뜨거워.”

16549508625901.jpg“미안하지만, 전 이만 바빠서…….”

재희가 말을 돌리며 지나치려 할 때 박정수가 재희 앞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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