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첫날밤2022.01.06.
전 남자친구는 재희와 같은 대학을 다녔다. 끝이 안 좋았더라도 과는 달랐지만, 같은 대학을 다닌 만큼 우연히라도 한 번쯤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충분히 각오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만남은 아니었다. 다행히 박정수가 예식홀에서 허겁지겁 나간 뒤 마주치지 않았다. 박정수가 자신을 피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사진 촬영할 때 화난 표정을 한 희수를 보니 박정수는 계속 예식홀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좋은 날이라 희수는 굳이 재희에게 박정수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일말의 애정 따위 없으나, 박정수가 자신을 두고 친구와 나눴던 질 낮은 대화는 보기 싫은 흉터처럼 남아있었다.
‘생각하지 말자.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그렇게 다짐을 하고 있을 때.
“재희 씨.”
진중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재희가 돌아봤다. 무혁이 담담한 표정으로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혼란한 제 마음을 감추려는 듯 재희가 눈을 몇 번 깜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재희가 완전히 몸을 돌리자 무혁이 한 발짝 다가왔다. 재희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순간 어릴 적에 할머니가 손을 올린 기억이 떠오르며 재희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등에 차갑고 딱딱한 유리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 나도 모르게.’
무혁의 걸음이 뚝 멈추자 재희가 아차, 했다. 피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기분 상했을 거야.’
결혼 첫날부터 신랑을 피하는 신부라니. 무혁의 미간이 좁혀지자 재희는 차마 마주할 수 없어 시선을 내렸다. 무혁이 화를 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재희는 그의 화를 받을 준비를 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입니다. 피곤합니까?”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말은 재희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실망도, 화도 담기지 않은 평소와 똑같은 덤덤한 목소리. 재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눈을 깜박였다. 재희는 무혁과 마주 보며 저도 모르게 입버릇처럼 해 왔던 말로 대답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예식장에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채 끝말이 흩어지기도 전에 무혁이 딱딱하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찔리는 것도 없는데 재희는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아마 케이크 커팅식 때 박정수와 마주친 그때를 물어본 것 일터였다.
‘무혁 씨가 보기에도 이상했겠지.’
박정수는 재희의 일방적인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끈질기게 쫓아다녔다. 재희가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자 박정수는 뒤에서 재희 욕을 하고 다녔다.
‘그때의 앙금이 쌓여서 온 걸까.’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그 앙금이 있었다면 저를 보자마자 도망치듯 예식홀에서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내 소식을 듣고 일부러 온 게 아닐까. 온갖 생각이 머리 속을 휘저었다.
“무혁 씨.”
“네.”
“…….”
재희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무혁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혹시 박정수와 친구냐고. 친구라면 얼마나 친하냐고. 혹시 박정수에게서 나에 대해 들은 적 있냐고. 묻고 싶은 건 많았다. 한편으론 묻고 싶지 않았다. 오늘 결혼을 했고, 남편이 된 그와 처음으로 한방을 쓰는 날이었다. 그런 날에 무혁과 자신 사이에 전 남자친구 이야기 따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시간은 많고 나중에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아니, 평생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상반된 갈등에 고민하며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재희는 이내 꾹 다물었다.
“아무 일도 없어요.”
“정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재희는 볼을 감싸는 커다란 손에 화들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재희의 볼을 감싼 무혁이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덤덤한 시선이지만 그 눈동자에 일렁이는 뜨거운 감정과 그 속에 언뜻 비치는 알 수 없는 갈증을 읽은 재희가 뻣뻣하게 굳었다. 무혁의 상체가 천천히 내려왔다. 이윽고 입술이 살짝 부딪칠 정도의 거리를 두고 무혁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사랑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숨결은 그의 고백만큼이나 담담하고 뜨거웠고…… 설레었다. 재희는 그 고백에 눈을 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혁의 키스는 참 이상했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시작했다가도 이내 거칠어졌다가 뜨거워졌다. 그리고 숨이 모자라 어지러워질 때쯤엔 눅진한 입맞춤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훑듯이 시작된 키스는 점점 뜨거워졌다. 숨결과 숨결이 오갔다. 누구의 숨결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숨결은 뜨거웠다. 재희는 유리창과 무혁의 사이에 갇힌 채 그의 키스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등에는 창문의 차가운 공기가 훑고 가슴엔 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퍼진다. 묵직한 남자의 무게가 기분 좋게 몸을 눌렀다.
“하아.”
숨을 틔우기 위해 재희가 입술을 떨어뜨렸다. 흐릿한 시선을 올리자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무혁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재희는 키스할 때보다 더 숨이 막혀왔다. 덤덤하고 감정을 읽기 어려운 이 남자의 감정이 선명하게 읽혔기 때문이었다. 갈증 뜨거움 욕망 욕심 맞선을 봤을 때와 다른 격렬한 감정. 밀도 높은 남자의 감정에 재희는 저도 모르게 커다란 짐승을 달래듯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무혁의 커다란 몸이 잠시 굳었다. 이내 무혁은 강한 팔로 재희의 가벼운 몸을 번쩍 들어 올리며 격하게 키스했다. 털썩. 재희의 몸이 푹신한 침대에 눕혀졌다. 무혁은 한 손은 재희 머리 옆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론 갑갑한 단추를 뜯어내듯 풀었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 햇빛에 그을린 피부가 보였다. 하얀색 옷과 대비되는 그 피부를 문득 만져 보고 싶어졌다. 재희가 손을 올려 쇄골 부분을 훑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있습니까.”
머리 위에서 사납게 울리는 목소리에 가만히 무혁를 쓰다듬던 재희가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제 몸을 다 가리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이 남자가 거친 한숨을 흘리며 뜨거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 그저.”
퍼뜩 정신을 차린 재희가 민망한 듯 손을 거두려 하자 무혁이 그 손을 덥석 잡았다.
“늦었습니다.”
무혁이 재희 손을 제 가슴에 올렸다. 놀란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단한 가슴 너머로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빠른 심장 박동.
‘이 남자도 지금 나만큼이나 떨리는 걸까.’
겉보기엔 그럴 것 같지 않았지만, 이 남자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심장 박동을 통해 확실하게 전해져 왔다. 재희가 천천히 어루만지듯 쓸어 주자 무혁의 가슴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남자의 몸이 이렇게 멋질 수도 있구나. 자신과 다른 단단하고 뜨거운 남자의 육체가 신기했고 매력적이었다. 옷깃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잘 짜여진 근육이 그 어느 조각상보다 멋졌다.
“무혁 씨. 심장이 빠르게 뛰어요.”
재희가 소곤거리며 말했다. 이를 악문 듯 무혁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심장이 빨리 뛰어요.”
처음 보는 무혁의 흔들리는 모습이 신기해서 수줍게 웃으며 뱉은 말이 불씨였다. 갑자기 재희의 시야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무혁이 재희를 격하게 끌어안으며 목덜미를 덥석 물었다. 화들짝 놀란 재희가 작게 발버둥쳤다. 무혁은 그런 작은 움직임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쉴새 없이 그녀를 탐했다. 재희는 커다란 짐승에게 통째로 잡아먹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대할 땐 항상 정중했던 남자였다. 격한 그의 반응에 재희는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남자의 조심스러운 손길에 안심도 되었다. 남자의 손길에 블라우스의 단추가 풀리며 감춰진 피부에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재희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재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던 무혁이 고개를 들었다. 뜨거운 열기가 일렁이는 남자의 시선에 재희는 마치 사슬에 얽매여진 기분이 들었다.
“지금 밀어내십시오.”
“네?”
재희가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녀의 의사를 묻는 것치곤 무혁은 재희를 꼭 끌어안은 채 놓지 않았다.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무슨 의미예요?”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지만 지금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지금 내가 참을 수 있을 때 거부하고 싶다면 거부하십시오.”
“무혁 씨.”
“안 그러면 중간에 멈출 생각 따위 없으니까.”
항상 바라왔던 일이기도 했다. 재희와 하나가 되는 날을. 그래서일까. 재희의 말 한마디, 작은 손길 하나에 불을 붙인 듯 몸이 뜨겁게 반응했다. 무혁은 지금도 이성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정식으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 건 맞선 때가 처음이다. 아직 자신을 어색해하는 재희와 천천히 가까워져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무혁의 생각은 재희가 몇 번 쓰다듬어 주자 철저하게 무너졌다. 겨우 가라앉혔다고 생각한 갈증이 일면서 재희 손길 몇 번에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조금만 더 잡아당기면 아슬아슬 팽팽하게 당겨진 이성이 끊어질 것 같았다. 재희는 제 허락을 구하는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거친 남성미를 물씬 풍기는 남자가 제 허락을 구하는 모습이 생소했다. 재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무혁의 팔을 잡았다. 남자의 단단한 팔근육의 움직임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안 멈춰도 돼요.”
“…….”
“무혁 씨니까. 괜찮아요.”
재희의 말에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이 가볍게 끊어졌다. 삼키듯 남자의 몸이 여자를 끌어안았다. 한강 위로 밤이 내려앉았다. 겨울의 긴 밤이 시작되었고 오늘 갓 결혼한 남자와 여자의 밤 역시 길어졌다.
* * * 한남동의 클럽 앞. 한 남자가 한숨을 쉬다가도 머리 아픈 듯 머리카락을 헤집는 등 초조한 얼굴로 클럽 입구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에이씨. 진짜.”
예식이 끝난 뒤 차마 사진 촬영하러 들어가지 못하고 홀에서 서성이다 만난 희수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야. 박정수. 너 내가 그때 뭐라고 그랬어? 두 번 다시 나나 재희 앞에 나타나면 죽여 버린다고 했지. 오늘이 좋은 날인 걸 다행으로 여겨. 안 그랬으면 이미 네 벗겨지기 시작한 그 머리 몽땅 다 내가 뽑아 버렸을 거니까.”
저보다 어린 희수에게 한마디도 그 자리에서 반박하지 못한 게 더 분한지 박정수가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박정수가 얼굴을 잔뜩 구기며 발로 돌멩이를 걷어찼다. 재희와 헤어진 게 몇 년 전 일인데도 희수는 박정수에게 앙금이 남아 있는 듯했다. 더군다나 재희와 자신 둘 사이의 일인데 왜 희수가 화를 내는지 박정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뭐 하냐.”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박정수가 표정을 싹 바꾸며 돌아봤다.
“어. 민석아.”
민석이 비스듬하게 서서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신랑 없는 뒤풀이 중인데 너 혼자 왜 여기 나와 있어.”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인지 적응이 잘 안 되네. 담배나 한 대 피울까 했거든. 그나저나 나 물어볼 거 있는데.”
“뭔데?”
“그, 무혁이 신부 말이야. 둘이 어떻게 만난 거야?”
생수병을 뜯어 물을 마시던 민석의 행동이 멈췄다. 민석이 들고 있던 생수병을 내리며 박정수를 돌아봤다.
“그건 왜 물어.”
“결혼에 관심 없는 무혁이 갑자기 결혼한다고 하니까 친구로서 궁금해서 그렇지.”
의중을 살피듯 자신을 훑는 민석에게 박정수는 최대한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민석의 눈이 가느스름해졌지만 이내 민석은 생수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말했다.
“선을 보고 만났다고 그러던데.”
“선?”
“그래.”
선. 박정수가 그 단어를 한참이나 되뇌는 모습을 지켜보던 민석이 경고하듯 말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쓸데없는 짓은 무슨. 내가 무혁의 신부랑 만날 일이 뭐가 있다고.”
박정수는 태연하게 웃어 보였지만 그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