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회피2022.01.10.
비가 오는 날은 낡은 책의 묵은내와 나무 향이 유독 진했다. 7살의 재희는 비보다는 눈을 좋아했지만, 15살의 재희는 눈보다는 비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노을 서점과 얼굴 모르는 비밀 친구와 처음 만난 날도 겨울비가 내리던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기와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던 재희는 힐끗, 책장 사이로 툭 튀어나온 커다란 손에 시선을 두었다.
“저기…… 인제 그만 얼굴 보여도 되지 않아요?”
궁금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질문. [강혁]이라는 이름만 알 뿐, 얼굴도 모르는 비밀 친구. 얼굴을 몰라도 충분하다 생각했지만 가끔 재희는 궁금했다. 따뜻한 성격만큼이나 자상한 얼굴일까. 아니면 그 목소리처럼 무뚝뚝한 얼굴일까. 내 소중한 비밀 친구는 어떻게 생겼을까.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또 그려봤던 비밀 친구. 비가 내리는 서점의 공기만큼이나 묵직한 목소리가 책장 너머에서 들려왔다.
“왜?”
고저 없는 목소리에 재희는 소심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얼굴 보고 대화하고 싶어서요.”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무리한 부탁을 한 걸까. 살짝 초조해진 재희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안 돼.”
비밀 친구는 단칼에 거절했다. 민망해진 재희가 그러시구나……. 작게 중얼거렸다.
“난 이 정도가 딱 좋다고 생각하는데…… 재희의 생각은 다른가.”
다르다고. 난 당신의 얼굴이 몹시 궁금하고 시선을 마주치며 대화를 나누고 싶고, 가끔 얼굴을 마주 보며 간식을 먹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재희는 제가 원하는 것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감히 분수도 모르고 욕심을 낸 대가로 비밀 친구를 잃을까 두려웠다. 재희가 내놓을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도 이 정도가 딱 좋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을 끝맺은 재희는 쓰게 웃으며 책장에 가만히 등을 기댔다. 대화가 끊긴 서점 안은 금세 빗소리로 잔잔하게 채워졌다. 재희는 책장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커다란 손을 응시했다.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문득 그 손을 잡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한참을 망설이던 재희는 용기를 내 튀어나온 그의 손가락 끝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끝을 올렸다. 커다란 손이 미세하게 움찔, 거리는 게 느껴졌다. 재희의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뿌리칠까? 아니면 내 손을 잡아주려나. 비밀 친구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러나 비밀 친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렵게 긁어모은 용기는 금세 빗소리와 함께 흔적도 없이 녹아들었다. 어렵게 닿은 손끝을 떼려는 순간,
“……!”
손 전체를 감싸는 온기에 재희가 깜짝 놀라 시선을 내렸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소중하게 약간 거친 듯한 그 커다란 손이 재희의 작은 손을 감싸듯 조심스럽게 쥐고 있었다. 재희는 커다란 손이 전해주는 온기에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민망함과 서운한 감정은 어느새 뒤로 밀려나고 편안함이 몰려왔다. 겨울 빗소리가 따뜻한, 그런 어느 날이었다. * * * 재희는 눈을 떴다. 잠이 내려앉은 시야는 흐릿했다. 잠을 쫓아내고자 몇 번 눈을 깜박였다. 뿌옇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넓은 어깨와 굵직한 목이었다.
‘아.’
흠칫 놀란 재희가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려고 했지만, 온몸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재희는 남자의 커다란 몸에 삼켜지듯 안겨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재희는 조심스럽게 남자의 팔을 풀어내려 했다.
“……!”
그러자 남자의 커다란 몸이 한번 뒤척이더니 오히려 더 꽉 끌어안는다.
‘틀렸어.’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 번 시도하던 재희는 결국 얕은 한숨을 흘리며 포기하고 말았다. 남자의 단단한 팔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재희는 고개를 살짝 들어 잠든 무혁을 올려다보았다.
‘밤새 안고 있었을까.’
어제 결혼을 했고 어제부로 남편이 된 강무혁.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게 부끄럽고 어색했지만, 한편으로는 넓은 이 품이 안심이 될 정도로 따뜻하고 듬직했다. 몸을 누르는 묵직한 무게감이 기분이 좋았다.
‘자는 모습은 깨어 있는 모습과 정반대구나.’
재희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남자의 어깨에서부터 목, 그리고 턱으로 더듬으며 올라갔다. 항상 봐온 덤덤한 표정이 아닌 드물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자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남자의 눈가는 거뭇해도 피곤에 찌들어 있는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눈가가 거뭇한 게 이 남자만의 매력으로 보일 정도였다. 재희는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남자의 눈가를 쓸어보았다. 거친 외모와 다르게 피부는 부드러웠고 품은 크고 따뜻했다.
‘강무혁.’
재희는 조심스럽게 남편의 이름을 속으로 읊조렸다. 아직은 낯선 남편의 이름. 어쩐지 부끄러워진 재희는 최대한 무혁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 통유리창에 빗방울이 점점이 번져나가는 걸 발견했다.
“일기예보에서는 비 온다는 소리 없었는데.”
기분 탓일까. 어쩐지 침실에 비 냄새가 그윽하게 퍼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때 그 꿈을 꾼 걸까.’
입시에 쫓기랴, 대학 생활을 해내랴, 취업하랴, 그렇게 바쁘게 살다 보니 비밀 친구와 연락이 끊긴 지 몇 년. 서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름 모를 사람에게 팔린 노을 서점. 그 후로 노을 서점은 여전히 건재하게 그 자리에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문을 열지 않았다. 노을 서점이 문을 닫고 나서 비밀 친구와의 유일한 접점마저 끊겨 버렸다. 그동안 찾으려 해도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서 찾을 수 없었던 비밀 친구. 비밀 친구는 서점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조차 보지 못했다.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헤어져서일까. 가끔, 아니 자주 비밀 친구가 생각났다.
“그래도 비밀 친구 꿈까지 꾼 적은 없었는데.”
그런데 왜 하필 무혁과 있을 때 그때 그 꿈을 꾼 걸까.
‘아.’
꿈의 여운에 잠겨 있던 재희는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무혁이 낮은 숨을 흘리며 재희의 몸을 깊숙하게 끌어안은 탓이었다. 아까보다 더 밀착한 상태가 되자 재희의 얼굴이 타오를 듯 붉어졌다.
“무혁 씨? 이 팔 좀.”
재희가 조심스럽게 불렀으나 남자는 도무지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자의 묵직한 체취가 강하게 맡아졌다. 향수일까, 아니면 이 남자의 체취일까. 간밤에 그에게 안길 때 몇 번이나 맡고 또 맡았던 거친 남자의 우디향의 체취.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왠지 기분이 이상해진 재희는 꼼지락거리며 무혁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단단한 품은 재희를 놔주지 않았다. 결국, 재희는 그에게서 벗어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밤새 몇 번이나 무혁에게 시달린 데다 몇 시간 자지 못해서 아직 온몸이 뻐근하고 노곤했다. 밀려오는 피로를 이기지 못한 재희는 다시 잠들고 말았다. * * * 재희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자 무혁은 눈을 떴다. 마치 처음부터 깨어 있었던 것처럼 그의 눈동자에는 잠기운이라곤 단 한 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혁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밤을 새우는 건 무혁에겐 익숙한 일이기에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무혁은 불안했다. 밤새도록 제 품에서 잠든 재희가 사라질까, 몇 번이나 무혁은 확인하고 또 확인했었다. 안고 있는 그 순간마저도 꿈일까 싶어 초조하게 만든 유일한 여자. 지금도 품 안에 있는 게 거짓말 같아서 믿기지 않았다. 피부 위로 스친 재희의 손길이 진한 여운으로 남았다. 더불어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린 말도 여전히 귓가에 맴돌며 속살거린다. 무혁은 나지막하게 만족스러운 한숨을 흘렸다.
‘기억하고 있었어.’
그러나 무혁은 재희에게 과거를 밝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재희가 노을 서점에서의 추억을 잊어버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잊어버렸으면 했다. 그러나 재희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못내 씁쓸하면서도 기뻤다. 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과거의 자신이 그녀의 삶에 조금이라도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로 무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가늘고 여린 몸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무혁은 재희의 머리에 입 맞췄다. 무혁은 재희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새벽 비가 내리는 새벽. 이 작은 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무혁은 이전과 다른 새벽을 맞이했다. 바쁘게 하루를 시작할 준비가 아닌 편안한 그런 새벽을.
* * * 부슬부슬 내리던 새벽 비가 그쳤다.
“……음.”
몇 번 자리를 뒤척이던 재희는 문득 허전함을 느끼고 눈을 떴다. 다시 잠들기 전까지 분명히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남자가 없었다. 잠시 손으로 온기가 사라진 빈자리를 더듬던 재희가 이불을 끌어당기며 몸을 일으켰다.
“무혁 씨?”
“일어났습니까.”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재희는 그대로 굳었다. 막 씻고 나온 건지 무혁은 젖은 머리를 하고 샤워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문제 아니었다. 새벽에 그의 품에 안겨 관찰을 했지만, 그땐 밀착되어 있었고 무혁의 어깨와 얼굴을 본 게 다였다. 게다가 그와 첫날밤을 보낼 땐 불이 꺼져 있어서 그의 몸을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야 가득 들어온 그의 몸에 재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막 씻고 나온 그의 커다란 몸 때문에 샤워 가운이 넓게 벌어져 탄탄한 그의 가슴이 필요 이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미처 닦지 못한 물기가 남자의 조각조각 갈라진 근육을 타고 흘러내렸다.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이 보기 좋게 갈라져 하체까지 이어진 남자의 적나라한 몸은 재희에겐 머리가 얼얼할 정도로 큰 충격이었고 자극적이었다. 크고 넓은 품과 체온, 몸 곳곳을 훑고 입 맞췄던 뜨거운 숨결과 남자의 체취……. 간밤에 저를 몰아붙였던 남자의 움직임과 살짝 갈라진 저음의 목소리가 떠오르며 온몸에 열이 올랐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던 재희는 결국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
다가오던 무혁의 발걸음이 멈춤과 동시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무혁의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까 걱정할 겨를도 없었다. 가운 사이로 보이던 무혁의 몸이, 특히 복근 위로 튀어나온 핏줄과 그 아래 치골이 눈앞에 아른거려 어지러울 정도였다.
‘옷 좀 제대로 입었으면.’
결국, 재희는 눈을 꾹 감으며 이불을 꼭 그러쥐었다. 다시 무혁을 보기엔 그의 차림새가 너무 부끄러웠고 신경이 쓰였다. 어색하게 깔린 침묵에 재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무혁이었다.
“곧 체크아웃 해야 하니 준비하십시오. 비행기 시간 늦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무혁의 기척이 멀어졌다.
“하.”
그제야 재희는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이불을 내렸다. 몇 번 무혁을 향해 이런 두근거림을 느낀 적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 확연히 다른 두근거림. 그땐 콩닥콩닥 잔 가슴이 떨리는 감정이었다면, 지금은 누군가가 세차게 심장을 두들긴 것처럼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아픈 두근거림이었다. * * * 욕심내지 않는 것에 익숙한 재희는 신혼여행을 떠나는 짐은 24인치 캐리어 하나뿐이었다. 재희는 캐리어를 들고 방에서 나오자마자 거실에 서 있던 무혁을 발견하곤 걸음이 멈췄다. 무혁은 당장이라도 회의를 나갈 사람처럼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 부근에 팽팽하게 당겨진 셔츠가 재희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침의 무혁의 모습이 겹쳐지며 재희의 시선이 가늘게 떨렸다. 슈트 아래로 무혁의 핏줄이 툭툭 튀어나온 근육 진 몸이 보이는 듯했다.
“가요. 늦겠어요.”
결국 재희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재희가 서둘러 캐리어를 끌고 나가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손잡이를 잡은 재희의 손에 닿았다.
“……!”
재희가 화들짝 놀라며 그 손을 뿌리쳤다. 캐리어를 들어주려 했던 무혁이 뿌리쳐진 손과 재희를 묵직한 시선으로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게…….”
재희가 당황한 얼굴로 뭐라고 변명을 하려는데 무혁이 재희의 캐리어를 들며 짧게 말했다.
“늦겠습니다.”
무혁이 먼저 객실 밖으로 나가자 머뭇거리던 재희가 서둘러 그 뒤를 따라갔다. 그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닿았던 제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 * *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로비에 내려왔을 땐 윤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윤 비서가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간밤에 편히 주무셨습니까.”
윤 비서가 적당한 톤의 목소리로 사무적으로 말했다.
“공항까지 모시게 된 윤재식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윤 비서라고 불러 주십시오.”
무혁의 비서여서일까. 재희는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게 무혁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윤 비서가 정중히 뒷좌석 문을 열어주자 재희는 망설이다가 차에 탔다. 이런 대접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차 내부는 넓고 깔끔했다.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에는 선팅된 칸막이 유리가 설치되어 있어서 공간을 완벽하게 분리해 놓았다. 재희는 무혁에게서 의식적으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무혁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릴 때 재희 앞으로 접시가 내밀어졌다. 접시에는 샌드위치가 놓여 있었다. 재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샌드위치를 보다 그 접시를 들고 있는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건…….”
그 손의 끝에는 무혁이 있었다.
“이른 아침 출발이다 보니 출출할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하라고 지시해 둔 겁니다. 가는 동안 잠깐의 요기 정도는 될 겁니다.”
“…고마워요.”
샌드위치를 받아든 재희는 무혁에게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하며 한 입 베어 물었다. 재희는 옆에 앉은 무혁 때문에 샌드위치 맛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의무적으로 먹는 사람처럼 최대한 무혁에게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하며 꼭꼭 씹어 삼킬 뿐이었다.
“…….”
무혁은 창틀에 팔을 올리고 기대며 그런 재희를 지켜보았다. 재희는 마치 무혁을 피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그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런 재희를 보는 무혁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으며, 턱을 괸 주먹 쥔 그의 손등에 힘줄이 돋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