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그 남자와의 점심2021.12.02.
카페에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이 아니었다면 재희는 침묵에 숨 막혀서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재희는 가방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무혁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은 채 재희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그 시선이 못내 부담스러웠다. 침묵을 깨뜨리듯 달칵, 조금 녹은 얼음이 잔 속에서 맑은 소리 내었다. 결국 무거운 침묵을 이기지 못한 재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요. 무혁 씨.”
“별말씀을.”
“네…….”
단호한 무혁의 대답에 대화가 끊기자 무릎 위에 얹어진 재희의 손가락이 초조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재희가 다시 한번 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사실 아까 조금 걱정했거든요. 경찰서까지 갈까 봐. 무혁 씨가 잘 정리해 줘서 한시름 놓았어요.”
“왭니까?”
“네?”
“그게 왜 걱정입니까. 피해자는 재희 씨인데.”
“아…… 그게…….”
자신만 엮인 일이라면 괜찮았다. 그러나 희수도 엮여 있었고, 무엇보다 재혁과 무혁이 엮여 있었다. 재혁의 일이라면 목숨이라도 내줄 수 있는 할머니였기에 이런 일로 재혁이, 그리고 할머니가 기대하고 있는 무혁까지 경찰서에 불미스러운 일로 가게 된 일이 귀에 들어간다면 분명 가만 계시지 않을 터였다. 더 나아가 유일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희수조차 어쩌면 앞으로 만나는 것도 힘들지도 몰랐다. 나만 욕먹고 나만 참고 넘기면 되는 문제였다. 그럼 다들 조용히 지나갈 수 있고 재희는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저만 입 다물고 참고 인내하면 될 일이었다. 이런 속사정을 무혁에게 자세히 말해 줄 수도 없어서 재희가 난감한 듯 희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묵묵히 대답을 기다리던 무혁이 입을 열었다.
“밥 먹읍시다.”
“네?”
난데없는 그의 말에 재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아.”
그러다 곧 그가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카페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했다는 점을 떠올렸다.
“아…… 아아. 죄송해요.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점심 전이라고 하셨죠.”
재희의 사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무혁의 미간 사이의 주름이 깊어졌다. 그러자 무혁이 귀한 점심시간을 허비하게 한 걸 불쾌하게 여긴 거로 오해한 재희가 허둥지둥 가방을 챙겼다. 무혁과 다시 만나서 반가웠던 재희는 당황스럽고 민망해서 몇 번이나 손이 헛나갔다.
“저기…… 그럼 저도 이만 가볼게요. 얼른 가서 식사하세요. 바쁜 분을 제가 붙잡아 뒀…….”
“신재희 씨.”
무혁이 재희의 말을 끊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재희는 동작이 멈추며 무혁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도 모르게 뭔가 거슬리게 한 걸까. 무혁이 덤덤한 얼굴로 재희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한식, 양식, 일식, 중식. 뭐가 좋습니까.”
“네?”
“같이 밥 먹읍시다.”
“……저랑요?”
재희가 자신을 가리키며 되묻자 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기다리는 무혁을 보자 재희는 차마 이미 점심을 먹었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야, 양식……이요……?”
결국,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대답했다.
“잠시.”
잠깐 양해를 구한 무혁이 잠시 자리 비우더니 금세 돌아왔다.
“갑시다.”
무혁이 성큼 걸음을 옮겼다. 후다닥 가방을 챙겨 든 재희가 무혁의 뒤를 급하게 쫓아가려다가 발이 엉키며 휘청였다.
“아!”
자기도 모르게 얕은 비명을 지른 재희는 곧 덮쳐올 통증을 대비에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통증은커녕 넘어지려는 몸이 단단한 뭔가에 붙잡힌 듯 허공에 멈췄다.
“……?”
슬며시 뜬 재희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건 허리를 감고 있는 단단하고 커다란 손이었다. 재희가 시선을 올리자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무혁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 재희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 고…… 고맙습니다.”
놀란 재희가 급하게 떨어지려 했지만,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은 무혁의 손은 풀리지 않았다.
“조심.”
무혁이 짧게 말하며 그대로 재희의 허리를 붙잡고 걸음 옮겼다.
“아, 잠깐만요. 무혁 씨. 이 손…….”
무혁의 품에 가둬지다시피 착 붙어서 걸음을 옮기는 재희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코트를 입고 있지만, 벽같이 단단한 그의 몸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쩐지 부끄러워진 재희는 조금 떨어져서 걸으려 했으나, 그에게 붙잡힌 몸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이내 그와 떨어지는 걸 포기한 재희는 무혁을 훔쳐보았다. 인상에 가려져서 그렇지, 객관적으로 무혁이 얼굴은 잘생겼다. 그냥 잘생긴 정도가 아니었다. 시가와 흑백 사진 그리고 야생이 잘 어울리는 그야말로 웬만한 연예인보다 잘생긴 미남자였다. 얼굴선이 거칠긴 하지만, 그 점 때문에 더욱 남자다움이 강조되었다. 짙은 눈썹과 깊은 눈동자 때문에 한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 인상이었다. 햇볕에 탄 그을린 구릿빛 피부는 남성미를 더욱 강조했다. 재혁도 작은 키가 아닌데, 그보다 더 큰 데다 덩치까지 있으니 어쩐지 든든한 기분마저 들었다. 마치 겨울바람을 품은, 서걱서걱하고 건조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 재희에게 무혁은 딱 그런 남자였다. 앞만 보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무혁이 문득 시선을 내렸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란 재희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콩닥콩닥, 100m를 전력 질주한 것처럼 숨이 가빠져 오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허리를 휘감은 그의 손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은근히 싫지 않았다. 재희는 유난히 무혁과 있을 때 평소 하지 않던 실수를 한다고 생각했다.
‘기분 탓일까.’
무혁의 보폭에 맞추느라 거의 경보 수준으로 걷던 걸음이 아까보다 한결 편해져 있었다. 어쩐지 그의 걸음이 느려진 것 같다.
* * *
“여긴…….”
가게 외관을 본 재희가 입을 살짝 벌렸다. 무혁이 차까지 몰고 도착한 레스토랑은 재희도 익히 아는 곳이었다. 6개월 전부터 예약해야만 겨우 식사를 할 수 있는, 거기다 미국 유명한 셀럽들의 SNS에 수시로 등장하는 레스토랑이었다. 해외 방송국에서도 수시로 촬영해갈 정도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셰프가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잘 생기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레스토랑이 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일 년 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멋지기로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건물 외관은 포토존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번번이 예약에 실패했다며 희수가 실망하는 걸 수없이 봐왔기에 그 명성은 재희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유명한 곳에, 심지어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무혁이 데리고 온 것이다.
“들어갑시다.”
놀라서 굳어 있는 재희를 데리고 무혁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명성에 걸맞게 가게 내부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졌다.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과 벽 한쪽 면에 설치된 인공 폭포, 적재적소에 설치된 조명이 흩뿌리는 빛이 마치 전혀 다른 공간에 온 것처럼 멋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 주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훤칠한 서버가 다가와 가림막이 설치된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서버가 물을 따라준 뒤 물러나자, 무혁이 메뉴판을 재희에게 건넸다.
“아, 고마워요.”
재희가 어색하게 메뉴판을 받으며 펼쳤다. 그리고 가격에 경악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메뉴 몇 가지만 시켜도 웬만한 사람들의 한 달 생활비가 사라질 정도로 가격이 비쌌다.
“무혁 씨. 저기…….”
부담스러운 가격에 재희가 머뭇거리자 무혁이 물었다.
“먹고 싶은 게 없습니까.”
“그게 아니라…….”
너무 비싸서 주문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고 재희는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재희는 포기한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무혁 씨 드시고 싶은 거로 드세요.”
“저도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아…… 네.”
무혁은 재희가 메뉴를 결정할 때까지 절대 받지 않을 기세였다. 재희는 머뭇머뭇 다시 메뉴판을 펼쳤다. 재희는 그나마 가격이 저렴한 음식으로 정하고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무혁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서버를 불렀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이 레스토랑에 대해 잘 아는 듯 무혁의 입에선 주문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재희가 벌어지려는 입을 간신히 다물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메뉴를 확인한 서버가 물러나자 계산하기를 포기한 재희가 체념한 듯 물었다.
“무혁 씨. 너무 많이 시키는 거 아니에요?”
동요한 재희와 달리 물수건으로 손을 닦던 무혁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많이 먹는 편입니다.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합니다.”
“아…… 현장이요.”
재희의 걱정은 그게 아니었지만, 무혁은 다른 쪽으로 알아들은 듯하다.
‘그럼 팔의 그 흉터들도 현장에서 얻은 걸까.’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 재희는 막역하게 건축사도 현장에 참여하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 생각하니 무혁의 팔에 난 흉터 자국이 이해됐다. 건물을 올리는 건설 현장은 언뜻 보아도 위험해 보였다. 그런 곳에서 일하니 몸이 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현장은 위험할 것 같아요.”
“안전수칙은 철저히 지키고 있습니다. 직접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기도 하고.”
무혁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완벽주의 성향인가 보다,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그에 대해 알자 궁금증이 생겼다.
“그럼 무혁 씨는 점심으로 주로 뭘 많이 드세요?”
문득 무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것을 본 재희는 순간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처음이었다. 무혁이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설핏 잘생겼지만 무서운 인상 뒤의 온전한 그의 얼굴을 본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카페에서 나올 때처럼 가슴이 다시 한번 격하게 콩닥콩닥 뛰었다.
무혁이 물잔으로 입술을 축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입니다.”
“네?”
“재희 씨가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무혁과 처음 만났을 땐 그에 대해서 대략적인 건 다 듣고 왔었다. 게다가 재희는 선에 흥미도 없었고 선택권이 없었기에 굳이 물어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와 결혼을 하기로 했지만 어쩌면 재희는 그에게 약간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자 재희는 말문이 막혔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무혁의 말투와 표정은 여전히 덤덤했지만 왜인지 기뻐 보였다. 재희가 눈치를 살피는 사이 무혁이 말했다.
“주로 한식을 먹습니다. 든든한 데다가 먹고 나면 포만감을 느껴서 좋아합니다.”
아…… 한식으로 할걸. 마침 희수랑 점심으로 먹은 피자가 생각나서 양식을 말했는데 실수한 것 같았다.
“죄송해요. 제가 잘 몰랐어요. 무혁 씨에게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재희 씨가 미안해할 건 아닙니다.”
딱 잘라 말하는 무혁의 말에 재희가 민망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무혁이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음식은 가리지 않습니다.”
단호한 무혁의 말에 재희는 네…… 자그맣게 대답했다. 테이블에 어색한 공기가 흐르자, 때마침 서버가 주문한 음식을 몇 차례에 걸쳐 서빙해 주었다. 테이블엔 금세 플레이팅이 멋진, 점심으로 먹기엔 과한 음식으로 가득 찼다.
‘정말 이걸 다 먹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