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그 쇠사슬 한번 끊어보려고2021.11.22.
확실히 기억했다. 그때 그림을 그리면서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어설프게 그린 그림이었지만 끓던 속이 진정되었고 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 재희의 무채색 세계에 색깔 하나가 톡, 하고 떨어진 작은 사건이었다. 처음으로 집에 미술을 전공하고 싶다고 용기 내어 말을 꺼냈다. 그때 할머니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고, 그 어느 때보다 심한 폭언을 들었다. 그때 마침 퇴근한 신채근이 이야기를 듣고는 미술 하는 걸 허락해 주었다. 다른 건 다 욕심부리지 않고 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림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따가운 시선을 감내하며 재희는 세상에 그거밖에 없는 것처럼 처절하게 매달렸다. 재희가 입시 미술에 매달리고 노을 서점의 주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자연스럽게 그 사람과 만날 일도 없어졌다. 감사하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못 한 채 헤어진 그 사람이 가끔 생각이 났다.
“결혼해서도 계속 그릴 수 있을 거야. 적어도 지금보단 나을 테니까.”
그 사람으로 인해 시작한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었다. 그림은 재희가 유일하게 숨을 틔우는 수단이었다. 그 사람을 생각하던 재희는 문득 무혁을 떠올렸다. 무혁은 말도 없고 얼굴은 무서웠지만, 강압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재희가 원한다면 묵묵히 들어줄 듯한 그 남자. 이상했다. 그저 잠깐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 것뿐인데 어느덧 아래로 휘어져 있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재희는 스케치북을 내려놓고 장롱을 열어 가방을 넣어둔 상자를 꺼냈다. 가방을 꺼내 금박 부분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재희는 그날 일을 떠올렸다. 그 남자와 함께 백화점 앞에서 발레파킹 서비스를 기다리며 눈이 내리는 회색빛 도시의 하늘을 올려봤었다. 재희의 몸을 가리고도 남을 만큼 장신에 커다란 덩치와 무서운 인상, 거기에 걸맞은 심줄이 올라온 커다랗고 따뜻한 손. 검은색 코트가 유난히도 잘 어울리던, 거친 짐승에 가까운 이미지의 말이 없던 남자.
“상견례 전에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재희는 무혁과 한 번 더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 * * 친구 희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카피라이터인 희수는 바로 얼마 전까지 프로젝트에 쫓기고 있었다. 그 시기의 희수가 얼마나 예민한지 잘 아는 재희는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다. 두문불출하던 희수가 지옥 같은 프로젝트가 끝났다며 한 달 만에 연락해온 것이다.
“재희야, 여기!”
오랜만에 만난 희수는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지만, 프로젝트를 끝낸 자의 자유와 즐거움이 얼굴 가득 번져 있었다. 희수가 꼭 가보고 싶다고 했던 맛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카페에 들어갔다. 거기서 재희는 희수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뭐? 결혼? 네가?”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진리다. 카페인은 나의 생명수다. 외치며 머리가 찌릿 울릴 정도로 단숨에 커피를 마시던 희수가 경악한 얼굴로 재희를 쳐다보았다. 반면 그녀를 경악시킨 재희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곧 상견례 날짜가 잡힐 것 같아.”
“갑자기? 왜? 누구랑? 언제부터! 아니, 아니 그보다 너 나 모르는 새 연애했어?”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뭐야, 이것아. 내가 프로젝트에 죽어가는 동안 대체 무슨 재미있는…… 아니 일이 있었던 거야?”
정희수는 재희의 절친한 친구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짝이 된 것으로 희수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소심한 재희와 활달한 희수는 성격은 정반대였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을 정도로 절친한 친구였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만큼 희수는 누구보다 재희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희수는 언제든지 가출하게 되면 자기 집으로 오라며 격려하기도 했고 재희 대신 화를 내주기도 했다. 그런 소중한 친구에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재희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윽고 재희는 따뜻한 머그잔 테두리를 검지로 쓸며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선을 봤거든.”
“선?”
“응. 할머니가 보라고 해서…… 그렇게 됐어.”
“재희 너, 결혼하고 싶었어?”
“그런 건 아니고…….”
답답한지 희수가 가슴을 콩콩 두들겼다.
“이 답답아. 싫다고 해야지.”
“희수야.”
“야, 신재희. 너 이제 28살이야. 결혼하기엔 이른 나이라고. 할머니 때문에 너 직장도 그렇게 그만뒀는데, 결혼까지 할머니 손에 휘둘릴 참이야? 아, 진짜. 재희야, 그냥 눈 딱 감고 내가 싸워줄까? 네가 허락하면 나 잘할 수 있는데. 싸워 줘?”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대신 화내주는 희수를 보며 재희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재희는 이래서 희수가 좋았다. 가슴 속에 담아두고 차마 꺼내지 못하는 속마음을 희수가 대신 기가 막히게 말해 주어서 속이 시원했다. 희수가 진정할 때까지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던 재희가 입을 열었다.
“난 괜찮아. 희수야.”
“뭐가 괜찮다는 거야?”
“사실은 할머니가 그 남자 눈에 들지 못하면 집에서 쫓겨날 줄 알라고 하셨거든.”
“……허, 나 참. 별 미친.”
희수가 기가 막힌 듯 얼음을 우적 씹었다.
“맞선이 잘 안 돼서 집에서 쫓겨나거나, 결혼해서 집에서 벗어나거나…… 둘 중 하나밖에 선택이 안 되는 상황이었어. 근데 막상 만나보니까 그 남자 괜찮은 것 같아.”
“야, 신재희.”
“네가 언젠가 그랬잖아. 내가 쇠사슬에 발이 묶인 코끼리 같다고.”
“…….”
“그래서 그 쇠사슬 한번 끊어보려고.”
“재희야…….”
“나, 억지로 결혼하는 거 아니야. 팔려 가는 거 아니야. 내가 결혼하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희수야.”
조금 전까지 화내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가슴이 먹먹한지 재희를 보는 희수의 눈가가 붉어졌다. 결혼 문제까지도 할머니에게 휘둘리는 재희가 안쓰러운 모양이었다. 희수는 털털한 성격과 다르게 마음이 여리고 감수성도 풍부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쉽게 동화되어 웃음도 눈물도 잘 흘리는 친구. 항상 재희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줄 줄 아는 친구. 그게 희수였다.
“바보 같은 계집애야. 내가 항상 말했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으면 짐 싸서 우리 집에 와. 언제든지 받아 줄 테니까.”
“고마워. 희수야.”
“빈말 아니야. 내가 뭐 너 하나 책임 못 질 것 같아? 나 이래 봬도 능력 있다?”
재희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재희를 밉지 않게 흘겨본 희수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어떤 사람이야? 잘생겼어?”
“응?”
“너랑 선본 남자.”
“아…….”
재희가 미지근해진 컵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강렬한 인상과 백화점 앞에서 같이 첫눈 봤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재희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남자 같아. 외모가 좀…… 많이 강렬하지만.”
“그게 뭐야. 잘생겼다는 거야, 아니란 거야.”
“으음…… 그냥 강렬해. 한 번 보고 나면 쉽게 잊힐 수 없는 사람이야.”
재희의 미묘한 말에 희수가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더 궁금해 미치겠네. 그럼 하는 일은 뭔데?”
“건축사. 지금 건축사 사무소를 운영한대. 꽤 잘 되고 있나 봐.”
“건축사라. 거기 완전 남초인데…… 괜찮아? 성격 거칠진 않고?”
재희는 카페에서 처음 만난 무혁을 다시금 떠올렸다. 먼지가 잔뜩 묻은 옷과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단번에 들이켜던 모습. 확실히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거기다 자기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남자. 재희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르려는 입가를 지그시 눌렀다.
“행동만 거친 것 같아. 그리고 머리가 좋은 것 같은데…… 또 의외로 단순한 것 같아.”
외모가 강렬하고 행동이 거칠다. 머리는 좋은데 단순하다. 근데 좋은 사람 같다. 희수는 점점 더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게 뭐야. 정말 괜찮은 남자 맞아?”
“응. 좋은 남자야. 나중에 정식으로 소개해 줄게. 그럼 내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거야.”
“그래…… 뭐. 나중에 내 눈으로 확인해 보도록 하고. 건축사면 저것도 하려나?”
희수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 돌리자 창밖으로 한창 공사 중인 건물이 보였다. 건물 벽에 리모델링 중이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원래 작은 가게였는데 입소문 타면서 유명해진 프렌치 레스토랑이거든. 내부가 좁아서 하루에 몇 팀만 예약받고 그랬어. 너랑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못 갔는데…… 아무튼 저기 네가 말한 맞선남이 맡아서 리모델링하고 여기서 마주치면 대박이겠다.”
“설마.”
재희는 그런 우연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면서도 재희의 시선이 한창 리모델링 중인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희수 말대로 무혁이 저 레스토랑 리모델링을 맡고 있고 여기서 만난다면 어떨까. 그때도 먼지 잔뜩 묻은 모습일까. 아니면 깔끔한 모습일까. 깔끔하게 슈트를 입고 코트 걸친 모습도 꽤 근사했는데……. 무혁의 일하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이런저런 궁금증이 일면서 문득 그를 떠올리자 재희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희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재희의 팔을 콕콕 찔렀다.
“우리 신재희 씨. 이 미소는 뭐지? 그 맞선남 생각하는 거야?”
재희가 얼른 볼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정말 아니야?”
“응. 정말.”
얼마간 기분 좋은 웃음이 이어졌다.
“그거 알아, 재희야? 노을 서점. 최근에 가끔 문 열기 시작한 거.”
재희는 귀가 번쩍 뜨일만한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서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익명의 사람이 그 서점 사들인 뒤로 한 번도 문 연 적이 없었잖아. 아직 영업은 안 해도 뭔가 하는지 불이 켜지고 있다더라.”
몇 년 전 노을 서점 주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익명의 사람이 노을 서점을 사들였다. 사람들은 청계천과 함께 세월을 견뎌온 노을 서점이 이대로 사라지나 싶어서 안타까워했지만, 새로운 주인은 노을 서점을 허물지도, 운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 후 몇 년간 굳게 닫혀 있던 노을 서점이 최근 가끔 문을 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럼 그 서점은 어떻게 되는데?”
“글쎄. 아직도 새 주인이 누군지 아무도 모른대. 계약할 때도 대리인이 왔다나. 가끔 사람이 드나드는 걸 보면 조만간 가게 문을 열 것 같기도 한데 아직 아무것도 알려진 게 없어서.”
마음에 꼭 들어 재희와 함께 서점에 종종 놀러 가던 희수는 주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문을 닫자 크게 아쉬워했었다. 주인이 바뀐 뒤로도 몇 년간 굳게 닫혀 있던 노을 서점이 다시 문을 열지도 모른다니. 다시 노을 서점에 갈 수 있을 거란 희망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행이다.”
“그치? 이왕 열 거면 빨리 열어줬으면 좋겠어. 거기 재밌는 책이 많거든.”
아쉬운 듯 희수가 투덜거렸다. 재희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너 그거 알아? 그 자식 회사에서 쫓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