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드레스룸 키스2022.02.07.
사진을 혜란에게 전송하던 재희가 깜짝 놀라 돌아봤다. 일어난 지 한참 된 듯 말끔한 모습의 무혁을 보며 재희가 휴대 전화를 뒤로 감췄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가슴이 떨렸다.
“일어났어요? 좀 더 자지 않고요. 어제도 늦게 들어왔잖아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지금 뭐 하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아, 그게.”
“사진을 왜 찍습니까.”
“그게, 오늘따라 예쁘게 잘 만든 것 같아서요.”
“이 일은 무혁에게 말하지 말거라. 결혼도 제멋대로 한 놈이 알면 나한테 화낼 거니까. 괜히 모자 사이 이간질할 생각하지 말고.”
언젠가 한 번 혜란이 그렇게 경고했다. 그 말을 기억하고 있는 재희는 적당히 둘러댔다. 혹시나 자신이 잘못 말해서, 잘못 행동해서 집안이 시끄러워질까 봐 걱정되었다. 재혁을 잃어버렸을 때처럼. 한 번 12살 된 재혁을 데리고 외출했다가 잃어버리고 홍연화가 오열하며 재희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낸 적이 있었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우리 재혁이가……! 우리 재혁이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지금도 그때 그 분위기, 공기, 홍연화의 오열과 할머니의 폭언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재혁을 찾느라 상처투성이가 된 발도, 넘어져 심하게 다친 무릎도, 추위에 심하게 부르튼 손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아침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혹여나 제 거짓말을 눈치채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무혁은 넘어갔다. 재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걸요.”
그 말에 무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무혁이 말없이 자리에 앉자 재희도 얼른 맞은 편에 앉았다. 마치 마법의 언어처럼 ‘내가 하고 싶었다.’라고 말하면 무혁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매일 아침을 하지 말라고 지겹게 말하면서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대화가 없는 아침. 재희는 무혁의 입맛에 맞춘 음식을 깨작깨작 먹으며 묵묵히 식사에 집중하는 남편을 훔쳐봤다. 무슨 음식을 내오든 칭찬이나 타박은 하지 않는다. 묵묵히 말끔하게 비우는 걸로 맛이 괜찮나보다, 라고 막연하게 추측했다. 하지만 재희는 무혁에게 꼭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저, 무혁 씨.”
“네.”
식사를 하던 무혁이 수저를 내려놓고 재희를 바라본다.
“요즘 많이 바빠요?”
“그건 왜 묻습니까.”
“새벽에 출근하고 새벽에 들어와서…… 많이 바쁜가 해서요.”
KJ 건설 일과 KM 건축사 사무소의 일이 겹쳐서 무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혜란에게 들었었다. 알면서도 무혁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아침 식사 시간 외에는 무혁과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이때 아니면 대화를 하기가 힘들어서 재희가 며칠 만에 용기를 내 겨우 물었다.
“딱히.”
“하지만 KJ 건설 쪽이랑 KM 건축사 사무소 쪽 일 둘 다 한다면서요.”
결국 못 참고 재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무혁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그게 중요한가요?”
결혼을 하고 깊은 관계까지 갔지만 재희는 아직 무혁이 조금 어려웠다. 아마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저 표정과 눈동자 때문이리라. 그래서 재희는 이런 어려운 내용을 꺼낼 때마다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일전에 아침을 차리는 일로 무혁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화를 낸 후로 더 그랬다. 무혁은 묵묵히 재희를 응시했다. 긴장감을 나타내듯 재희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지만, 재희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시선이 좋으면서도 무혁은 재희가 자신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길 바랐다.
“곧 KJ 건설에서 공들여 준비 중인 중동 초고층 빌딩 입찰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게 끝날 때까진 바쁠 겁니다.”
“얼마나요?”
“조금.”
입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노을 서점을 되찾기 위해 시작된 아버지와의 지겨운 거래도 끝나게 된다. 하지만 그건 1차 적인 마무리일 뿐이었다. 항상 확신을 가지고 일을 진행하는 무혁이 처음으로 확신을 하지 못하고 진행하는 일이 있다. 바로 노을 서점의 일이었다. 노을 서점 주변을 사들이고 주변 정리하는 일로 서울시와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드디어 시에서 허가가 났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었다.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무혁은 묵묵히 재희를 응시했다. 재희의 맑은 갈색 눈동자를 보니 확신이 서지 않는 마음이 다시 단단하게 다 잡혔다.
“그러니 아침을 차리지 않아도 됩니다.”
고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 차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압축해서 말했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당분간 새벽부터 출근해 늦게 퇴근하는 날이 많을 터였다. 자신의 스케줄 때문에 재희까지 덩달아 고생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러나 재희는 무혁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럼 앞으로 저녁은 몰라도 제가 아침은 할게요.”
“할 필요가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무혁이 단호하게 말했지만 재희는 물러서지 않았다. 무혁이 이렇게 나오면 주춤하던 재희였지만, 오늘은 무혁과 여러 대화 나눈 기쁨이 더 컸다.
“제가 하고 싶어요. 무혁 씨가 바쁘니까 이렇게 마주 보고 대화할 일이 별로 없으니까요. 조금이라도 이렇게 대화를 하고 싶어요.”
처음엔 혜란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이렇게 무혁과 대화할 수 있으니까.
“…….”
그릇을 깨끗이 비운 무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희의 고개가 무혁을 따라 올라갔다. 무혁은 재희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릇을 모두 정리하여 싱크대에 넣고 익숙하게 설거지를 시작했다. 무혁의 목덜미가 조금 불그스름해졌지만, 셔츠 깃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설거지를 마친 무혁이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자 재희는 서둘러 따라 들어갔다.
“오늘은 제가 타이, 매줄게요.”
“…….”
어젯밤 미리 골라둔 타이를 들자, 무혁이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입 맞출 듯 말 듯 긴장된 숨결이 허공에서 얽혔다. 재희는 얌전히 제게 목을 내어주면서도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무혁의 시선에 떨리는 눈동자를 내렸다. 타이를 매어주는 재희의 긴 손가락이 잘게 떨렸다.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드레스룸은 고용했다. 들리는 거라곤, 남편의 숨소리뿐. 빈틈없이 타이를 매어준 재희가 시선을 올렸다.
“다 됐……!”
풀썩, 재희가 잘 정리된 옷더미 위로 넘어졌다. 푹신한 옷더미 덕분에 다치지 않았지만, 재희는 그보다 허리와 머리를 끌어안은 채 깊게 입을 맞춰오는 무혁 때문에 타이를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머릿속이 아득해질 정도로 깊고 깊은 키스. 남자의 입맞춤에 항복하듯 재희는 무혁의 목에 팔을 조심스럽게 둘렀다. 서로의 숨결과 숨결이, 맞닿은 입술의 감촉이, 밀착된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거의 눕다시피 무혁의 품에 안겨 있던 재희는 뜨거운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항상 그랬듯 입을 맞추고 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무혁의 깊은 시선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남편의 시선. 무혁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재희를 익숙하게 안아 침대에 내려주었다.
“오늘도 늦을 겁니다. 내 몫의 저녁은 준비 안 해도 됩니다.”
무혁이 그렇게 당부해도 재희는 저녁을 준비해야 했다. 재희는 웃으며 고개 끄덕였다.
“네. 다녀오세요.”
배웅을 나가고 싶었지만 다리에 힘이 풀린 재희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 * * 하루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다. 이 말은 무혁을 두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KJ 건설 쪽과 KM 건축사 사무소 쪽, 양쪽 일을 시작하면서 무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KM 건축사 사무소에서의 경험만으로 충분하다며, 아버지 강진은 무혁을 상무 자리로 발령내 버렸다. 임원진이나 친척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무혁은 그 반발을 눌러버리듯 빈틈없이 일을 처리해 나갔다. 덕분에 KJ 건설의 일을 신경 쓰느라 KM 건축사 사무소는 메일이나 민석과의 통화 등으로 간단히 상황을 보고 받고 처리하느라 무혁은 24시간을 36시간처럼 쪼개 써야 했다. 그렇게 해도 무혁이 KJ 건설에 좀 더 신경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민석 역시 무혁에 뒤지지 않는 유능한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노을 서점의 일은 무혁이 처음부터 끝까지 처리하기로 해서 일은 더 늘어났다. 민석은 지독한 자식이라고 욕까지 하면서도 무혁이 이렇게 매달리는 이유를 알기에 더 욕은 하지 못했다.
“무혁아. 시간 되니?”
상무실에서 잠시 짬이 나는 틈에 노을 서점 설계도를 살피던 무혁이 혜란의 방문에 고개를 들었다. 혜란이 착용한 화려한 귀걸이가 사무실 형광등에 반짝였다. 나이에 비해 10살은 젊어 보이는 혜란은 무혁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무혁은 윤 비서에게 차를 내오라 말하곤 혜란의 앞에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혁은 사전 약속 없이 방문하는 손님은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도 불쾌했으나 별말은 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걸 보면 혜란은 제 볼일을 다 끝내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이럴 땐 혜란의 말을 들어주고 빨리 보내는 게 최선이었다.
“일은 무슨. 엄마가 아들 얼굴 보러 오는데 꼭 일이 있어야 오니?”
평소 무혁에게 별 관심 없던 혜란이었다. 가끔 외롭거나 기댈 사람이 필요할 때 혹은 과시용으로 찾을 뿐 평소엔 데면데면했다. 거의 일주일 만에 얼굴을 마주하게 됐지만 무혁과 혜란의 사이는 건조하기만 했다.
“살이 좀 빠진 것 같구나.”
“…….”
평소와 다르게 안부를 묻는 혜란을 무혁은 묵묵히 바라보았다.
“요즘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니?”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일이 많아서 피곤할 텐데 제대로 밥도 못 먹고 다닐까 봐 염려돼서 그러지.”
혜란은 자식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가장 우선순위는 자신과 라윤 갤러리였고, 그래서 강진 회장과도 늘 트러블이 있었다. 무혁은 그런 혜란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관심에 가까웠다. 모자 관계지만 남처럼 서먹한 관계. 그런 혜란이 안부를 묻는 것도 이상한데 걱정하는 건 더욱 이상했다. 무혁의 눈동자가 혜란의 의중을 파악하듯 침잠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보약이라도 한 제 해줄까? 한유라 알지? 그 애가 특별히 잘 아는 한의원이 있다고 하더구나.”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그 애는 네가 이렇게 고생하는데도 네가 무슨 일 하는지도 여태껏 모르더구나. 너한테 관심이 없는 거지. 밥은 제대로 할 줄 아는지 모르겠구나. 그러니까 내가 애초에 반대하지 않았니. 그 애는 못 미덥다고.”
“어머니.”
재희의 험담이 나오자 무혁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아졌다. 그러자 혜란이 얼른 말을 돌렸다.
“흠. 너 유라 기억하지? 유라는 어릴 때부터 야무졌지. 똑 부러지고.”
한유라가 누군지 무혁은 기억나지 않았다. 무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혜란이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 애가 이번에 한국에 들어왔거든. 이번에 대한 백화점 경영에 참여한다는구나. 자기는 아직 잘 모르니까 말단 사원부터 시작한다는데 겸손하기도 하지. 모임이 생기면 오다가다 한 번씩 보겠구나. 얼마 전에 봤는데 예전보다 더 예뻐졌더라.”
유라를 칭찬하는 혜란을 보는 무혁의 시선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워낙 찰나여서 혜란은 눈치채지 못했다.
“조만간 본가에 한번 오렴. 보약 한 제 해둘 테니 가져가고.”
“그 말씀 하러 굳이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애는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니? 네가 하도 집에 안 오니까 보약을 핑계로 온 거지.”
“들르겠습니다.”
“그래. 그러렴.”
혜란이 돌아간 후 무혁은 윤 비서를 불렀다.
“알아 오십시오.”
윤 비서가 상무실에 들어오기 무섭게 무혁이 본론을 꺼냈다.
“어머니와 재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리가 내려앉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본 윤 비서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네.”
윤 비서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상무실에서 나왔다.
* * * 라윤 갤러리. 관장실에 클래식이 감미롭게 울렸다. 혜란은 클래식을 감상하며 딱 알맞게 우려진 허브티를 마셨다. 좋아하는 클래식을 틀어 놓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잠시 여유를 가지는, 이 오전 시간이 혜란에겐 더없이 소중했다. 혜란은 이 라윤 갤러리를 제 분신처럼 아꼈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이 라윤 갤러리를 혜란은 밤낮으로 열심히 꾸리고 운영해 왔다. 정 없는 남편과 트러블이 있어도, 아직 어린 아들 무혁과 우진이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어도 혜란에게는 이 라윤 갤러리가 우선이었다. 지금은 거리를 두는 두 아들에게 섭섭하지만 상관없었다. 유일한 안식처이자 제 분신과도 같은 라윤 갤러리가 있으니까. 가족보다 소중한. 그러니 이 라윤 갤러리는 꼭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그게 한유라였으면 좋겠다고 혜란은 줄곧 생각해 왔다. 무혁과 유라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떠올리자 흐뭇해졌다.
‘그 애한테 뭐에 쓰여서 잠깐 판단이 흐려진 것뿐이겠지. 유라를 보면 마음이 바뀔 거야. 이혼이 뭐 요즘 대수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할 때쯤.
“자, 잠시만요! 관장님께서는 지금!”
문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혜란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여유로운 시간이 난데없는 소란스러움에 깨지자 불쾌한 감정이 치솟았다. 쾅! 문을 부숴버릴 듯 거칠게 열리자 혜란은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무슨 짓…… 무혁아.”
흉흉한 기세로 들이닥친 무혁이 평소보다 더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들의 모습에 혜란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탕, 무혁이 혜란이 특별히 주문 제작한 마호가니 책상을 내려쳤다. 무혁이 굳어 있는 혜란을 분노에 찬 눈으로 보며 으르렁,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재희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