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새로운 시작2022.01.24.
‘어떡하지.’
재희는 도화가 무혁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릴까 봐 걱정되었다.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도화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야수?”
겁에 질리긴커녕 입을 크게 벌린 아이 입에서 ‘야수’란 말이 튀어나오자 무혁의 한쪽 눈썹이 움찔했다.
“우와. 야수다, 야수. 나 처음 봐!”
도화는 눈까지 반짝이며 즐거워했다. 이젠 아예 대놓고 무혁의 주변을 뱅글뱅글 돌았다. 도화는 동그란 머리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며 신기한 동물을 보듯 관찰했다. 아이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던 무혁이 갑자기 도화를 들어 올려 옆구리에 끼웠다. 도화를 무슨 짐짝 취급하는 무혁의 행동에 재희가 당황한 얼굴로 굳었다. 그러나 정작 도화는 재밌는지 꺄르륵 웃으며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무혁이 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당황한 얼굴로 굳어 있는 재희를 돌아봤다.
“아는 아이입니까.”
“아니요. 오늘 처음 봤어요. 갑자기 나타난 아이라.”
“부모는요.”
재희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살래살래 젓자 무혁이 옅은 한숨을 흘리며 도화를 내려다보았다.
“부모님은.”
“야수 아저씨. 나 더 높게 올려 줘. 응?”
역시나 도화는 자기 할 말만 했다. 그러나 무혁은 단호했다.
“내 질문에 대답해 주면.”
“올려 줘! 안 올려 주면 대답 안 해 줄 거야.”
“대답 안 하면 안 올려준다. 대답하면 올려 주고. 네가 선택해.”
“안 하고 올려 주면 안 돼?”
“뭐가 네게 좋을지 잘 생각하고 대답해.”
“대답하면 올려 줄 거야?”
“그래.”
말투는 딱딱하지만 아이와 협상을 시도하는 무혁을 보며 재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다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나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는 도화와 진지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는 무혁은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돌아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재미있기도 해서 지켜보던 재희는 웃으며 그림을 마저 마무리했다. 그사이 고민을 끝낸 도화가 대답했다.
“우리 엄마는 화가인데 도화를 데리고 자주 여기에 와. 근데 여기서도 맨날 그림만 그리고 나랑 안 놓아줘. 엄마는 저기 아래에 있어.”
“엄마에게 데려다줄게.”
무혁이 말했으나 아이는 단호하게 선택의 대가를 요구했다.
“약속 지켜. 야수 아저씨!”
결국 무혁은 약속한 대로 도화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곤 덤덤한 목소리로 비행기, 비행기를 말해 주며 몇 번 높게 들어 올렸다가 내려주었다. 그제야 도화는 만족한 얼굴로 재희에게 달려왔다.
“자. 여기 공주님 그림.”
“우와!”
아이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온몸으로 행복 기운을 뿜어내는 아이를 보는 재희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동글동글한 아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재희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자신을 응시하는 무혁과 시선이 부딪쳤다.
‘또.’
어느 순간부터 무혁은 자신이 웃을 때 항상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다시는 못 보는 모습을 담아 두려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그 격한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때마다 재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장도화!”
그때 숏커트 머리에 차가운 인상의 여자가 계단 아래에서 소리치며 뛰어 올라왔다.
“엄마!”
도화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단숨에 올라온 장세라가 와락 도화를 껴안았다.
“너 왜 여기 있어? 엄마 곁에 꼭 붙어 있으라고 했잖아!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엄마 걱정 끼치게 할 거야?”
예상치 못한 세라의 격한 반응에 얼떨떨해하던 도화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야. 아니야. 엄마가 잘못했어. 도화야, 울지 마. 응?”
그러자 세라가 도화를 품에 꼭 끌어안고 다독여 주었다. 많이 놀란 듯 세라의 어깨도 가늘게 떨렸다.
“저, 일단 진정하세요. 아이도 놀란 것 같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세라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었지만 세라는 침착한 얼굴로 도화를 안고 일어섰다.
“아이를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가 없어져서 놀라서 찾던 중이었어요.”
“아이는 한눈파는 순간 사라집니다. 다음부턴 주의하십시오.”
무혁은 역시나 돌려 말하지 않았다. 세라의 표정이 아주 잠시 굳어졌지만 틀린 말은 아닌지라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사례를 드리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요.”
“괜찮아요. 오히려 도화 덕분에 재미있었는걸요.”
갑자기 나타난 도화였지만, 잠시나마 아이가 주는 생동감에 재희는 즐거웠다. 마치 입 안에서 팝핑 캔디가 통통 튀는, 그런 생동감을 느끼게 해 준 도화가 고마웠다. 계속 사례를 하겠다는 세라를 겨우 돌려보냈다. 재희는 엄마 품에 안겨 돌아가는 내내 계속 돌아보며 손을 흔드는 도화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무혁은 도화에게 손을 흔들어 주지 않았지만 아이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지켜보았다. 마침내 세라와 도화가 보이지 않게 되자 재희가 무혁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무혁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 잘 다루시네요.”
“그렇습니까.”
“전 아이가 영 어렵거든요. 잘 접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저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잘 다루시던걸요. 도화가 좋아했어요.”
무혁과 아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지만, 의외로 잘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혁은 보기와 다른 면을 가진 남자이니까. 거친 외모와 다르게 아름다운 코모도를 설계하고 인테리어 했던 것처럼.
‘만약에…… 아주 만약에 아이를 낳는다면 그때도 이럴까.’
아이의 손을 잡아주고 가끔 도화에게 했던 것처럼 비행기, 비행기라고 말해주며 아이와 잘 놀아주는 무혁과 그의 팔짱을 낀 자신. 아주 잠깐 스친 행복한 그림에 재희가 남몰래 볼을 붉혔다. 그러나 무혁의 입에서 나온 차가운 말에 재희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아이는 원하는 걸 솔직하게 내보이니까 원하는 걸 쥐여 주면 됩니다. 그러니 본심을 숨기는 어른들과 다르게 다루기 쉽습니다.”
집안에 아이도 별로 없거니와 있어도 친척 간의 교류가 적었다. 일 년에 두 번 그룹사 신년과 송년 모임에서나 만났을 뿐이다. 견제와 물 밑에 깔린 신경전이 오가는 자리. 무혁이 KM 건축사 사무소를 차리고 나왔을 때 KJ 그룹 후계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친척들이 야심을 드러냈다. 무혁이 적당히 방어를 해놔서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강진 회장이 무혁에게 KJ 그룹에 들어오라고 채근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과하게 욕심이 많은 친척들을 경계했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무혁은 그런 아버지의 초조한 심리를 이용해 재희와의 결혼을 내걸고 협상을 시도했고 마침내 거머쥐었다. 그리고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성과를 만들어 결과물을 보여줘야 할 때였다. 그러니 무혁은 오히려 솔직하게 제가 원하는 걸 내비치는 아이는 오히려 다루기 쉬웠다.
“네…….”
반면 그 사정을 모르는 재희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어쩌면 무혁은 아이를 좋아하지 않고, 아이를 원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고작 도화와 잘 놀아주는 모습, 그 한 부분만 보고 제멋대로 무혁과 행복한 미래를 그려봤던 자신이 창피했다. 톡. 차가운 물방울이 코끝에 떨어졌다. 어느새 짙어진 먹구름에서부터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며 파리 전경을 적셔가고 있었다. 펄럭, 재희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혁이 코트로 재희 머리 위를 가려주며 재희의 어깨를 잡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무혁의 가슴에 안기자 그의 강한 체취가 맡아졌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재희가 고개를 들자 어느덧 무혁의 얼굴이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재희는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입술과 뜨거운 숨결이 맞닿았다. 코트는 차가운 겨울비로 젖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 아래 따뜻한 연인의 입맞춤은 길고 길게 이어졌다.
* * *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세라의 시선이 가느스름해졌다. 도화가 제일 싫어하는 당근을 넣은 카레가 오늘 저녁 메뉴였다. 세라가 당근을 써는 걸 봤는데도 도화는 신경 쓰지 않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스케치북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근만 보면 넣지 말라고 떼쓰던 게 바로 어제였다.
“장도화. 너 뭘 그렇게 봐?”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한 세라가 물었다.
“엄마. 이거 봐. 이 공주님 도화랑 똑같이 생겼다?”
“공주님?”
도화가 심심할까 봐 얼마 전 생일 때 사준 스케치북이었다. 잘 때도 스케치북을 끼고 자는 도화여서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에 그려진 그림에 집중하고 있었다.
“응. 아까 그 언니한테 그려 달라고 했는데, 이쁜 공주님 그려줬어.”
“어디 봐.”
상체를 쭉 빼고 스케치북을 본 세라의 얼굴에 놀라움으로 번졌다.
“아까 그 언니가 이걸 그려 줬다고?”
“응!”
세라는 아예 스케치북을 들어 그림을 살펴봤다. 도화와 꼭 닮은 캐릭터가 예쁜 공주님 그림. 언뜻 보면 대충 그린듯하지만 필압을 기가 막히게 조절하여 한 가지 색상으로 포인트를 준 그림. 그리고 세라는 이 그림체를 알고 있었다.
“도화야. 너 아까 그 언니 이름 알아?”
“아니? 모르는데.”
천진한 얼굴로 단호하게 대답하는 딸을 보며 세라는 짧게 탄식하며 스케치북을 돌려주었다.
“손 씻고 밥 먹을 준비해. 오늘은 카레야.”
“응. 엄마 당근 안 넣었지?”
도화가 애교부리며 물었지만, 세라는 단호했다.
“넣었어.”
도화의 칭얼거림을 흘려넘기며 세라는 생각에 잠겼다.
‘조만간 한국에 가야 할 것 같네.’
웬만하면 한국에 발을 디디지 않으려고 했지만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세라는 얼마 전 한국의 유명한 갤러리에서 온 메일을 떠올리며 음식을 마무리했다. * * * 새벽 5시. 알람이 울리지 않았는데 무혁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해조차 뜨지 않아 방 안은 사위가 컴컴했다. 무혁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막 잠에서 깬 사람답지 않게 눈동자는 또렷했다.
“으음.”
옆에서 느껴지는 뒤척임에 무혁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깊은 잠에 빠진 재희가 무혁 쪽으로 돌아누워 있었다. 무혁은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잘 보이는 재희의 뺨을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걷어주었다. 재희의 자는 얼굴에서 약간 지친 기색을 보자 무혁은 자신의 목덜미를 한번 쓸었다. 그리곤 이불을 끌어와 덮어주곤 조용히 방에서 빠져나왔다. 전날 재희가 미리 준비해둔 옷을 입고 마지막으로 잘 하지 않는 타이를 했다. 거울에 비친 무혁은 마치 딱딱한 석고상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커프스 단추를 채우고 드레스룸에서 나오던 무혁은 하품하며 부엌으로 향하던 도우미 아주머니와 딱 마주쳤다.
“에그머니.”
도우미 아주머니가 화들짝 놀라자 무혁이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직 아침 준비되려면 멀었는데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얼른 준비할게요.”
“아침은 괜찮습니다.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합니다. 뜨거운 걸로 주십시오.”
무혁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내온 커피를 마시며 일정을 체크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양가에 차례로 인사를 한 뒤 돌아온 신혼집에서 처음 맞는 아침. 꽤 피로했는지 재희는 일찍 잠들었다. 무혁은 재희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KM 건축사 사무소에 가기 전 무혁은 KJ 그룹 이사회 회의에 먼저 참석할 예정이었다. 강진 회장이 무혁을 소개하면서 후계자로 정식으로 소개하는 자리. 무혁은 다 마신 잔을 내려놓고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대기하던 윤 비서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 차는 미리 대기시켜두었습니다.”
무혁이 KM 건축사 사무소를 개업할 때부터 항상 같이하던 윤 비서는 KJ 그룹의 사람이었다. 무혁은 타이를 고쳐 매며 윤 비서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