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나랑 선봤던 분이야2021.11.25.
갑자기 희수가 화제를 전환했다. 성격 급하고 빠릿빠릿한 희수는 대화의 화제 전환도 빨랐다. 그 흐름을 쫓아가기엔 재희의 성격은 느린 편이었다. 미처 그 흐름을 쫓아가지 못한 재희가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응?”
“박 부장. 그 자식 말이야. 개차반 주제에 너한테 찝쩍거리던 놈.”
“아…….”
입가의 미소가 사라지며 재희의 표정이 굳었다. 박 부장은 재희가 회사 다닐 때 그녀에게 치근덕거리던 타 부서의 부장이었다. 박 부장은 행실이 좋지 않아 직원들이 기피 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너 퇴사하고 나서 그 못된 버릇 어디 버리지 못하고 새로 입사한 대표의 사촌 동생에게 똑같은 짓 했다가 쫓겨났잖아. 업계에 소문이 쫙 나서 재취업을 못 하고 있다고 하더라.”
“그래?”
명문대학교에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한 뒤 취직한 첫 직장이었다. 업계 특성상 야근과 철야가 많았지만, 그래도 재희는 일하는 게 좋았다. 집에 있는 것보다 회사에서 밤새우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적어도 일할 때만큼은 재희는 밝은 얼굴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디 계집애가 함부로 밤늦게 돌아다니냐는 할머니의 반대와 박 부장의 성희롱으로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안 희수가 죽여버리겠다며 날뛰는 걸 재희가 막느라 진땀을 뺏었다. 재희가 퇴사한 뒤 새로운 직원이 입사했다. 그 직원은 대표의 사촌 동생으로 박 부장은 그래왔던 것처럼 찝쩍거리다가 제대로 걸린 것이다. 직원은 곧바로 대표에게 말했고, 그걸 디딤돌 삼아 여직원들이 적극적으로 그간의 박 부장이 했던 짓을 폭로했다. 그 결과 인사위원회에 회부된 박 부장은 해고되었다.
“내가 그거 듣고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하필 대표 사촌 동생에게 그럴 게 뭐냐고. 인과응보는 있다니까.”
음흉하고 번들번들한 눈으로 그윽하게 바라보며 두툼한 손으로 칭찬이랍시고 어깨를 두른다거나, 허리를 만지는 둥 그런 더러운 행위를 떠올리자 소름이 돋았다.
“그러게. 나도 적극적으로 신고해 볼 걸 그랬다. 그랬으면 속이라도 시원했을 것 같은데.”
재희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희수는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에 재희가 어두운 표정을 지우고 애써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넌 그런 소리 어디서 들었어? 회사에 아는 사람 있었던 거야?”
“그 대표 사촌 동생이 내 친구의 친구 동생이거든.”
“그렇구나. 세상 좁다.”
커피잔에 시선을 내린 재희를 보며 희수가 끙, 귓불을 만지작거리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기, 재희야. 미안해. 난 그저 널 괴롭힌 박 부장 새끼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 주고 싶었어. 인과응보는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서. 혹시 내가 안 좋은 기억을 꺼내게 한 거라면…….”
3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의 막내딸인 희수는 거침이 없었다. 가끔 그 성격 때문에 곤란한 적은 있었지만 재희는 희수를 미워할 수 없었다. 희수는 널 괴롭힌 박 부장 인생이 망했으니, 인제 그만 그 일은 털어내길 바란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니야. 고마워. 희수야. 네 말대로 가끔 생각나서 힘들었거든. 벌을 받았다니 속은 시원해.”
진심이었다. 그렇게 퇴사한 뒤, 재혁이 누나하고 부르며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심하게 놀란 적이 있었다. 안색이 파랗게 질린 재희를 보며 재혁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집에 알릴 수 없었고, 가끔 깜짝 놀라 한밤중에 일어난 일도 있었다. 그때 그 악몽을 떨쳐내기 위해 재희는 수많은 밤을 악몽과 싸워야 했다. 아직도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박 부장이 벌을 받았다고 하니 속은 시원했다.
“다행이다. 앞으로 박 부장 같은 놈은 안 만났으면 좋겠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희수가 그 말을 내뱉자마자 꺼림칙한 목소리가 두 여자 사이를 갈랐다.
“어? 이게 누구야. 우리 이쁜 재희 씨 아니야?”
등 뒤에서 들리는 탁한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묻어나왔다. 순간 재희의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안색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희수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진 것도 그와 동시였다. 꿈에서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탁하고 끈적한 목소리. 재희가 뻣뻣한 고개를 억지로 돌리자 공사장 먼지가 잔뜩 묻은 옷을 입은 박 부장이 능글맞게 웃으며 서 있었다.
“그 표정은 뭐야, 재희 씨. 나랑 오랜만에 만났는데 안 반가워?”
못 본 사이 살이 더 찐 박 부장의 배는 옷이 팽팽할 정도로 튀어나와 있었다. 희게 질린 재희가 엉거주춤 일어나 뒤로 물러서려 하자, 박 부장이 재희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박 부장이 눈이 부라려지며 희번덕거렸다.
“뭐야, 재희 씨. 그 눈은. 내 딴엔 반가워서 인사한 것뿐인데 사람 기분 나쁘게 왜 그런 눈으로 봐?”
“무슨 짓이야!”
빠르게 다가온 희수가 박 부장의 손을 떼어 놓으려 했다. 그러나 힘이 어찌나 센지 희수가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박 부장의 투박한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건 또 뭐야 하는 표정을 한 박 부장의 번드르르한 기름 낀 얼굴이 소름 끼쳤다. 박 부장이 치근덕거리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르며, 재희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도망쳐야 해.’
이 손을 떨치고 벗어나야 한다고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울려대고 있었지만, 이미 뇌의 통제를 벗어난 듯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작은 소란에 카페 안의 사람들 이목이 쏠렸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어떤 손님이 어딘가로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언뜻 귓가에 경찰서라는 단어가 재희의 귀에 스치듯 닿았다. 재희의 안색이 더욱더 새하얗게 질렸다. 혹시라도 할머니 귀에 이 일이 귀에 들어가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재희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 이거…….”
“그 더러운 손 안 놔? 재희 손 안 놓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재희 말이 채 끝맺기도 전에 희수가 소리치며 박 부장의 손등을 손톱으로 긁었다. 박 부장의 눈에 불꽃이 튄 것도 동시였다. 박 부장이 희수를 뒤로 밀치자, 희수가 악 소리 내며 뒤로 넘어졌다.
“……!”
재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뭐라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희수에게 괜찮냐고 묻고 싶고, 도와 달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목구멍에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다.
“재희 씨. 내가 뭐 나쁜 짓이라도 해? 그 눈은 뭐냐고. 기분 더럽게. 아니면 지난 일로 이러는 거야? 이야, 재희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뒤끝 심하다, 엉?”
“이, 이거 놔요. 할 이야기 없어요.”
재희가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박 부장은 아귀에 힘을 더 가했다. 그대로 끌려가나 싶었는데 순간 재희 손목에 압력을 가하던 힘이 사라졌다. 동시에 샌드백을 후려치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우당탕 요란하게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식하기도 전에 재희의 시야를 커다란 벽이 가로막았다.
“아.”
벽이라 생각했던 건 다름 아닌 페인트 자국이며 먼지며 잔뜩 묻은 옷이었다. 놀라 동그래진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뿌옇게 앞을 가리던 눈물이 걷히고 또렷해진 시야에 재희를 완전히 가리고 남을 정도로 커다란 덩치, 힘줄이 튀어나오도록 꽉 쥔, 위협적이고 커다란 주먹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재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무혁 씨?”
박 부장이 욕설 내뱉으며 뭐라고 하는 소리 따위 들리지 않았다. 재희가 얼떨떨한 얼굴로 무혁을 올려다보았다. 무혁이 고개를 살짝 틀어 돌아보자 호텔 라운지에서 봤던 때와 똑같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진중한 눈이 보였다. 잠시간 재희와 시선을 마주치던 무혁이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까?”
잔뜩 화가 난 듯 꽉 눌린 목소리에 재희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여긴 어떻게…….”
어설프게 서 있는 재희를 빠르게 훑어본 무혁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무혁이 재희의 손목을 낚아챘다.
“무혁 씨!”
깜짝 놀란 재희가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무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니트 사이로 드러난 가느다란 손목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한 줌도 안 되는 가느다란 손목엔 박 부장의 빨간 손자국이 여린 피부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난감한 얼굴로 뭐라 말하려던 재희가 무혁의 표정을 보곤 흠칫 놀라 뻣뻣하게 굳었다. 무참하게 일그러뜨린 무혁의 얼굴은 처음 봤을 때보다 더 험악했다. 마치 사나운 짐승을 목전에 둔 것처럼 그의 기세는 누구 하나라도 죽일 듯 사나웠다. 처음 보는 그 모습에 재희가 질린 얼굴로 얼어붙었다.
“이게…….”
“누나!”
무혁이 으르렁거리며 뭐라 말하려던 찰나, 갑자기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재희가 흠칫 놀라 돌아보자, 재혁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카페로 들이닥쳤다. 재혁의 시선이 빠르게 재희와 무혁을 훑었다. 재혁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아…….’
보나 마나 오해를 하고 있을 재혁을 보는 순간 재희는 난감해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다가온 재혁이 다짜고짜 무혁의 멱살을 잡았다.
“너 뭐야! 넌 뭔데 우리 누나 손을 잡고 있어!”
난데없이 멱살 잡힌 무혁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었다.
“누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이 새끼가 누나한테 무슨 짓 했어? 설마 맞았어? 그랬어?”
저보다 더 키가 크고 덩치가 큰 무혁의 멱살을 단단하게 움켜쥐며 재혁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무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혁의 인내가 여기까지임을 직감적으로 눈치챈 재희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혹시라도 재혁이 저 손에 맞는다면!
“그런 게 아니야, 재혁아. 오해야. 일단 그 손 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선. 말해봐, 누나. 이 자식이 무슨 짓 했어? 설마 협박받은 거야?”
오해라며 재희가 고개를 붕붕 휘저었지만, 눈이 뒤집힌 재혁의 눈에 그런 건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야, 재혁아. 내 말 좀 들어 봐!”
“듣긴 뭘 들어! 걱정 마, 누나. 다시는 누나 눈에 띄지 않게 오늘 단단히 손 봐줄 테니까!”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한가롭고 조용했던 카페 안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됐다. 재혁이 무혁에게 주먹을 날리기 위해 팔을 치켜들자, 재희가 다급하게 무혁의 손에서 손목을 빼냈다. 의외로 쉽게 무혁이 손을 놔주자, 재희가 재혁의 팔에 매달렸다.
“그만둬, 재혁아! 이분은 나랑 선봤던 분이야!”
재혁의 동작이 뻣뻣하게 멈췄다.
“뭐?”
“그러니까 빨리 그 손 내려!”
재혁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재희와 무혁을 쳐다봤다. 이 잘생긴 조폭 같은, 아니 한 마리의 흉포한 짐승 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누나와 선을 본 상대라는 소리에 혼란스러운 듯 재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알아들었으면 얼른 그 손 놔.”
재희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말하자, 무혁의 멱살을 쥔 재혁의 손에 힘이 풀렸다.
“미안해요. 무혁 씨. 제 동생인데 오해했나 봐요.”
재희가 대신 사과를 하던 그때 끙, 박 부장이 앓는 소리를 냈다. 순간 무혁의 커다란 몸이 날쌔게 움직이더니, 나동그라진 박 부장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박 부장의 형편없는 몸뚱이가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무혁이 주먹을 치켜들자 어디선가 한 남자가 다급하게 뛰어와 그의 팔을 잡았다.
“강 대표. 진정해, 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