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내가 결혼할 사람2021.11.29.
몸에 꼭 맞는 슈트에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잘생긴 외모의 남자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렸다. 장난스러운 말투와 달리 무혁을 말리는 남자, 한민석의 입가는 억지로 지은 웃음으로 잘게 경련이 일고 있었다.
“강 대표. 장소를 생각해. 여긴 카페야. 응? 자자, 얼른.”
그러나 한민석의 말 따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무혁의 시선은 여전히 박 부장에서 고정되어 있었다. 박 부장은 저를 보는 남자의 흉흉한 눈빛에 사색이 된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무혁의 주먹이 그대로 박 부장의 얼굴로 꽂히려는 찰나 한목소리에 그의 동작이 멈췄다.
“무혁 씨. 사람이…… 많아요.”
재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그만…… 해요.”
재희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무혁과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게 수치스러웠고, 거기에 재혁의 무례함, 카페 안 사람들 이목이 쏠린 게 못내 부담스러웠다. 재희는 수치스러워서 딱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
무혁의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힐끗, 재희를 보더니 주먹을 내렸다. 그러나 아직 박 부장의 멱살은 놓지 않은 상태였다. 제가 뜯어말려도 듣지도 않던 무혁이 한 여자의 말에 순순히 주먹을 내리자 민석이 흥미로운 눈빛을 빛냈다.
“강우진 변호사 불러.”
무혁은 새파랗게 질린 박 부장의 얼굴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광폭하게 몰아치던 흉흉한 눈빛이 사라진 그 자리엔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빛이 대신했다. 무혁의 목소리는 박 부장을 보는 눈빛만큼이나 차가웠다.
“그래, 그래. 우진이 불러줄 테니까 일단 이 손을 놔. 응?”
민석이 거의 애원하듯 말하자 무혁이 박 부장을 집어 던지듯 내려놓았다. 박 부장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소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무혁은 그런 박 부장을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흥분이 가신 그의 시야에 넘어진 희수를 부축하는 재희의 뒷모습이 보였다. 무혁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무혁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숨을 가다듬은 뒤 긴장한 듯, 초조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며 천천히 다가갔다. 무혁이 박 부장을 놓아준 걸 본 재희는 넘어진 희수를 부축하며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다 묵직한 기척과 함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고개를 돌렸다.
“…….”
거칠지만 잘생기고 무서운 그의 얼굴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재희는 저도 모르게 순간 흠칫, 몸을 잘게 떨었다. 무혁은 처음 만났을 때랑 똑같았다. 구겨지고 엉망인 옷차림, 먼지가 잔뜩 묻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몇 번 본 얼굴이지만 여전히 잘생기고 무서웠다. 그러나 그 얼굴마저도 내심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재희는 손에서 느껴지는 악력에 고개를 돌렸다. 무혁을 처음 본 희수가 긴장한 얼굴로 부축한 재희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무혁이 손을 내밀자, 재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그의 손끝을 잡았다. 보드랍고 작은 따뜻한 손이 제 손에 닿자 무혁의 목울대가 한번 크게 울렁거렸다.
“아!”
무혁이 작은 손을 덥석 잡으며 재희와 희수를 가볍게 일으켜 세웠다.
“괜찮습니까.”
거짓말처럼 아까의 흥분이 싹 사라진 침착한 목소리였다. 얼떨떨한 얼굴로 무혁의 손에 붙잡힌 채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고받고 왔습니다. 폭행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는데요.”
그때 신고받은 경찰이 들어오자, 재희의 표정이 희게 질렸다. 무혁이 힐끗, 재희를 보곤 민석에게 다가갔다. 무혁이 뭐라고 하자 이윽고 민석의 멀끔한 얼굴이 잔뜩 구겨지며 한숨을 내쉰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경찰과 몇 마디 나누던 무혁이 다가왔다.
“잠시 다른 곳에 가 있으십시오.”
“네? 무혁 씨는요? 어떻게 하려고요.”
“여기 일을 좀 해결하고 가겠습니다.”
무혁은 재희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성큼 걸음을 옮겨 버린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희수가 읊조리듯 재희를 불렀다.
“재희야.”
“……응.”
“네가 한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맞선남의 외모가 강렬하다는 재희의 말을 떠올리며 희수는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 * * 무혁이 상황을 정리하는 사이 다른 카페에 자리 잡은 재희와 희수, 그리고 재혁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재희는 무혁에게 카페 위치를 알려준 뒤 재혁을 쳐다보았다. 재혁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힐끗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 누나. 아까 그분이…….”
재혁은 제발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되물었지만, 재희는 그 기대를 깨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내가 결혼할 사람.”
“미안…….”
재혁의 고개가 더욱 푹 숙여졌다. 건축학과에 다니는 재혁은 공모전 준비 때문에 재료를 사러 나온 참이었다. 넉넉히 사두었다고 생각했지만 마침 오늘 필요한 재료가 떨어져서 투덜거리며 길을 가다 우연히 재희와 무혁의 모습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 무섭게 생긴 남자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희게 질린 제 누나를 보자마자 재혁은 그대로 눈이 뒤집혔다. 카페에 뛰어든 재혁의 눈엔 바닥에 뒹굴고 있는 박 부장도, 희수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제 누나를 붙잡고 있는 불한당 무혁만이 눈에 들어왔다. 앞뒤 분간 없이 뛰어든 자신 때문에 재희의 입장이 곤란해질 거라 생각하니 재혁은 면목이 없어졌다. 희수가 안쓰러운 눈으로 재혁을 보다 재희에게 눈짓했다. 재희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어.”
“그래도 미안해.”
“나한테가 아니라 그분한테 사과해.”
“응. 그런데 누나. 나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말이야. 그 남자 말이야.”
“응?”
“혹시 그 남자가 운영하는 사무소 말이야.”
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무혁이 성큼 들어섰다. 워낙 키가 크고 몸집이 큰 남자이다 보니 단번에 카페 안의 사람들 시선을 사로잡았다. 덕분에 재혁의 말도 이어지지 못했다. 카페 안을 훑어본 무혁이 곧바로 다가오자 할 말도 잊어버린 채 재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신재혁이라고 합니다. 아까 누나를 도와주신 것도 모르고 정말 죄송합니다.”
상황을 정리한 무혁이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재혁이 고개 숙이며 사과를 했다. 무혁의 덤덤한 시선이 재희에게 닿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듯한 그의 시선에 재희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까 재혁이 멱살 잡은 일로 사과하고 싶다고 해서요……. 미안해요, 무혁 씨.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내 잘못인데 누나가 왜 사과해? 화를 내실 거라면 저한테 내세요. 누나는 잘못 없어요.”
아웅다웅하며 서로 사과하겠다는 남매를 지켜보는 무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무혁의 미간에 내 천(川)자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괜찮습니다.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으니까.”
자신의 외모가 얼마나 오해를 일으키기 쉬운지 무혁 역시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종종 썩 유쾌하지 않은 오해를 받기도 했다. 무서운 인상 때문에 타인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건 익숙한 일이다. 다만 난데없이 나타난 재혁이 우리 누나라면서 친근하게 구는 모습이 거슬렸다. 멱살 잡혔던 그때 재희와 재혁의 사이를 가늠해 보느라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재희가 조금이라도 늦게 동생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면 박 부장과 마찬가지로 재혁의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아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희수라고 해요. 재희의 절친이에요.”
“강무혁이라고 합니다. 재희 씨와 얼마 전에 선본 사람입니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희수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무혁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적당한 높낮이의 목소리, 정중한 말투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무혁을 관찰하던 희수가 씩 웃었다.
“와, 근데 재희가 선봤다는 사실을 오늘 알긴 했지만, 이런 분인 줄 몰랐네요. 진짜 그…….”
적당히 말을 골라내던 희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인상이 깊은 분이시네요. 잘생기기도 했고요.”
“희수야.”
재희가 당황한 눈으로 가볍게 흘겨보자 희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나저나 아까 어떻게 알고 왔어요? 진짜 곤란한 순간이었는데. 진짜 무슨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인 줄 알았다니까요?”
솔직하고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의 희수가 질문했다. 말릴 줄 알았던 재희가 조심스럽게 무혁의 눈치를 살폈다. 온 신경이 재희에게 쏠려있던 무혁과 재희의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 재희가 움찔 놀라며 죄지은 사람처럼 시선을 피하자 무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목이 말랐던지 무혁이 앞에 놓인 커피를 들이켰다. 세 사람의 시선이 크게 움직이는 무혁의 목울대에 집중됐다. 희수가 대박이라며 입 모양을 만들어냈다. 단숨에 커피를 반이나 비운 무혁이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근처 레스토랑 리모델링 공사를 제가 운영하는 사무소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늦은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봤습니다.”
“설마 카페 건너편 그 레스토랑이요?”
무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희수가 입을 가리며 ‘대박’거리며 중얼거렸다.
“거기 레스토랑 셰프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데 정말 거길 리모델링 하고 계셨던 거에요? 거기다 마침 우리 근처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있었고? 세상에. 무슨 운명 같다.”
희수가 호들갑을 떨었지만 재희는 박 부장이 나타나기 전 희수와 했던 대화를 되새겼다. 그땐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영화 같은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런데.
‘정말로 그 레스토랑 리모델링을 무혁 씨가 할 줄이야.’
문득 아까 카페에서의 잔상이 눈앞이 아른거렸다. 페인트와 먼지가 잔뜩 묻은 크고 넓은 등. 온갖 위험에서도 저를 지켜줄 것 같은, 그 어떤 것에도 부서지지도, 갈라지지 않을듯한 든든한 벽처럼 느껴졌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재희는 문득 찌를 듯한 시선에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까. 묵묵히 뚫어져라 쳐다보는 무혁의 시선에 재희가 움찔 놀라며 고개를 기울였다. 조금 면역은 생겼지만 갑자기 무혁과 시선을 마주하면 자신도 모르게 놀라곤 했다.
“무혁…… 씨?”
차분한 얼굴로 쳐다보는 무혁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진득하고 묵직한 그 시선에 묶여 재희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무혁과 시선을 마주치는 재희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재희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재희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무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때 재혁이 조금 흥분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죠.”
“아, 맞다. 나 오늘 회사에 일이 있었어. 미안한데 재희야. 난 이만 일어나야겠다.”
둘의 모습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보던 희수가 재혁의 말을 끊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재희가 화들짝 놀라 희수를 쳐다보았다. 희수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싱글싱글 웃으며 재혁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재혁이, 너도 할 일이 있다며.”
“뭐?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무슨 할 일 있다고 그래? 아니, 그보다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했잖아. 재혁아?”
재혁의 팔을 꽉 잡으며 희수가 이를 악물고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기가 막혀 재혁이 입을 벌렸다. 희수가 눈짓으로 무혁을 가리키자, 재혁이 박 깨지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 끄덕였다.
“아아, 그러고 보니 할 일 있었다. 미안해. 누나. 나머진 집에서 얘기해.”
“재혁아. 잠시만.”
“그럼 재희야. 나중에 보자. 데이트 잘하고.”
“희수야!”
당황한 재희가 붙잡기도 전에 두 사람은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단둘이 남게 되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