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구매로.2021.12.27.
재희는 떨리는 시선을 가만히 내렸다. 이것도 별로인가. 주제에 맞지 않는 드레스를 골랐다고, 무언으로 구박하는 걸까. 아니 그 전에 이 웨딩숍을 고른 거 자체가 잘못일까.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재희가 시선을 내렸다.
“이것도 별로면 그냥…….”
“마음에 듭니까?”
드레스 몇 벌을 입어도 똑같이 돌아오는 물음. 당연히 마음에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드레스를 입고 예식을 올리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그럴 수 없어서 서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재희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묵직한 무게에 눌렸던 소파 가죽이 다시 펴지는 작은 마찰음과 함께 무혁의 커다란 몸이 일으켜졌다. 성큼 앞으로 다가온 무혁의 시선이 잠시 재희에게 머물렀다. 진득한 시선에 재희가 슬쩍 고개를 들 무렵, 무혁이 숍 매니저를 보며 말했다.
“이걸로.”
“네? 무혁 씨, 잠깐만요.”
재희가 급하게 팔을 뻗어 무혁의 소매를 잡았다가 흠칫, 떨며 손을 떼어냈다. 손이 떨어지자마자 못마땅함으로 무혁의 미간이 좁혀졌지만, 재희는 눈치채지 못했다.
“조, 조금만 더 둘러보고…….”
“마음에 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사실 다른 웨딩숍에 가도 이 드레스만큼 마음에 드는 걸 보게 될지 미지수였다. 입고 있는 순간에도 자꾸만 드레스가 눈에 밟힐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평소와 다르게 재희는 선뜻 다른 곳을 더 둘러보고 싶다는 빈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럼 됐습니다.”
숍 매니저가 변심하기 전에 재빠르게 계약서를 챙겨왔다. 계약서에 기재된 가격을 본 재희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구매가도 엄청났지만, 대여 값도 감히 엄두도 못 낼 가격이었다. 숍 매니저가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지만 족족 재희의 고막에서 튕겨 나갔다. 재희가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어렵게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무혁 씨. 역시 조금만 더 둘러 보…….”
“구매로.”
무혁은 망설임이 없었다. 숍 매니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으나, 반면 재희의 얼굴은 더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무혁 씨, 잠깐만요. 예식 때 한 번만 입을 건데 구매까지는…….”
“마음에 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아니라…….”
보관도 보관이지만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혁은 뒷말은 듣지 않고 계약서에 사인한 뒤 숍 매니저에게 카드를 넘겼다. 숍 매니저가 카드를 들고 잠시 자리를 비우자 무혁이 덤덤한 음성으로 말한다.
“재희 씨.”
재희가 당황한 얼굴로 무혁을 멀거니 바라봤다.
“재희 씨를 위한 겁니다.”
무혁은 무뚝뚝한 얼굴로 재희를 마주 보며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욕심부려도 됩니다.”
그 말에 재희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당황스러움과 부담감은 잠시였다. 얼마 안 가 간질간질, 보송한 솜털 같은 간지러움이 가슴을 훑었다. 네 것은 없다. 계집애가 욕심만 그득해서는. 욕심부리지 마라. 네 주제를 알아. 항상 집에서 많이 들었던 소리.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아요. 갖고 싶지 않아요. 저는 괜찮아요. 자신이 가장 많이, 어쩌면 습관처럼 해 왔던 소리. 무혁은 모를 것이다.
“네. 고마워요, 무혁 씨.”
가격을 떠나 그의 그 말이 얼마나 크게 다가왔는지. 얼마나 고맙고 기쁜지. 이미 우는 방법을 잊었기에 기뻐도 재희는 여전히 울 수 없다. 그래도 고마워서, 너무나도 고마워서 눈가에 붉은 기가 옅게 번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 * * 결혼반지를 맞출 때도 웨딩드레스를 고를 때와 다르지 않았다. 재희가 생각하기에 분에 넘치는 가격이었지만, 무혁은 서슴없이 결제했다. 이대로 돌아가기 아쉬워 잠깐 무혁과 잠시 걷기로 한 재희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넓은 공터에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주말을 맞이해 열린 작은 플리 마켓이었다.
“무혁 씨. 저기 잠깐 구경하고 갈래요?”
희수와 만나면 꼭 플리 마켓을 구경했었다. 가게마다 아기자기하지만 특색 있는 물건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고, 예쁜 걸 발견하면 꼭 하나씩 사기도 했다. 무혁이 거절할 걸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이었지만, 의외로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혁 씨. 이거 봐요. 이거 예쁘죠?”
[맑음 공방] 간판이 달린 한 가게에 멈춰 선 재희가 딱 하나 남은 수국 책갈피를 보며 감탄했다. 꽤 인기 가게인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테이블에는 물건이 별로 없었다. 간이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 호연이 웃으며 말했다.
“예쁘죠? 우리 공방에서 가장 인기가 많아요. 다 팔리고 딱 한 개 남았어요.”
“그걸로 주시죠.”
수국 책갈피가 마음에 든 재희가 하나 달라고 말하려는 순간 무혁이 먼저 가로챘다.
“무혁 씨. 괜찮아요. 제가 살게요.”
“이것도 같이 주시죠.”
당황한 재희의 말을 무시하며 무혁이 수국 책갈피는 물론 다른 물건도 종류별로 샀다. 호연이 서비스로 토끼 모양 방향제를 넣어주었다. 제법 묵직한 봉투를 받아들며 재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살 수 있는데…… 고마워요.”
“별말씀을.”
무혁에게 고마운 마음도 잠시. 재희는 곧 곤란해졌다. 재희가 잠시라도 예뻐서 눈길을 두면 무혁이 고민도 하지 않고 물건을 사 버렸기 때문이었다. 재희가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리고 나서야 그의 행동은 멈췄다. 그러나 구매하는 횟수가 적어졌을 뿐 재희가 잠깐이라도 고민할라치면 물건을 사 버리는 통에 나중에 가선 재희는 그를 말리기를 포기했다. 플리 마켓을 돌던 재희의 걸음이 문득 한곳에서 멈췄다. 화가들이 모인 곳이었는데 그중 한 가게에 시선이 머물렀다. 점심시간이 훌쩍 넘겼음에도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듯 젊은 여자가 김밥을 먹고 있었다. 한 사람이 먹기엔 퍽 양이 많았는데도 곁에 있는 중년 여인은 이것저것 챙겨 주기 바빴다. 젊은 여자는 과일 하나를 집어 들어 중년 여인 입에 넣어주며 즐겁게 웃었다. 엄마와 딸로 보이는 그 모습이 퍽 보기 좋아 보여서 재희는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재희 씨?”
“네?”
무혁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재희가 그를 쳐다봤다. 무혁이 모녀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재희를 보며 물었다.
“그려 달라고 하겠습니까?”
“……아뇨. 괜찮아요. 지금도 충분해요.”
재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늦었다며 재희가 서둘러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재희의 시선이 모녀에게 머물렀다. 무혁은 잠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곧 묵묵히 재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정말? 진짜 손 크다. 어떻게 웨딩드레스를 사 줄 생각을 하지?
“그렇지? 당황스럽기도 하고 고민돼. 웨딩드레스를 어떻게 보관하지?”
-우리 재희 씨. 행복한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요.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희수의 말에 재희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의뢰받은 일러스트를 그렸다. 색깔이 입혀지며 하얀 스케치북은 어느새 색의 파도로 넘실거렸다. 고개를 들자 창문에 걸쳐진 보름달이 유난히 예뻤다. 재희는 잠깐 무혁의 턱시도 고를 때를 회상했다. 자신은 웨딩드레스 고를 때 몇 벌이나 갈아입었는데, 무혁은 재희가 처음 골라준 턱시도로 입어 보지도 않고 결정을 내렸다.
“무혁 씨. 그래도 한번 입어 보는 게 좋겠어요.”
“괜찮습니다. 재희 씨 안목 믿으니까. 이걸로 하겠습니다.”
무혁이 단호하게 결정을 내린 데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차마 더는 권할 수 없었다. 결국, 무혁의 예복은 재희가 맨 처음 권한 턱시도로 몇 분 만에 결정됐다. 그때 일을 생각하자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재희야?
“어, 응?”
희수의 부름에 재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생각하는데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을 못 해?
“아니야, 아무것도. 그보다 희수야. 어제 잠 잘 못 잤다면서…….”
-아, 응. 그랬지.
프로젝트에 매달리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며 투정 부리는 희수였다. 이제 슬슬 한계였는지 휴대 전화 너머로 희수의 하품 소리가 들렸다.
“얼른 자. 나중에 만나서 다시 얘기하자.”
-응, 그래. 나중에 보자.
통화를 끝낸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몇십 년간 재희의 시간을 함께 보낸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숨이 막히는 이 집에서 유일한 재희의 숨 트임 공간이 되어준 이 방과도, 그리고 이 집과도 곧 안녕이었다.
‘빨리…… 빨리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토록 바라던 자유. 할머니가 없는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남편이 될 남자와 함께 살며 오롯이 신재희로서 살게 될 그 날. 앞으로 변하게 될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에 스케치북을 쥔 재희의 손이 흥분으로 가늘게 떨렸다. 재희의 겨울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 * 강남에 위치한 KM 건축사 사무소.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은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단 한 곳. 대표실을 제외하고. 무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늦도록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설계도면과 서류 등으로 그의 넓은 책상은 어지러웠다. 적막한 사무실 안은 마우스를 달칵거리는 소리와 키보드 소리, 간혹 설계도면 위를 긋는 샤프 소리만이 간간이 들렸다.
“후.”
무혁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피곤한 눈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감았다. 어지러운 설계도면과 작은 글씨들이 눈을 감았음에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지이잉. 적막함을 깨뜨리며 울리는 휴대 전화 진동 소리. 피로한 눈을 감고 있던 무혁이 미간을 좁히며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까만 액정엔 오래전 유학을 떠난 친구의 이름이 떠 있었다. 휴대 전화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무혁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박정수.”
무혁의 겨울밤 역시 깊어 가고 있었다. * * * 겨울과 봄이 맞물린 2월 말. 전날 밤, 비가 올 것처럼 먹구름이 잔뜩 끼었던 하늘은 언제 그랬냔 듯 맑게 개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재희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재희는 차가운 공기에 숄을 어깨로 끌어 올리며 부르르 떨었다. 차가운 공기 덕분에 머릿속에 남아있던 잠이 순식간에 물러났다. 재희는 손을 뻗어 이슬이 매달린 나뭇가지를 톡 건드렸다.
“벌써 싹이 났구나.”
앙상한 나뭇가지에 성격 급한 싹이 난 걸 보며 재희는 웃음을 머금었다. 왠지 시작이 좋았다. 재희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오늘은 재희가 결혼하는 날이었다. * * * 가족에게 무혁과 함께 숍에 가기로 했다고 말한 재희는 서둘러 집에서 빠져나왔다. 신채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고 할머니는 못마땅한 얼굴로 마지못해 보내 주었다.
“누나. 식장에 봐.”
아무도 현관까지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오직 재혁만이 할머니를 뿌리치고 현관까지 나오며 아쉬운 인사를 했다.
“응. 식장에서 봐.”
작은 종이가방을 들고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향하는 재희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가벼웠다. 재희는 수십 년간 살아온 집을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대문을 나섰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검정 세단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무혁 씨.”
재희가 드물게 맑게 웃었다. 재희에게 다가가던 무혁의 걸음이 멈춘 건 동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