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그 남자의 속사정2021.12.09.
“그래서 오붓하게 같이 밥 먹고 왔냐?”
“…….”
“무슨 대화를 했는데.”
무혁이 대답을 하지 않자 민석이 설마 하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무혁. 설마 서로 취향이나, 그런 거 대화 안 해봤어?”
“피자와 우유를 좋아하더군.”
무혁은 귀찮은 티를 내며 간단하게 대꾸했다. 민석의 미간이 좁혀졌다. 민석은 설마하는 심정으로 다시 물었다.
“끝이야?”
무혁이 입을 열지 않자 민석의 얼굴에 경악이 번져나갔다.
“너 관심 있는 거 맞냐.”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사무실로 돌아가. 그렇게 한가하지 않을 텐데.”
민석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무혁이 이런 놈이란 걸 민석은 잠시 잊고 있었다. 무혁은 지독한 워커 홀릭이었다. 한번 집중하면 무섭도록 빠져들어서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남자. 그 성격은 대학은 물론 유학 갔을 때도 티가 났었다. 무혁은 무언가에 씌인 듯이 그 흔한 추억을 쌓기는커녕 오로지 공부와 공모전에 전념했고 졸업 후에는 일에만 집중했다. 아예 여자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일 뿐, 무혁은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잘생긴 남자였다. 처음엔 다가가기 힘들어하던 여자들도 무혁의 진중함에, 가끔 피로에 물든 무혁의 얼굴에 반해 호감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피로에 찌들어 눈가가 거뭇한 게 더 매력적이라고 여자들은 입을 모아 얘기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무혁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더 나아가 무혁은 말 그대로 여자를 무슨 길가의 돌처럼 여겼다. 민석이 농담 식으로 심장이 돌로 만들어진 게 아니냐고 묻자 무혁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선을 본 사실도 놀라운데, 결혼까지 한단다. 무혁 성격에 가볍게 결정한 것 같지 않았다. 매사에 진중한 그는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남자였다. 적어도 민석이 봐온 무혁은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일 따윈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남자였다. 거기다 10년 이상을 무혁과 친구로 지내면서 그의 속내를 민석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만큼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무혁이었기에 그가 앞뒤 가리지 않고 여자 때문에 다른 사람 멱살까지 잡은 건 민석에겐 천지가 개벽할 만큼 큰 충격이었다.
‘하긴. 그 집안 분위기 생각해 보면 무혁이 정상이고 우진이가 별종이지.’
싸늘하다 못해 냉기가 흐르는 무혁의 집안을 떠올리며 민석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민석은 오늘 처음 본 재희를 응원했다. 부디 무혁의 성격에 상처받지 않길 바라며. 특히 무혁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지 않기를 빌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여자분은 잘 모셔다드리고 왔지?”
“남의 일에 관심이 많군.”
민석이 귀찮아진 무혁이 일 안 하냐며 다른 곳으로 쫓아내 버렸다. 민석은 이대로 조용히 넘어갈 생각하지 말라며 구시렁거리며 돌아갔다. 한창 공사 중인 현장으로 걸음 옮기던 무혁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내가 그 현장을 지나지 않았다면.’
아까 카페에서의 일을 떠올리자 무혁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무혁은 건축사지만 항상 인부들과 같이 일을 하며 현장을 손수 점검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오늘도 평상시와 똑같이 먼지를 잔뜩 묻혀 가며 현장 지휘를 하고 인부들과 작업하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어라, 저게 무슨 일이래.”
한 인부의 호기심 가득 찬 목소리에 고개 돌린 무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웬 남자에게 손목을 잡힌 채 곤란을 당하고 있는 재희였다.
“어, 어! 대표님!”
무슨 상황인지 잴 것도 없이 무혁의 몸이 먼저 튀어 나갔다. 평소 냉정하게 상황부터 파악하는 무혁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야말로 무혁은 성난 황소처럼 카페에 들이닥쳤다. 그 짧은 순간 재희의 겁에 질린 얼굴을 보자마자 무혁은 저답지 않게 주먹을 날렸다. 남자는 나가떨어졌지만, 무혁은 그것만으론 분이 풀리지 않았다. 뒤늦게 민석이 달려와 말려도, 재혁이 난입해서 제 멱살을 잡아도 소용없었다. 남자에게 붙잡혀 겁에 질린 얼굴을 한 재희만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남자의 얼굴에 내리꽂으려던 그의 주먹을 막은 건,
“무혁 씨. 사람이…… 많아요.”
작지만 명확하게 귀에 꽂힌 재희의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순식간에 이성이 돌아온 무혁은 조용히 주먹을 내렸다. 재희와 친구를 먼저 다른 곳에 보낸 뒤 경찰서에 간 무혁은 단순 폭행 사건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무혁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일에서 재희가 관련되어선 안 되었다. 경찰이 들이닥치자마자, 재희의 얼굴이 그 남자에게 손목 잡혔을 때보다 더 겁에 질린 얼굴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혁은 대신 자신이 모조리 뒤집어쓰고 이 사건에서 재희를 쏙 빼 버렸다.
‘피자와 우유…… 라.’
문득 피자와 우유를 좋아한다는 재희의 희미한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곱게 눈매를 접으며 호선을 그린 입술.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와 재희의 성격만큼이나 부드럽게 물결치며 흘러내리는 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노을 서점을 담은듯한 따뜻한 갈색 눈동자. 재희와 시선을 마주치자 무혁은 저도 모르게 숨이 멈추며 시선을 피해버렸다. 고요한 서점 안, 책장 너머 작은 여자아이. 책장을 가운데 두고 흐르는 기분 좋은 침묵. 이젠 빛바랜 추억 속에서나 존재하는 장작이 타는 내음과 낡은 책의 묵은 냄새가 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무혁은 입매를 굳히며 붉게 달아오른 굵은 목덜미를 손으로 문질렀다.
무혁은 상념을 떨치며 무거운 건축 자재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한창 공사 중인 레스토랑을 보며 재희와 함께했던 식사 시간을 떠올렸다. 재희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한 번씩 자신을 무서워했고 무혁도 알고 있었다. 재희와 식사를 한 이유도 단순했다. 재희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고 또 그녀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무서워하지 말았으면 했다. 가장 큰 이유는 같이 식사를 하면서 재희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였다.
‘간 보람은 있었어.’
무혁은 양식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지만, 한결 편안한 분위기로 재희와 헤어졌으니 만족스러웠다.
“…….”
텅, 철근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무혁은 더러워진 손바닥을 털었다. 어떤 이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함께 식사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배웠다. 그래서 무혁은 일부러 서원의 레스토랑에 데리고 갔다. 서원이 신경 쓰였지만, 당시엔 그런 건 생각나지도 않았다. 서원은 성격은 나쁘지만 실력 만큼은 일류였다. 셀럽이나 연예인들은 물론 정, 재계 사람들이 즐겨 이용하는 레스토랑인 만큼 재희가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아니,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하듯 오늘 재희와 한 발짝 더 친해진 것 같아 스스로 뿌듯했다.
‘하지만.’
재희가 눈이 내리는 백화점 앞에서 지었던 가식 없는 웃음. 오늘은 그때 그 웃음을 보지 못했다.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 * * 재희는 제 방 책상 앞에 앉아 손목을 살펴보았다.
“컸어…….”
거칠지만 커다랗고 따뜻한 손. 박 부장에게 손목 붙잡혔을 땐 거머리가 들러붙은 것처럼 소름 끼쳤는데, 그의 손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뒤이어 오는 감정은……. 안심. 그래, 안심이었다. 괜스레 손목을 매만지며 재희는 아까 상황을 떠올렸다. 식사 후 무혁이 데려다준다고 했을 때 재희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직 근무 중인 그에게 그런 폐를 끼칠 수 없었다.
“내 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봐야 안심됩니다.”
단호하게 말한 무혁은 기어이 재희를 데려다주었다. 비록 오는 내내 대화가 몇 마디 오가지 않았지만, 재희에겐 충분히 편한 시간이었다.
‘이런 게 보호받는 기분일까.’
무혁의 손의 체온과 감촉이 아직도 허리에 남은 듯 생생하다. 처음이었다. 이런 기분은. 무혁은 보면 볼수록 든든했다. 감히…… 자신이 감히 모르는 척 기대도 그는 묵묵히 받아 줄 것만 같았고, 아슬아슬한 일상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 같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무혁이라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보호해 줄 것 같은 근거 없는 믿음까지 생겼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한쪽 가슴 구석에서부터 설레는 감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재희는 달아오른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지잉- 휴대 전화 메시지 수신 알림이 울렸다. 화들짝 놀란 재희는 허둥지둥하다 휴대 전화를 조심스럽게 들었다. 심장이 제멋대로 두근거렸다.
‘혹시?’
[재희~ 데이트 어땠어?]
활기찬 기운이 듬뿍 묻어나오는 메시지. 희수였다. 메시지를 확인한 재희의 얼굴에 실망이 서렸다.
[데이트 아니야. 그냥 식사만 하고 바로 헤어졌는걸.]
[그게 데이트지! 데이트가 별건가?]
[아니래도.]
[그래그래. 뭐 그렇다 치고. 난 이 결혼 찬성한다.]
아까 카페에서 차를 마실 때까지만 해도 딱히 재희의 결혼에 호의적이지 않던 희수였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희수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더라도 이 결혼은 끝까지 반대하려고 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인상은 좀 무서워도 듬직하더라. 거기다 얼굴 진짜 잘생겼더라.]
재희가 답장을 하기도 전에 희수의 메시지가 쉴새 없이 날아들었다.
[남자는 자고로 그래야지. 잘생긴 남자는 무조건 옳다. 암요, 암요. 재력도 있어 보이고. 거기다 네가 위험에 빠진 거 보고 단번에 달려와서 멱살 잡는 패기!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을 무마시키는 능력. 판타지인 줄?]
재희는 할머니 같은 희수의 반응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로맨스 광인 희수가 아까 그 상황을 두고 로맨스 영화 한 편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재희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무엇보다 아까 그 일 때문에 너 걱정했잖아. 할머니 귀에 들어갈까 봐.]
즐겁게 메시지를 보던 재희의 표정이 흐려졌다. 희수 말대로였다. 박 부장을 다시 만난 사실보다 이 일이 할머니 귀에 들어갈까 봐 더 걱정했었다.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있는데 메시지가 이어 도착했다.
[아무튼, 아무 일 없이 넘어간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제야 카페에서의 그 일 이후로 어떻게 된 건지 자신은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현장에 경찰까지 도착했음에도 재희는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장을 정리한 무혁은 한참 뒤에 왔지만, 그 일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어떻게 한 거지.’
조서를 쓰라는 연락조차 받지 못했다. 오히려 재희는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무혁이 어떻게 처리한 건지 의문이 깊어질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나. 나 들어가도 돼?”
“어…… 응.”
재혁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희는 휴대 전화를 내려놨다. 막 집에 돌아왔는지 재혁이 외출복 입은 그대로 들어와 익숙하게 자리 잡고 앉았다. 재혁은 검지로 이마를 슬슬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