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피자와 따뜻한 우유. 지금은 맛볼 수 없는 추억의 맛2021.12.06.
주문할 때도 많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니 양이 더 어마어마했다. 설사 배가 고픈 상태라도 절대 다 먹지 못할 양이었다. 재희는 놀라움으로 벌어지려는 입술을 물컵으로 가렸다. 재희가 힐끗 음식을 훑어보고 있는 무혁을 쳐다보았다. 키와 덩치를 생각한다면 왠지 무혁은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믿음까지 생겼다.
“뭘 좋아합니까?”
“네?”
뜬금없는 무혁의 질문에 재희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재희 씨가 좋아하는 음식 말입니다.”
“아…….”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떠오르지 않는다. 원래 식욕도 없는 편이었고, 가리는 음식도 없어서 주로 사람들 의견에 따라 먹곤 했다. 재희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가게를 발견해도 그냥 맛있었다, 정도여서 희수가 주로 어떠냐고 물어보면 마음에 든다고 듣기 좋은 말로 대답해 주곤 했다. 집에서 뭔가 좋아한다는 걸 티 내는 것 자체가 재희에겐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고, 재희 역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였다. 무혁의 질문에 금방 대답하지 못한 것은.
“재희 씨?”
무혁의 부름에 당황한 재희가 허둥거리며 말을 살짝 더듬었다.
“죄송해요. 질문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무혁의 눈동자에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일렁였다. 재빠르게 눈치챈 재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지. 빨리 대답 안 해서 화가 났나 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거 하나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냐며, 쓸모없다고 할머니가 화를 내는 모습이 머릿속에 스쳤다. 재희는 자신도 모르게 뻣뻣하게 몸에 힘이 들어가며 긴장했다. 결국, 재희는 무혁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거 하나 대답하는 게 어렵냐고 타박할까. 아니면 한심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무슨 말을 하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넘기자. 설사 소리 질러도 괜찮아. 잠깐일 뿐이야. 난 잘 참고 견딜 수 있어. 괜찮아. 재희가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굳게 마음먹을 때 무혁이 입을 열었다.
“천천히 생각하십시오.”
제 예상을 모조리 빗겨나간 말에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혁을 쳐다보았다. 급할 것 없다는 듯 무혁은 물을 마셨다. 화가 난 기색도 없었고 불쾌한 기색도 없었다. 그저 평소와 똑같이 덤덤한 얼굴로 물을 마실 뿐이다. 설핏 그에게서 보였던 일렁이는 감정도 사라진 상태였다.
‘정말 기다려 주는 걸까.’
처음이었다. 뭔가 물어보고 대답을 기다려 주는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말했던 전 남자친구조차도 그녀의 대답을 기다려 준 적이 없었는데. 물컵을 매만지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묻고 그녀의 대답을 묵묵히 기다려 주는 게 왜 그리 울컥하는지. 먹먹함을 삼키며 한참 동안 생각하던 재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피자…… 피자를 좋아해요. 그리고…… 따뜻한 우유도요.”
“피자?”
“네. 제가 좋아하는 서점이 있었는데, 거기서 먹었던 피자랑 우유가 참 맛있었어요. 지금은 그 맛을 못 느끼지만요.”
재희가 희미하게 웃었다. 겨울비가 내리는 겨울. 서점 할아버지가 건네준 따뜻한 우유 한잔과 얼굴도, 나이도 모르는 비밀 친구가 위로하듯 책장 너머로 건넸던 피자 한 조각은 조금 식었지만, 세상 그 어느 음식보다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맛볼 수 없는, 재희에겐 소중한 추억의 한 조각이자 맛. 재희의 옅고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가 저를 응시하는 무혁을 담았다. 크고 순한 눈망울이 마치 노을 서점을 담은 것처럼 따뜻하다. 여자의 눈매가 부드럽게 접혔다.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와 대조되는 코랄 색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갑자기 무혁이 먼저 재희의 시선을 피해 버린다.
“무혁 씨?”
무혁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리며 주먹을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가파르게 떨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무혁이 테이블 중간에 놓인 피자에서 가장 큼직한 조각을 덜어서 재희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재희가 먹기 쉽게 가까이 밀어 주었다. 재희는 의아한 눈으로 무혁을 쳐다보았다. 그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시선이다.
“……이렇게 제 앞에 음식 몰아 놓으면 무혁 씨가 식사하기 불편할 텐데요.”
“괜찮습니다.”
“아…… 네.”
무혁의 딱딱하고 단호한 대답에 할 말이 없어진 재희가 입을 다물었다.
“식겠습니다.”
무혁이 식사를 권하자 재희는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이미 부른지라 피자 한 조각을 겨우 다 먹고, 포크로 샐러드를 조금 집어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동작이 멈칫했다.
‘잘 먹는다.’
식사에 집중하는 무혁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굉장히 잘 먹었다. 이미 배가 부른 재희조차 다시 배가 고파질 정도로. 간혹 무혁이 몇 번 음식 챙겨주는 것 외에는 식사하는 내내 대화는 오고 가지 않았지만, 재희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 편히 식사를 할 수 있었다. * * *
“왔냐?”
무혁이 현장으로 돌아오자 현장 감독과 대화 나누던 한민석이 손을 흔들었다. KM 건축사 사무소 공동 대표이자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민석은 영업이나 미팅 등을 총괄했고, 말재주 없고 묵묵한 무혁은 설계나 현장을 총괄했다.
“상황은.”
현장 감독이 돌아가자 무혁이 대뜸 물었다. 현장에서 날리는 먼지에 목이 칼칼했던지 물을 마시던 민석이 쿨럭 기침했다.
“야, 야. 무섭다. 갑자기 얼굴 들이대지 말라니까.”
말과 다르게 민석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입가를 쓱 닦았다. 무혁의 미간이 좁혀지자 민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 가고 나서 우진이가 잘 처리했다.”
“그 남자에 대해서는.”
“옛날 직장동료였다더라. 그놈 말로는 그냥 옛날 직장동료를 만나서 반가워서 그랬다는데. 한마디로 추근댔다는 소리지. 쓰레기 자식이었어.”
순간 무혁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턱에 힘이 들어가며 무혁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자, 민석이 속으로 탄식하며 얼른 수습했다.
“아무튼, 전과도 있고 변변한 벌이 없이 하루 먹고 하루 사나 보더라고. 아까도 뼈가 부러졌니 어쩌니 고소하니 어쩌니 얼마나 시끄럽던지.”
“하라고 해.”
“뭐?”
“고소.”
무혁이 낮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럼 난 밑바닥까지 다 파헤쳐 줄 테니.”
무혁의 굵은 목에 핏대가 불뚝 서 있었다. 가까스로 화를 꽉 눌러 참는 게 여실히 보였다.
‘단단히 화가 났구만.’
오랜만에 보는 화가 난 무혁의 모습에 민석이 골치 아픈 듯 고개를 저었다.
“뭐, 고소 진행해도 그 여자분에 관한 일은 빼고 진행하는 거겠지.”
그의 의중을 살피듯 민석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무혁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의도를 파악한 민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털어서 먼지는 많이 나오게 생겼더라. 그놈.”
“할 말은 그게 끝인가.”
“아니. 더 있어. 우진이가 투덜대더라. 생전 주먹 한 번 안 올리던 사람이 왜 갑자기 싸움박질이냐고. 변호사 자격증은 장식이냐고 그러더라.”
“이런 일 해결하라고 월급 주는 거다.”
“네 친동생한테 가차 없구나.”
냉정한 녀석. 민석이 고개를 저었다. 강우진. 무혁의 친동생으로 아버지의 회사인 KJ 그룹 법무팀으로 입사하는 대신 무혁을 따라 KM 건축사 사무소에 들어왔다. 덕분에 집안이 한바탕 뒤집혔지만, 우진은 몇 년 뒤에 KJ 그룹에 입사하겠다는 약속을 한 뒤 KM 건축사 사무소 법무팀장으로 입사했다. 무뚝뚝한 무혁과 사근사근한 성격인 우진은 한배에서 나온 형제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성격이 달랐다.
“그나저나 그 여자분 누구냐?”
무혁이 민석이 건네주는 설계도면을 살피며 무심하게 되물었다.
“누구.”
“모른 척하지 마. 네가 밥 먹으러 가다 말고 구하러 간 여자분 말이야. 되게 예쁘던데.”
무혁의 험악한 시선이 민석에게 꽂혔다. 어이쿠, 무서워라. 민석은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내가 안 궁금하게 생겼냐. 내가 너랑 친구 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그렇게 몸부터 튀어 나가는 거 처음 봤거든. 생긴 거랑 다르게 넌 절대 행동부터 나가는 타입이 아니잖냐.”
씩 웃는 민석의 웃음을 마뜩잖은 눈으로 보던 무혁이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나랑 결혼할 사람.”
“어?”
“곧 상견례도 할 예정이야.”
“뭐어? 그 여자분이 그 여자분이야? 감히 너랑 결혼한다는 겁대가리 없는…… 미안. 그렇게 노려보지 마.”
날카롭게 꽂히는 시선에 민석이 곧바로 사과했다.
‘위험했다.’
조금만 더 말했으면 무슨 욕을 얻어먹었을지. 차라리 주먹 날리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민석은 무혁에게 입으로 욕 얻어먹는 건 사양이었다.
“아무튼 의외네. 어머니와 함께 방문할 때 제외하고 절대 명품매장 근처에도 안 가는 널 스스로 걸음 하게 만든 여자라니. 거기다 그 자리에서 시원하게 차 한 대값을 긁었다며?”
무혁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댔다.
“어떻게 안 거지?”
“내가 그걸 전해 듣는 경로가 우진이밖에 더 있겠냐.”
민석이 능글맞게 웃었다.
“그렇잖아. 어머님이 신상 보러 H 매장 가셨다가 들으셨다나. 덕분에 우진이가 어머님께 꽤 시달렸나 보더라. 뭐 들은 거 없냐고.”
“……쓸데없는 말을.”
무혁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 돌렸다. 민석이 키득키득 웃었다.
“우진이가 적당히 잘 변명해 뒀으니 안심해.”
“…….”
“그리고 너 그 여자분이랑 서원이 레스토랑에 갔다며?”
“한민석.”
무혁이 경고하듯 나지막하게 불렀으나 민석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서원이 뭐라고 하더라. 네가 갑자기 가게 자리 하나 만들라고 요구한 것도 황당한데, 셰프인 자기가 손수 음식까지 서빙하려 했더니 하지 말라고 못 박았다며?”
무혁이 대답하지 않자 민석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김서원은 무혁과 민석의 또 다른 대학 동기였다. 건축학과 재학하던 시절 갑자기 요리 쪽으로 진로를 튼 서원은 대한민국 미남 셰프로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했다. 거기다 미식가조차 감탄할 정도로 실력도 좋아서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서원은 무혁에게 레스토랑 설계부터 건축까지 모두 의뢰를 했는데, 그 결과 한국건축문화대상까지 수상했었다. 건축할 때 말고는 레스토랑에 걸음조차 하지 않던 무혁이 갑자기 여자를 데리고 나타난 것도 황당한데, 오랜만에 친구 얼굴이나 보려고 한 서원을 무혁이 거부한 것이다.
“셰프가 왜 손수 서빙하지. 그건 어불성설 아닌가.”
“야, 오랜만에 친구 얼굴을 볼 겸 겸사겸사…….”
“그럴 리가.”
무혁이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하자, 민석이 뜨끔한 표정을 했다. 서원은 무혁과 다른 의미로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그런 서원조차 무혁이 웬 여자와 함께 나타나자 호기심을 못 이겨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인사를 핑계로 보려고 했었다. 무혁이 그 속내를 단숨에 간파하자 민석이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