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몽마르트르 언덕2022.01.20.
무슨 대화를 나누다가 그 주제가 나왔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느덧 책장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린 그 겨울날.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그런 일상.
“몽마르트르 언덕이요?”
“그래.”
“들어본 적은 있어요. 예술가들의 거리라고요. ”
비밀 친구의 말에 재희는 책장에 등을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사진으로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가고 싶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품은 장소. 재희는 문득 궁금해졌다. 비밀 친구는 과연 가봤을까.
“강혁 씨는 자주 가봤어요?”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알게 된 건 고작 이름뿐. 나이도, 얼굴도 모르는 비밀 친구. 비밀 친구는 재희에게 딱 거기까지만 허락했다. 연상인지 연하인지 모르기 때문에 어린 재희는 어색하게 강혁 씨라고 불렀다.
“자주 갔었어.”
“거긴 좋아요?”
“그래.”
“저도 언젠가 가봤으면 좋겠어요.”
재희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비밀 친구가 그렇게 말하니 꼭 가보고 싶어졌다. 다만,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었다. 성인이 되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갑갑한 집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리고.
‘할머니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럼 비밀 친구가 말한 그 몽마르트르에 갈 수는 있을까. 불확실한 미래. 어쩌면 계속 할머니의 말에 휘둘리며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어린 재희는 혹시 하는 가정조차 세우지 않았고 희망을 품지 않았다.
“갈 수 있어.”
비밀 친구는 말수가 많지 않았다. 꼭 필요한 말만 하는 비밀 친구. 하지만 대신 비밀 친구는 빈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은 모두 하나하나 진심이었고 거짓은 없었다. 그가 말하면 이상하게도 꼭 그렇게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응. 꼭 가볼게요.”
비밀 친구의 그 한마디에 재희는 몽마르트르에 꼭 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처음으로 가슴에 품었다. 어린 재희는 혼자서 비밀 친구와 마음속으로 약속을 했다. 꼭 몽마르트르에 가겠다고. 그래서 언젠가 당신과 이 기쁨을 나누겠다고. 그리고 지금,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향하는 계단에 한 걸음 올라섰다. 몽마르트르에 꼭 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현실로 이루고, 비밀 친구에게 한 혼자만의 약속을 몇 년 만에 지켜냈다. 비록 비밀 친구와 기쁨을 나눌 수 없게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무혁의 손에 힘이 풀리자 재희가 한 걸음 더 올라섰다.
“다행이에요.”
재희가 슬쩍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비밀 친구와의 약속을 무혁 씨와 함께 있을 때 지킬 수 있게 되어서.”
소중한 비밀 친구와의 약속을 누구보다 소중한 남자와 함께 있을 때 지켰다. 이 벅찬 기분을 소중한 남자와 함께 공유하고 있다. 재희에게 몽마르트르의 계단은 더욱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날로 기억될 것 같았다. 재희가 다시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
무혁은 재희의 뒷모습을 깊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지겹게 봤고 새로울 것이 없는 몽마르트르로 올라가는 계단. 2월의 찬바람에 아내의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더 이상 특별할 것도 없는 이 끝없는 계단이, 계단 주위의 풍경이, 이 몽마르트르가 특별하게 보였다. 다름 아닌, 나의 아내로 인해. 지켜 주고 싶다. 지금 재희가 느끼고 있을 행복감을. 저 웃음을. 무혁은 주먹을 가만히 쥐었다 폈다. 무혁은 계단에 한 걸음 더 올라섰다. 이젠 특별해진 이 계단을 무혁은 재희를 따라 올랐다.
* * *
“와.”
샤크레쾨드 성당을 보고 나온 뒤 몽마르트르에서 바라보는 파리 전경에 재희는 감탄을 터뜨렸다. 올라오면서 봤던 풍경들도 모두 아름다웠지만, 언덕에서 보는 파리 전경은 막힘이 없어 절로 가슴이 탁 트일 정도로 시원하고 아름다웠다. 비밀 친구가 꼭 가보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음에 듭니까.”
“네. 아주.”
재희는 눈 깜박이는 것도 잊고 넋을 놓고 풍경을 바라보았다. 무혁은 그런 재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혼여행 와서 재희의 몰랐던 점을 참 많이 본다고 생각했다. 노을 서점에서부터도 그랬지만, 맞선을 보고 결혼할 때까지 몇 번 보지 못한 웃음을, 생동감 넘치는 감정을 재희는 이곳에서 많이 보여주었다.
“아름답네요.”
재희가 푹 빠진 눈으로 파리의 전경을 바라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네. 아름답군요.”
무혁도 재희를 보며 대답했다.
“저기 봐요. 구름이 잔뜩 낀 게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그래도 이렇게 예쁜 걸 보면 파리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 같…….”
재희가 웃으며 고개 돌리다가 말끝을 흐렸다. 언제나 진중하고 무거운 눈동자였지만 오늘따라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유독 짙었다. 눈이 마주쳤음에도 무혁은 당황하거나 놀란 기색조차 없었다. 그제야 재희는 무혁이 이미 한참이나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희가 볼을 붉히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풍경을 봐요. 모처럼인데 아깝잖아요.”
“충분히 보고 있습니다.”
“무혁 씨.”
“파리 전경과 재희 씨는 잘 어울립니다. 아름답습니다.”
직구로 들어오는 그의 말에 재희는 벌어지려는 입술을 꾹 닫았다. Rrrr Rrrr 직진이다 못해 솔직한 그의 말에 뭐라 대답도 못 하고 있을 때, 가방에 넣은 휴대 전화가 울렸다. 민망한 기분을 절묘하게 끊어준 전화가 반가워 재희는 얼른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아.’
발신인을 확인한 재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할머니] 휴대 전화를 보며 망설이던 재희가 무혁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전화 좀 받을게요.”
무혁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재희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잡은 재희가 용기 내어 전화를 받았다.
“네. 할머니. 안녕하셨어요?”
-너는 기어이 내가 전화하게 만드는구나. 못 배운 티를 내지 말라고 그렇게 누누이 말했는데.
안부 대신 평소처럼 구박부터 하는 할머니다.
“죄송해요. 조금 정신없었어요.”
-정신없기는. 잊고 있었던 거겠지.
“…….”
-내 항상 불안하다. 우리 사위에게 뭐 하나 실수할까 봐. 어리석은 네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있어야지.
탁 트였던 가슴이 다시 응어리가 지는 것처럼 묵직하다. 재희는 버릇처럼 명치 부근을 손으로 꾹 눌렀다.
‘답답해.’
습관처럼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할머니의 말을 묵묵히 듣던 재희의 손에서 휴대 전화가 쑥 빠져나갔다. 재희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휴대 전화를 뺏어 든 무혁이 묵묵히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곤 휴대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언제 집에 다시 들르거라. 내 다시 너를 가르쳐야겠다.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순간 휴대 전화 너머 할머니가 침묵했다. 무혁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을 한 재희를 빤히 응시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손녀를 걱정하시는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이구.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하네. 그런 의미가 아닐세.
단번에 태도를 바꾼 할머니가 재혁에게 하듯 살살 달래는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무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만 끊겠습니다. 돌아가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무혁은 냉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재희를 묵묵히 보며 무혁이 대수롭지 않게 휴대 전화를 넘겼다.
“받기 싫은 전화는 끊으십시오.”
“…….”
“아무도 재희 씨를 탓하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할머니에게선 더 이상 전화는 오지 않았다. 아마 무혁이 옆에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일 거다. 무혁이 대신 전화를 끊어 주긴 했지만, 내심 속이 다 시원했다. 자신은 절대 하지 못하는 행동을 무혁은 태연하게 했다. 그게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대리 만족을 느꼈다. 재희는 알고 있었다. 무혁은 괜찮다고 하였으나 자신은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애초에 무혁과 자신은 위치가 달랐다. 무혁에 쉬운 일은 재희에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네. 다음에 그렇게 할게요.”
재희는 휴대 전화를 가방에 넣으며 웃어 보였다.
* * * 하루는 통째로 몽마르트르에 보내기로 무혁과 약속했었다. 느긋하게 거리를 구경하고, 식사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다시 올라온 언덕. 무혁과 함께 아무렇게나 계단에 앉아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이렇게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만이더라. 재희는 곰곰이 생각했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
문득 재희는 어깨 위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에 돌아봤다. 무혁이 자신의 코트를 벗어 재희의 어깨에 덮어주며 말했다.
“프랑스가 한국에 비해서 기온이 따뜻해도 겨울은 겨울입니다. 감기 걸립니다.”
“하지만 무혁 씨도 춥잖아요.”
“괜찮습니다. 잠시 통화를 하고 올 테니 여기 계십시오.”
“……일 관련이에요?”
무혁이 부정하지 않자 재희가 가볍게 고개 끄덕였다.
“네. 여기 있을게요.”
쉼 없이 재희를 돌아보면서도 조금 떨어진 곳으로 무혁이 가버리자, 재희는 섭섭한 마음을 눌렀다.
‘옆에서 통화해도 되는데.’
옆에서 통화하기 어려운 내용일까. 내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일까.
‘하긴. 부부라고 다 공유하는 건 아니니까. 더군다나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걸. 무혁 씨도 나에 대해 모르는 게 많으니까.’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재희는 다시 풍경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자 재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몇 계단 아래에 양 갈래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스케치북을 끌어안은 채 눈을 반짝이며 재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니. 공주님이야?”
“응?”
여자아이는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려 계단을 폴짝폴짝 뛰어 올라왔다.
“언니 이쁘다. 꼭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님 머리 같아.”
아이는 스케치북을 내려놓고 아예 길게 늘어뜨린 재희의 머리카락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낯선 땅에서 낯선 아이가 한국말을 하며 머리카락을 만지니 재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잠시 혼란이 왔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이 부모로 보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길을 잃었니? 엄마는?”
“언니. 공주님 잘 그려?”
여자아이는 재희의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응? 언니야. 공주님 잘 그려? 언니는 공주님 같으니까 공주님 잘 그릴 것 같아. 그렇지?”
여자아이는 아예 스케치북을 내밀며 눈을 반짝였다. 어린아이를 대해본 적이 별로 없어 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재희가 머뭇거리는 사이
“언니. 공주님 못 그려? 왜 못 그려? 공주님 아니야?”
여자아이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아이의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었던 재희는 결국 스케치북을 받아들었다.
“아니야. 언니, 공주님 잘 그려.”
“정말? 그럼 그려 줘. 공주님!”
아이가 목에 걸려 있던 캐릭터 가방에서 색연필 하나를 꺼내 재희에게 주었다. 재희가 마지못해 색연필을 받아 들자 여자아이는 아예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재희는 구김살 없고 낯가림 없는 여자아이가 귀여워서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어떤 공주님을 그려줄까?”
“머리는 언니처럼 길고 예쁘고, 또오 우리 엄마처럼 예쁘고 나처럼 예쁜 공주님!”
한마디로 예쁜 공주님을 그려 달라는 아이의 거창한 주문에 재희는 웃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름은 뭐야?”
“도화. 장도화. 엄마가 꿈에서 복숭아꽃 보고 나서 날 가졌댔어. 그래서 도화라고 지어 줬다고 했어.”
“몇 살이야?”
“7살.”
또랑또랑 말을 잘하는 도화를 보며 재희는 웃으며 빈 스케치북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스케치북이 그림으로 채워져 갈수록 도화의 크고 동그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재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도화에게 엄마에 관해 물었다.
“도화의 엄마는 어디 있어?”
“엄마? 엄마는 내가 사라진 줄도 모를 거야.”
아예 재희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워 버린 도화가 태연하게 말했다. 순간 당황한 재희가 손을 멈추고 내려다보자 도화가 얼른 그려달라며 칭얼대기 시작했다.
“아니야. 도화의 엄마는 분명히 도화를 아주 많이 걱정하실 거야.”
“엄마는 한번 일에 빠지면 도화를 안 돌아봐. 오늘도 엄마랑 같이 나왔는데 엄마는 저기 아래에서 그림 그리느라 나 같은 거 신경 안 쓰는걸.”
도화가 묻지도 않은 말을 재잘재잘 말하며 손이 멈춘 재희를 채근했다.
“언니. 공주님 그림이 멈췄잖아. 빨리 그려 줘.”
이 아이를 어떻게 할까 난감해하던 찰나 두 사람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아이는 누구입니까.”
그림자의 주인, 통화를 마치고 온 무혁이 재희와 도화를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혁을 올려다본 도화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