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최악의 상견례2021.12.13.
답지 않게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하던 재혁이 곧 입을 열었다.
“그 남자 괜찮더라.”
“어?”
“누나랑 맞선 본 그 남자 말이야.”
“그게 보여?”
재희가 고개를 갸웃하자 재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남자는 남자가 보는 게 가장 정확해. 솔직히 걱정했는데 마음이 놓인다.”
“그래…….”
“생긴 건 그래도 함부로 손 올리는 남자 아닌 것 같아.”
손부터 올라가는 남자라면 재혁이 멱살 잡자마자 주먹이 날아왔겠지만, 무혁은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냉정한 눈으로 찬찬히 살펴보며 현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시선. 호기롭게 멱살을 잡았지만, 재혁의 어깨가 순간 움츠러들 정도로 위압감이 상당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서늘했다. 다행히 재희의 반응을 보니, 그 남자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누나를 바라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누나. 나 나중에 정식으로 다시 한번 소개해 주라.”
“응?”
“응. 아까 할머니한테 물어봤는데 KM 건축사 사무소의 대표라며? 아까 카페에서 한민석 보고 놀랐다니까. 거기다 강 대표라고 해서 설마설마했거든. 와씨, 아버지 진짜 능력 있으시다니까. 어떻게 그런 남자와 선을 보게 하셨지.”
흥분한 재혁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게 왜?”
건축에 대해 잘 모르는 재희가 되묻자 재혁이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나는 결혼할 남자인데 그것도 몰라? 강무혁 하면 건축계에서 유명하다고! 주로 인터뷰를 한민석이 하고, 강무혁은 인터뷰를 안 해서 얼굴도, 집안 배경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설계하는 건물은 모두 화제라고.”
“……그래?”
담담한 재희의 반응에 재혁이 답답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누나. 코모도 알지. 티비에 자주 나오는 김서원이 운영하는 레스토랑.”
“응. 유명한 데잖아.”
무혁과 함께 갔던 건물 외관은 물론 내부까지 혼을 빼놓을 정도로 아름답고 멋진 레스토랑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레스토랑 한국건축문화대상 받은 건 알아? 거기 설계부터 내부 인테리어까지 모두 강무혁 씨가 맡은 건 알고?”
“…….”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럴 줄 알았어.’
재혁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누나가 결혼하려는 남자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건축계에서 정말 유명한 사람! 내가 정말 존경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을 처음 만나자마자 멱살을 잡았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재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나중에 꼭 정식으로 소개해줘야 해.”
재혁이 이만 쉰다며 나간 뒤 재희는 스케치북을 꺼냈다. 그리곤 무혁을 떠올리며 그렸던 곰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삭막한 겨울 같은 남자 강무혁과 그가 설계했다는 멋진 레스토랑을 떠올렸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
‘어쩌면.’
강무혁이란 남자도 겉과 속이 다른 남자가 아닐까. 거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남자. 그동안 무혁을 만났던 시간을 떠올리며 재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찬 바람이 불면서 창문이 덜컹거릴 때마다 마르고 긴 앙상한 나뭇가지가 스산하게 흔들렸다. 어린 재희의 눈에 춥고 외로우며 무서웠던 겨울밤. 누군가의 온기를 찾아가는 대신 이불을 뒤집어쓰고 긴긴 겨울밤이 지나가길 기다렸던 어린 날. 버석버석하고 메마르고 무서웠던 겨울밤이었지만, 어쩐지 앞으로는 따뜻하고 포근한, 그런 외롭지 않은 겨울밤을 보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늘 그랬듯 모든 일은 결정된 뒤 갑작스럽게 재희에게 통보됐다. 상견례 날짜 역시 그랬다. 무혁과 헤어지고 며칠 지나지 않아 신채근이 상견례 날짜를 통보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통보였지만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랬고, 당연했으니까. 고즈넉한 분위기와 외부와 차단된 분위기로 인기가 좋은 외곽의 한정식집.
“늦는구나.”
벽걸이 시계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던 할머니가 적막을 깨며 불쾌한 티를 냈다.
“약속 시각 10분 전엔 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우리 집안을 뭐로 보고.”
약속 시각까지 10분이나 남았건만, 할머니는 투덜거리기 바쁘다. 두 집안의 합의로 상견례 자리에는 형제는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그 부분에 대해 가장 크게 반대했던 할머니는 아직도 앙금이 남은 듯했다. 귀한 우리 손주를 이런 자리에 데리고 나와야 하는데. 손주사위가 될 사람한테 우리 재혁이를 소개해줘야 하는데. 할머니는 아쉬운지 불과 5분 전까지도 계속 그런 소리를 반복했다. 신채근은 불편한 헛기침을 했고, 홍연화는 못 들은 체했다. 재희는 컵에 담긴 물에 집중하며 할머니의 불평을 못 들은 척했다. 약속 시각이 가까워져 올수록 파동처럼 설렘과 긴장이 등골을 서늘하게 훑었다.
“늦었습니다.”
7시. 칼같이 약속 시각에 맞춰 도착한 강진 회장이 양해를 구하며 아내인 김혜란과 함께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무혁이 들어왔다. 불편한 분위기를 깨 준 목소리가 반가워 고개를 들던 재희가 순간 숨을 들이켰다. 머리를 넘겨 반듯하게 드러난 이마와 선이 진하고 남자다운 턱, 미간에 습관적으로 잡힌 주름과 짙은 눈썹, 깊고 눅진한 눈동자.
꽤 큰 방임에도 불구하고 무혁의 존재감이 어마어마했다. 오늘따라 무혁은 거친 외모에 깊은 눈동자가 어우러져 묘하게 섹시하다 못해 퇴폐미까지 느껴졌다. 재희의 심장은 자꾸만 제멋대로 세차게 두근거렸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신채근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강진입니다.”
의례적인 인사와 명함이 오고 갔다. 마치 상견례보다는 비즈니스 자리같이 느껴졌다.
“블라디미르 전시회를 라윤 갤러리에서 열게 되었다지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김혜란의 명함을 받으며 던진 신채근의 말이 재희의 귀에 콕 와서 박혔다. 라윤 갤러리는 국내외 유명 화가들이 꼭 한 번 전시회를 열고 싶어 하는 명망 있는 갤러리였다. 그림 한 점당 적게는 몇천에서 크게는 수십, 수백억을 호가하는 유명 화가들이 주로 전시회를 여는 라윤 갤러리는 그야말로 꿈의 갤러리였다. 안 좋게 헤어진 전 남자친구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갔던 라윤 갤러리. 미대생이었던 시절 재희도 동경해 마지않는 갤러리이기도 했다.
“그저 운이 좋았지요.”
신채근의 알은체에 김혜란이 호호, 웃어 보였다. 상견례는 나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남의 일인 것처럼 고개를 살짝 내리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재희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침잠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무혁과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움칠 어깨를 잘게 떨었다. 재희는 뚫어 버릴 듯한 도전적인 그 눈빛을 도저히 오래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지은 죄도 없는데 괜히 시선을 아래로 깔며 고개를 살짝 숙여 버렸다.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무혁의 시선은 집요했고 거둬질 줄 몰랐다. 재희는 최대한 부모님끼리 나누는 대화에 집중하려 했지만, 찌르는 듯한 그의 시선에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재희가 그래도 심성이 곱고 성격이 참 나긋나긋하답니다.”
평소 재희에게 악담을 퍼붓던 할머니가 인자한 목소리로 칭찬을 했다.
“그렇습니까. 안사장 어른 말씀대로 참해 보입니다.”
적당히 할머니의 말에 맞장구치는 강진 회장은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강진 회장은 풍채가 좋고 눈빛이 강직하여 도저히 환갑이 넘은 사람 같지 않았다. 무혁은 아버지를 많이 닮은 모양이었다. 반면 어머니인 김혜란은 중간중간 우아하게 웃어 보였지만 어쩐지 예민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김혜란은 반도체 회사를 모체로 둔 디케이 그룹 창업주의 외손녀였고, 강진 회장은 국내 굴지의 건설사 KJ 그룹 창업주의 외아들이었다. 무혁의 집안에 대해 다시금 떠올린 재희는 새삼 신기한 기분을 느꼈다.
‘신기해.’
막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재희의 집안과 재벌인 무혁의 집안은 비교할 수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두 집안이 이렇게 마주 앉아 있을 일은 없어서인지 상견례 자리가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사실 기대하지 않았답니다. 무혁이는 여자에게 관심도 없는 데다 선 자리에 나가는 걸 싫어했거든요. 사돈께서 인맥까지 동원해 하도 절박하게 부탁하시길래 한번 나가나 보라고 떠밀었지요.”
힐끗, 김혜란의 시선이 차갑게 재희의 가족을 훑었다.
“격에 맞지 않아도 우리야 손해 볼 것이 없으니까요.”
그럭저럭 부드럽게 풀려가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하게 가라앉았다. 신채근과 홍연화의 표정이 굳어졌다. 재희는 불안한 시선으로 굳은 표정의 할머니를 눈치 살폈다. 제가 잘못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재희는 안절부절못했다. 내내 입 다물고 있던 무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얘는. 내가 없는 소리 한 것도 아니고.”
김혜란은 우아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 나온 걸 후회한다는 얘기는 아니니 마음에 두진 마세요.”
“아닙니다. 이렇게 뜻깊은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으니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신채근이 표정을 풀며 상황을 수습했다. 이윽고 미리 주문한 음식이 나왔지만 경직된 분위기는 풀릴 줄 몰랐다. 갖가지 음식이 놓이자 할머니는 늘 하던 대로 신채근 내외 쪽과 무혁의 부모님 쪽, 그리고 무혁 앞으로 음식을 몰아 놓았다. 순식간에 재희 앞엔 음식이 몇 개밖에 남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던 재희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재희에겐 당연한 일이 그들에게는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수치스러워졌다.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자, 강진 회장이 헛기침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식사하시죠.”
얼마간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식사가 어느 정도 진행됐을 무렵 김혜란이 다시 말을 꺼냈다.
“무혁이 이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던지요.”
재희를 힐끗 보는 김혜란의 눈동자는 한치의 호감조차 없는 것처럼 건조했다. 오히려 적개심이 가득한 눈빛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데 아들이 마음에 든다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는 눈빛. 재희는 애초에 자신이 예비 시부모님의 마음에 들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자신은 한참 부족했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희는 담담하게 그 눈길을 감내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조금만 참으면, 조금만 견디면 되었다. 그러면 다 끝나 있었으니까.
“사실 부모 욕심이란 게 없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결혼 생각이 없다던 아들이 결혼하겠다는데, 며느리의 조건이 뭐 중요할까 싶었죠. 아, 물론 사돈댁이 부족하다는 소리는 아니니 오해하지 마세요.”
“그만해.”
강진 회장이 주의 주었으나, 김혜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괜찮아.’
무혁이 말했었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차만 마시고 일어났을 거라고. 재희, 다른 누구도 아닌 재희여서 무혁은 결혼을 결심했다고 했다. 실제로도 그는 그녀에게 꽤 적극적이었고, 재희는 사실상 무혁 하나만 바라보고 결혼을 결심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의도가 보이는 김혜란의 말에 휘둘릴 필요 없었다.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아야 했다. 김혜란이 따뜻한 물컵을 들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직접 보니…… 참하고 예쁘긴 한데, 딱히 야무져 보이지 않는군요. 우리 무혁이랑 결혼하면 제 역할을 잘할 수 있을지.”
순간 재희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쥐었다가 풀었다. 겨우 풀어졌던 방 안의 공기가 차게 얼어붙었다. 폭탄을 날린 김혜란은 흥, 모른 척 물을 한 모금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