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기다림2022.01.31.
재희는 거실에 앉아 시계를 봤다. 밤 12시가 훌쩍 넘어간 시각. 경자는 이미 자러 들어갔고 재희는 거실에서 아직 퇴근 전인 무혁을 기다렸다. 재희는 휴대 전화를 열어 무혁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깨우기 미안해서 먼저 나왔습니다. 오늘 최대한 일찍 들어가겠습니다.]
출근 잘했냐는 문자에 한참 뒤에 온 답장. 그것도 늦은 오후에 온 문자였다. 답장을 보냈지만 지금까지 무혁에게서 답은 오지 않았고, 일찍 들어오겠다고 하더니 지금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재희는 한숨을 삼키며 휴대 전화를 내려놨다.
‘그래도 결혼 전에는 정해진 시간마다 전화는 해줬는데.’
무혁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그 고민도 접어버렸다. 두 개의 회사 일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그도 많이 바쁠 터였다. 쓸데없이 연락해서 그의 일을 방해할 순 없었다. 결국 재희가 선택한 건 하염없이 무혁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삐리릭, 현관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파에 불편하게 기대어 선잠을 자던 재희가 황급히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현관으로 향하자 그곳에 귀가한 무혁이 보였다. 기다림의 지침도 잊고 재희가 반가운 목소리로 오늘 처음 본 무혁에게 인사했다.
“왔어요?”
* * *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회의를 겨우 마치고 귀가하는 길. 직접 운전하는 평소와 다르게 무혁은 차 뒷좌석에 앉아 태블릿 PC로 KM 건축사 사무소 쪽 업무를 살폈다. KJ 건설의 일을 시작하면서 KM 건축사 사무소 쪽 일은 지금처럼 짬짬이 시간 내서 처리해야 했다. 꽤 피곤할 텐데도 무혁은 태블릿 PC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KJ 건설에서 공들이는 중동 쪽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면 짬짬이 하는 이 일마저도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무혁은 그전까지 최대한 업무를 정리해둘 생각이었다.
“대표님. 전달이 늦었습니다. 아까 수리 맡기신 휴대 전화입니다.”
윤 비서가 두 손으로 내민 휴대 전화를 무혁이 받아들었다. 짬을 내 현장에 갔다가 위에서 떨어진 건설 자재에 사고가 날 뻔했었다. 가까스로 무혁은 피했지만 휴대 전화는 바닥에 떨어져 망가지는 바람에 급하게 A/S 센터에 맡겨야 했다. 현장 사고 수습과 KJ 건설 회의 등이 겹쳐 무혁은 이제야 휴대 전화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휴대 전화 전원을 켜자 재희가 보낸 메시지가 떴다.
[언제 와요? 오늘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어요?]
뒤늦게 메시지를 확인한 난감함에 무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한참 전에 온 재희의 메시지. 사고로 휴대 전화를 A/S 센터에 맡긴 그 시각이었다. 전화를 걸려던 무혁의 손이 멈췄다.
‘지금쯤이면 자고 있겠군.’
아내의 달콤한 잠을 깨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국, 무혁은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 * * 집에 도착하자 무혁은 현관을 열고 들어갔다. 혹시라도 재희가 깰까,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왔어요?”
신발을 벗던 무혁이 반가움을 실은 목소리에 잠시 동작이 멈췄다. 이윽고 무혁이 고개를 들었다. 현관까지 마중 나온 재희가 편한 원피스에 카디건을 걸친 채 머리를 느슨하게 묶고 서 있었다.
“…….”
편한 옷차림으로 마중 나온 재희의 모습에 무혁은 믿기지 않는 듯 미간을 좁혔다. 신혼여행에서도 편한 옷차림의 재희를 많이 봤지만, 홈웨어를 입고 늦은 퇴근을 한 자신을 마중 나온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낯설지만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번졌다. 무혁은 절로 재희에게 뻗어 나가려는 팔을 간신히 억눌렀다. 한번 붙잡으면 어떻게 할지 자신에게 확신이 없었다. 그런 마음과 다르게 무혁의 입에선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뭐 하고 있습니까.”
“네?”
신발을 마저 벗고 들어선 무혁이 재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겨우 자신의 어깨에 겨우 닿는 재희를 내려다보며 무혁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안 자고 뭐 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다녀왔다는 인사 대신 다짜고짜 따져 묻는 듯한 무혁의 반응에 재희는 서운한 마음을 누르며 대답했다.
“아침에 얼굴을 못 봐서……. 종일 연락도 안 되고 그래서 걱정이 되기도 해서 기다렸어요.”
잘못한 것도 아닌데 무혁의 반응에 재희는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마저 들었다. 무혁은 서운한 얼굴로 서 있는 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걱정했습니까.”
“연락이 안 되니까요.”
“얼굴도 못 봐서 보려고 기다린 거고?”
재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혁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아주 잠시 셔츠 깃에 가려진 그의 목덜미가 흥분으로 핏대가 잠시 섰지만 이윽고 가라앉았다. 무혁은 인내하며 자꾸만 재희에게 뻗어 나가려는 손을 억지로 다스렸다. 무혁에겐 장소는 상관없었지만 여긴 현관이었다. 멋대로 날뛰는 제 감정대로 몰아붙였다간 재희가 크게 놀랄지도 몰랐다. 질주하려는 본능을 냉정한 이성으로 꽉 눌러 담은 억눌린 목소리로 무혁이 말했다.
“앞으로 이렇게 자주 늦을 겁니다. 그러니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재희가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무혁이 딱 잘라 말했다.
“아무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먼저 자도 됩니다.”
“연락이 안 되는데 어떻게 걱정이 안 돼요.”
작지만 발끈한 목소리에 무혁이 입을 다물고 재희를 바라보았다. 아직 무혁의 얼굴이 조금 무섭게 느껴져서 재희가 움찔했다. 그러나 이 표정이 그저 바라만 보는 거란 걸 그간 그와 같이 지내면서 터득한지라 재희가 심호흡을 하곤 말을 이었다.
“건축 쪽 일은 잘 몰라요. 하지만 현장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제가 기다리는 게 싫으면 미리 연락 줬으면 됐잖아요.”
저녁 같이 먹을 수 있냐는 메시지에 답장도 안 해놓곤. 사실 이 말이 가장 하고 싶은 말인데 그 말은 삼켰다. 마치 떼쓰는 아이같이 느껴져서였다.
“일단 들어와요. 피곤할 텐데 쉬어야죠.”
결국 몸을 돌려 들어가려 할 때, 재희의 몸이 커다란 품에 폭 안겼다.
“……!”
화들짝 놀란 재희가 고개를 돌리려다 귓가에 닿는 입술 감촉에 얼른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재희를 품에 끌어안은 무혁이 상체를 조금 숙여 제 볼을 재희의 목덜미에 살짝 비볐다. 야릇한 감촉에 재희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무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휴대 전화가 고장이 났습니다.”
“…….”
“일할 땐 휴대 전화를 거의 안 보기도 하지만, 휴대 전화를 A/S 센터에 맡겨서 연락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 큰일이라도 있었던 거예요?”
재희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자 무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실수로 휴대 전화를 떨어뜨린 것뿐입니다.”
“무혁 씨도 그런 실수를 다 하네요.”
그녀의 얼굴에 안도가 스치자 줄곧 재희의 옆모습을 응시하던 무혁이 끌어안은 팔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재희는 그런 무혁을 달래듯 조심스럽게 팔을 토닥였다.
“늦게라도 연락 주지 그랬어요.”
그래. 궁금해하면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주는걸. 새벽에 출근한다는 걸 말하기 깜빡했을 거야. 무혁에게 쌓였던 서운한 감정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휴대 전화를 돌려받은 건 불과 20분 전입니다.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무혁은 재희를 돌려세우곤 엉덩이를 팔로 받치며 자신의 키에 맞춰서 들어 올렸다. 아내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며 무혁이 성큼 걸음을 옮겼다. 가볍고 가녀린 아내의 몸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더 잘 먹여서 살을 찌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남편의 속마음도 모르고 재희는 무혁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언제든지 전화해도 괜찮아요. 무혁 씨 전화는 받을 거니까.”
“…….”
무혁의 걸음이 멈췄다. 재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우린 부부잖아요.”
무혁의 몸이 아주 잠깐 딱딱하게 굳었다. 찰나의 굳음. 재희는 눈치를 채지 못했고, 무혁이 말없이 다시 발을 뗐다. 그의 걸음이 아까보다 조금 더 빨라졌다.
“무혁 씨. 잠깐만요.”
재희는 무혁이 데리고 온 문 앞에서 당황한 얼굴로 굳어버렸다. 재희가 직접 그린 인상 쓴 곰돌이 캐릭터가 그려진 팻말에는 [욕실]이라고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여긴…….”
“밤이 늦어서.”
무혁은 재희를 문과 자신 사이에 가둬두고 내내 갑갑하게 조이던 타이를 끌러 내리며 급하게 입을 맞춰왔다.
“……조금 급하기도 하고.”
사실은 많이.
“……!”
두껍고 단단한 팔이 재희 머리 위 문을 짚었다. 무혁의 기세에 밀려 재희가 욕실 문에 등을 기대며 속절없이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뜨겁고 달콤한 것이 급하게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헤집었다.
문과 무혁 사이에 꼼짝없이 갇힌 재희의 원피스를 커다란 손이 급하게 헤집었다. 무혁답지 않은 다급한 손길에 재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작은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퉁퉁 두드렸다.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무혁이 의외로 쉽게 물러나자 재희가 숨을 몰아쉬었다. 재희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짐짓 엄하게 말했다.
“지금 먼지투성이인 거 알죠?”
“…….”
“먼저 씻고 나서 얘기해요.”
그렇게 말하곤 재희는 뒤통수에 느껴지는 무혁의 진득한 시선은 애써 모른 체하며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문을 닫을 때 아예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는 무혁의 모습이 언뜻 보였지만 재희는 문을 닫아버렸다. 안 그러면 또 저 짙은 시선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
재희는 침대에 앉으며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감쌌다. 문득 한쪽 치마가 구겨진 걸 본 재희가 허둥지둥 치맛자락을 정리했다. 그래도 두근거리는 가슴이 쉬이 가라앉지 않아 재희는 하릴없이 방 끝에서부터 끝까지 세 번 정도 왕복하다, 안방과 연결된 베란다 문을 열었다. 한강을 낀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차가운 밤공기를 크게 들이쉬자 조금은 열기가 식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못 물어봤어.”
무혁의 기세에 밀려 재희는 KJ 건설에 출근한 이유에 대해서 묻지 못했다. 베란다 문을 닫고 침대에 앉은 재희는 무혁이 씻고 나오면 묻기로 했다. 그러나 무혁은 한참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았고, 졸음을 참던 재희는 결국 쓰러지듯 잠이 들고 말았다. * * *
“……후.”
한참 동안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찬물을 맞던 무혁은 낮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벌써 10분 이상 찬물을 맞고 있었지만, 미친 듯이 온몸을 헤집으며 들끓는 건장한 남자의 열기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무혁은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두툼한 옷을 입었지만 가볍고 가녀린 재희의 어깨와 몸은 손바닥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음과 다르게 딱딱하게 나가는 말에 후회가 밀려오는 것도 잠시, 재희가 주춤 밀려나는가 싶더니 이내 예상치 못하게 치고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맞선 때도 그랬지.’
처음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더니 소심하지만 꿋꿋하게 제 할 말을 하던 재희. 그 모습조차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거 보니 제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다. 시간이 늦었는데도 자신을 기다렸다는 말에 차오르는 행복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우리 이제 부부잖아요.”
그 말 한마디에 간신히 억눌렀던 욕망이 제대로 터져버렸다. 부드럽게 속삭이던 재희를 떠올리자 간신히 식혔던 열기가 다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한다. 무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벅벅 닦으며 아까보다 더 묵직한 한숨을 흘렸다. ……아무래도 더 오래 욕실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 * * 욕실에서 나오니 어느덧 40분이 지나 있었다. 젖은 머리를 닦으며 방으로 들어오던 무혁의 걸음이 멈췄다.
“…….”
기다리다 그대로 잠든 건지 재희가 앉은 자세 그대로 불편하게 옆으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무혁은 재희를 조심스럽게 안아 침대에 눕혔다. 혹여 찬바람이라도 들까 싶어 꼼꼼히 이불까지 덮어준 무혁은 재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머리카락을 쓸어주던 손은 이내 이마, 코, 뺨을 스쳤다. 그리고 이내 손은 한참이나 입술에 머물렀다. 작고 통통한 입술을 응시하며 부드럽게 쓸던 무혁의 시선이 침잠하게 가라앉았다. 무혁은 상체를 숙이며 아내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췄다.
“조금만 참아.”
KM 건축사 사무소의 대표로서 진행하는 일이 시작 단계에 들어갔다. 무혁은 그 일을 위해, 그리고 지키기 위해 KM 건축사 사무소를 열었고, 재희를 얻기 위해 KJ 건설에 들어갔다. KJ 건설 쪽 일이 아무리 바빠도 KM 건축사 사무소에서 진행하는 이 일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진행할 예정이었다. 한동안 아주 바쁘겠지만 무혁은 재희가 조금만 견뎌 주길 바랐다.
“곧 끝날 테니.”
무혁은 조심스레 재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보드랍고 따뜻한 입술. 가볍게 닿았을 뿐인데도 잔잔한 만족감이 온기처럼 번졌다.
“재희야.”
그때 그 노을 서점에서 불렀던 것처럼 무혁은 아내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 * *
-너, 지금 반항하니?
“…….”
며칠 동안 재희는 출근하는 무혁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작정하고 일찍 일어났는데도 무혁은 이미 출근한 뒤였고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며칠째 무혁과 식사하기가 어려웠고 밤늦게 퇴근한 무혁과 잠들기 전에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게 다였다. KJ 건설에 출근하는 일로 물어보려고 해도 뜨겁게 겹쳐오는 무혁 때문에 물어볼 타이밍을 계속 놓치고 있었다. 그러다 삼 일째 되는 오늘. 아침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혜란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침 인사를 채 끝내기도 전에 날아든 혜란이 날카로운 말.
-내가 아침, 저녁으로 사진 찍어서 보내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사진을 안 보내는 건 나를 우습게 아는 거니, 뭐니.
“죄송해요. 어머님. 하지만 사정이…….”
-무슨 사정? 일어났더니 무혁은 이미 출근한 뒤였고, 밤엔 너무 늦게 퇴근해서 같이 식사할 새가 없었다? 너 지금 그 말하는 거니.
재희는 경자가 안쓰럽게 보는 그 시선도 싫어서 서재에 들어와 30분째 혜란의 타박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무혁보다 더 일찍 일어나면 될 일이고, 무혁의 퇴근이 늦으면 도시락을 싸서라도 네 남편 식사 챙겨줄 생각을 해야지, 어디서 핑계를 대고 있어?
“…….”
-한 번만 더 이래 봐. 그땐 정말 날 무시하는 걸로 알 테니까.
“……네. 죄송해요. 들어가세요, 어머…….”
뚝. 재희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냉정하게 끊겼다. 재희는 뜨거워진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삼켰다. * * *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왜 그리 화가 나셨어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혜란은 뜻밖의 방문자를 확인하자마자 화색이 돌았다.
“어머나. 유라야. 네가 여기 갑자기 어쩐 일이니.”
현재 피아니스트이자 훗날 대한 백화점을 경영하기 위해 공부 중인 대한 그룹의 장녀 한유라였다. 키가 크고 늘씬하며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유라를 어릴 때부터 봐온 혜란이 퍽 아꼈다. 내심 유라를 며느리로 점찍어 두었던 혜란은 무혁이 재희와의 맞선을 끝내고 나면 둘이 만나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혁이 생뚱맞게 재희와 결혼한다고 해서 얼마나 화가 나던지.
“이 근처를 지나다가 어머님이 생각나서 좋아하시는 S호텔의 애플파이를 사 왔어요. 저 한가한데 저랑 놀아주세요.”
유라가 사근사근하게 굴며 팔짱을 끼자 혜란이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날 생각해 주는 건 유라밖에 없다니까. 잠시 기다리렴. 마침 얼마 전에 새로 들여온 홍차가 있어. 유라도 알지? 네가 맛있다며 추천해준 그거야.”
“와아. 정말요?”
손바닥까지 치며 좋아하는 유라를 보며 혜란은 비서에게 홍차를 내오라 일렀다. 따끈한 홍차와 애플파이를 두고 자리에 앉으며 유라가 말했다.
“그런데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셨는데, 제가 방해한 거 아니에요?”
“아니야. 아니야. 우리 유라 보니까 기분이 사르르 풀렸어.”
“그럼 다행이에요.”
유라가 화사하게 웃었다.
“정말.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우리 유라가 내 며느리가 되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무혁 오빠 신부도 굉장히 예쁘던 걸요.”
“이런 자리에서 그 애 얘기는 왜 해?”
“그러지 마세요. 어머님 며느리인데, 예쁘게 봐주셔야죠.”
“예쁜 구석이나 있으면 그러겠지.”
처음엔 무혁을 선 자리에 내보낼 생각은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모임에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박 사모가 자기 아들에게 마음에 드는 아가씨 선 자리가 들어왔다며 자랑만 하지 않았어도. 박 사모를 골려주려고 중간에 가로챈 건 좋은데 그게 결혼까지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분명 그 애가 결혼하자고 매달린 거겠지. 욕심만 가득해서는.’
진중한 무혁이 보자마자 결혼하자고 할 리는 없을 테고 분명히 재희, 그 애가 꼬신 게 틀림없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재밌는 얘기 해요.”
유라가 혜란을 살살 달래며 애살맞게 굴었다.
“그럴까. 그러고 보니 귀국한 지 이제 6개월 됐나? 어때. 좀 한국 생활은 익숙해졌어?”
“그럼요.”
유라는 혜란의 말에 맞장구치며 웃어 보였다. 속마음을 숨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