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전해주지 못했어.2022.01.27.
무혁이 출근하고 두 시간 뒤. 알람이 두 번 울리기 전에 재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양가에 다녀오자마자 씻고 거의 기절하듯 잠든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찌뿌둥한 몸을 주무르던 재희는 문득 허전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침대와 화장대가 전부인, 말 그대로 잠을 자기 위한 공간인 침실은 지나치게 넓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 어젯밤에 제게 팔을 내주었던 무혁은 없었다. 시계는 이제 막 아침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도 먼저 일어났구나.”
신혼여행지에서도 무혁은 굉장히 빨리 일어났다. 재희도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무혁은 그보다 더 빨랐다. 목이 말라 잠깐 새벽에 깨면 업무와 관련한 통화를 하는 모습도 자주 목격했었다.
‘대체 잠은 언제 자는 거지.’
그렇게 적게 자면서도 밤이면 자신을 품어오는 무혁의 짐승 같은 체력에 질린 재희는 고개를 저으며 방에서 나왔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통통, 도마를 두드리는 기분 좋은 소리와 보글보글 끓는 찌개 냄새가 재희를 반겼다.
“일어나셨어요?”
도우미 아주머니, 경자가 푸근하게 웃으며 인사하자 재희가 화들짝 놀라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일찍 일어나셨네요. 마침 아침 식사 다 됐어요.”
“제가 좀 도와드릴게요.”
재희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다가가자 경자가 웃으며 거절했다.
“아유. 괜찮아요. 사모님. 제가 할 일인걸요. 얼른 씻고 와서 앉으세요. 오늘 첫날이라 특별히 솜씨 좀 부렸답니다.”
사모님이란 호칭에 재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호칭이었지만 아무래도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경자는 신혼집을 구할 때 무혁이 직접 고용한 사람이었다. 심층 면접을 통해 심성이 푸근하고 따뜻하며 솜씨가 좋은 사람으로 특별히 뽑았다고 무혁이 언질도 해 주었다. 선하고 푸근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무혁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그래도…….”
본가에 있을 땐 재희는 항상 아침 식사 준비를 도왔었다. 재희가 가만히 앉아 있는 꼴을 못 보는 할머니의 성미도 성미였지만, 같이 있으면 항상 좋은 소리를 못 들었기에 먼저 나서서 도운 이유도 있었다. 이 상황이 어색한 재희가 엉거주춤 서 있자 경자가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사모님.”
경자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재희를 대했다.
“그래도 제가 뭐 도울 일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재희는 경자가 곤란할까 싶어 더 이상 고집 피우지 않기로 했다. 씻고 나오자 이미 아침 식사는 차려져 있었다. 아침으로 먹기엔 과한 반찬 가짓수에 본가에서도 이렇게 먹어본 적이 없던 재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색하게 식탁에 앉으려던 재희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저, 그런데 왜 수저가 한 벌 뿐이에요?”
식탁에는 무혁의 수저가 없었다. 물을 따라 놔주던 경자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사장님께서는 이미 출근하셨어요.”
출근?
“네?”
재희의 반응에 경자가 되려 당황했다.
“모르셨어요? 사장님께선 한참 전에 나가셨어요.”
“…….”
프랑스에서 무혁은 한국에 돌아가면 조금 바빠질 거라 말은 했었다. 그러나 출근이 이렇게 이르다고 바로 어제 잠들기 직전까지도 무혁은 재희에게 출근이 이렇게 이르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왜 당연하게 여겼을까.’
재희는 처음 아침을 맞이하는 신혼집에서 당연히 무혁과 함께 식사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재희 혼자뿐이었다. 신혼여행 내내 같이 붙어있어서 잠시 잊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결혼 전에도 그랬고 신혼여행 때도 업무 전화를 할 정도로 무혁은 바쁜 남자였다. 맞선 자리에도 일하다 와서 첫인상이 나빴을 정도니까.
“그, 사모님을 깨우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마 사모님을 생각해 주시느라 그러셨을 거예요.”
안색이 어두워진 재희의 눈치를 보며 경자가 서둘러 위로했다.
“어제 새벽에 출근한다는 걸 들었는데 제가 깜박했어요. 잘 먹을게요.”
그런 경자에게 웃어 보이며 재희는 첫술을 떴다. 프랑스에서 무혁과 함께 식사를 할 때,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도 말끔하게 그릇을 비웠던 재희였다. 분명 경자가 정성스럽게 만들었을 맛있는 아침 식사였고 입에도 맞았지만, 왜인지 음식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넘어가질 않았다.
“잘 먹었어요.”
결국, 재희는 음식을 반 정도 비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식사를 마친 재희는 신혼집을 둘러볼까 하다 마음을 바꾸고 서재로 들어왔다. 침실만큼이나 큰 서재는 무혁이 특별히 만들어준 재희만의 공간이었다. 주로 나무를 이용해 꾸며진 서재는 일러스트레이터인 재희를 위해 갖가지 필요한 물품이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작업에 참고할 만한 책은 물론 재희가 비싸서 막상 가질 수 없던 재료도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더 이상 좁은 방에서 눈치 보며 작업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넓은 책상에서 당당하게 작업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모든 것이 낯선 신혼집이어서 그런지 이 서재도 낯설었다.
“그래도 여기랑 친해져야겠지.”
앞으로 어쩌면 낮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오롯한 자신만의 공간. 재희는 서재와 친해지기 위한 그 첫 번째로 의자에 앉았다. 재희는 말끔한 책상 위를 손으로 쓸었다. 책상의 높이도, 책장의 높이도, 의자도, 여기 있는 모든 것은 재희의 키와 눈높이에 맞춰 무혁이 특별히 마련해 준 것들이었다. 신혼집이 정해지고 나서 어떻게 꾸밀지 고민하고 있을 때 무혁이 물었었다.
“꼭 가지고 싶은 공간이 있습니까.”
그 질문에 재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집에서 자신만의 공간이라곤 작은 방뿐. 막상 방 외에 자신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선뜻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노을 서점을 떠올렸다. 해가 질 때면 불투명한 유리문에 노을이 가득 고여있곤 했다. 그게 너무 예뻐서 문을 열면 유리에 고여있던 노을이 쏟아져 들어와 서점 안을 가득 채웠다. 그 풍경이 너무나도 황홀하고 아름다워서 재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서재요. 포근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노을 같은 그런 서재.”
어린 재희는 모든 걸 품어주는 노을 서점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공간을 갈망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재희만의 서재. 안락하고 포근하며 따뜻한 분위기의 서재는 재희의 취향에도 꼭 맞았다. 그런 무혁이었다. 신혼집의 방을 하나 만들더라도, 신혼여행지를 정할 때도 재희에게 물어봤었고 재희가 원하는 걸 결국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니까 분명히.
“말하는 걸 깜박한 걸 거야.”
잠시라도 그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끼다니.
‘하지만.’
생각해 보면 무혁은 자신에 대해서나, 일에 대해선 잘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 주로 재희가 재잘거리고 무혁은 묵묵히 들어주는 그런 관계. 재희가 궁금해하면 기꺼이 대답해 주었지만 무혁은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아냐. 원래부터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려 하자 재희는 그 생각을 끊어냈다. 앞으로 오랜 시간 같이 얼굴 보며 살 텐데 조바심낼 필요 없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그런 소소한 재미 하나쯤은 남겨둬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일이나 할까.”
나중에 무혁이 귀가하면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재희는 손에 익은 연필과 스케치북을 꺼냈다. Rrrr Rrrr 스케치북 위에 막 선을 하나 그으려던 찰나 휴대 전화 벨이 울렸다. [어머님] 휴대 전화 액정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재희가 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님. 안녕하셨어요.”
-너는 뭐 하느라 전화를 안 받니.
재희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지만 혜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죄송해요. 잠시 다른 일 하느라.”
-집에서 노는데 일은 무슨 일.
혜란이 코웃음을 쳤다.
-무혁은 출근했니?
“네. 무혁 씨는 출근했어요.”
-몇 시에.
재희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경자는 무혁이 한참 전에 출근했다는 말만 했을 뿐, 몇 시에 출근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재희 역시 아는 척을 하느라 경자에게 무혁이 몇 시에 나갔는지 묻지 못했다.
“그게…….”
-그럴 줄 알았다. 남편이 출근하는지, 안 하는지 보지도 않았어? 네 남편에게 관심은 있니?
“죄송합니다.”
-됐다. 내일부턴 무혁이보다 일찍 일어나서 출근을 도와줘. 집에서 놀면 그 정도 일은 해야 하지 않겠니. 안 그래도 KJ 건설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어서 정신없이 바쁠 텐데.
“네?”
재희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KJ 건설이라니. 금시초문이었다.
-네? 라니. 너 설마 몰랐니.
“…….”
-너 정말 제대로 하는 게 뭐니? 남편보다 늦게 일어나, 남편 출근 배웅도 안 하고, 이젠 남편이 무슨 일 하는지도 모르니? 넌 어떻게 된 애가 그러니?
혜란의 타박에 재희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에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한텐 그런 말은…….’
재희는 무혁이 ‘당연히’ KM 건축사 사무소에 출근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정작 무혁이 출근한 곳은 KJ 건설이었다. 그리고 재희는 그 사실을 지금 막 혜란을 통해 알게 되었다. 무혁에게 큰 변화가 있었지만 정작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 재희는 까맣게 몰랐다.
-정말 네 친정에선 널 뭘 가르치고 보낸 건지. 남편의 일에 관심도 가지지 않는 아내가 어디 있어.
“죄송해요.”
-됐고, 내일부터 아침, 저녁마다 무혁이 뭘 먹었지 사진 찍어서 나한테 보내렴.
“매일……이요?”
-왜, 못하겠어?
네까짓 게 감히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니? 고압적인 혜란의 목소리가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재희는 이런 고압적인 말투와 목소리에 유독 약했다.
“아니요. 어머님 말씀대로 할게요.”
혜란과의 통화를 끝낸 뒤 재희는 지친 얼굴로 의자에 기대앉았다. 불과 몇 분의 전화통화였지만 종일 운동한 것처럼 녹초가 되었다. 재희는 휴대 전화를 열어 메시지 화면을 켰다. 마지막 메시지는 예식 전날 무혁이 몇 시까지 데리러 가겠다는 내용이 다였다.. 재희는 그간 무혁과 주고받은 메시지를 훑었다. 간단한 대화. 모든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오전 9시. 지금쯤이면 업무 시작했을까. 지금 보내도 괜찮을까. 고민하던 재희는 머뭇하다 메시지를 보냈다.
[언제 출근했어요? 깨우지. 잘 출근했어요?]
전송. 무혁에게서 답장은 그날 오후가 되도록 오지 않았다.
* * * 그 시각. KM 건축사 사무소 대표실 문이 쾅, 소리 내며 열렸다. 평소처럼 개인 휴대 전화는 서랍 깊숙이 넣어둔 무혁은 설계 도면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쳐들어온 방해꾼에 일을 방해받은 무혁의 불쾌한 시선이 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방해꾼, 한민석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들어왔다.
“야, 강무혁!”
침입자가 민석임을 확인한 무혁이 불쾌한 기색을 거두고 다시 시선을 설계 도면에 두었다. 성큼 다가온 민석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소리쳤다.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무슨 말.”
흥분한 민석에 비해 무혁은 지극히 평온했다. 그게 더 자극했는지 민석이 무혁이 보던 모니터 화면을 꺼버렸다.
“한민석.”
싸늘한 시선에도 민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따졌다.
“너 왜 말 안 했어? KJ 건설에 들어가기로 한 거!”
민석의 말에 무혁이 미간을 엄지로 꾹꾹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한테 들었어.”
“지금 그게 중요하냐?”
“입 다물라고 했더니.”
무혁이 대표실 문을 닫으며 들어오는 우진에게 시선을 던졌다. 범인, 우진 역시 드물게 화가 난 표정으로 반박했다.
“뭐가. 공동대표인 민석이 형이 모르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동생인 나도 오늘 아침에야 알았는데.”
무혁은 민석과 우진에게 차례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모니터 화면을 켰다.
“사실이다. 오늘 아침에 KJ 건설 이사회 회의에 참석했어.”
부정하지 않는 무혁을 보며 민석이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이미 집에서 혜란에게 무혁이 이사회 회의에 참석한다는 소리를 들은 터라 우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여기 정리할 거면 적어도 나한테 미리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너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냐? 어?”
신혼여행까지 간 무혁이 현재 수주 맡아서 진행 중인 현장에 대해 이리저리 참견까지 해서 안 그래도 최근 위경련이 오던 참이었다. 그런데 신혼여행 다녀오자마자 KJ 건설 이사회 회의에 참석한 것도 모자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까지 하고 있다. 무혁이 지나치게 입이 무거운 건 하루 이틀이 아니라지만 해도해도 너무했다.
“야. 강무혁 너 진짜.”
“정리 안 해.”
“뭐?”
“여기 일 정리 안 한다고.”
“그게 무슨 소리…….”
“당분간은.”
뭐라 말하려던 민석이 입을 벌렸다.
“설마 너…….”
무혁이 처음 KM 건축사 사무소를 열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민석은 기억해 냈다. 그 마음이 갸륵하고 재미있어서 함께 사업하기로 마음을 먹고 덥석 무혁의 손 잡았던 기억도 있다. 그 마음이 갸륵하고 재미있어서 덥석 무혁의 손 잡았던 기억도 있다. 사무소가 번창하면서 사업에 집중하다 보니 이 KM 건축사 사무소가 세워진 이유를 민석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직.”
서점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무혁이 유학 도중 잠깐 한국에 왔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서점 할아버지는 지극히 평온했다. 서점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 마지막 약속.
“고맙다. 무혁아. 그리고 미안하구나. 너에게 주질 못해서. 부디 지켜다오. 그리고 후회하지 말아라.”
서점 할아버지는 노을 서점을 무혁에게 부탁했고 후회하지 말라고 했다. 무혁은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다.
“……재희에게 전해주지 못했어.”
목소리에 진하게 실려 있는 무혁의 감정에 민석과 우진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