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우리 결혼해요2021.11.18.
남자의 눈빛이 너무나도 진중하고 올곧아서 조금 전 질문한 자신이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는 어느새 미지근해졌다.
“전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이게 맞는 건지. 사실 집안에서 주선한 자리인 만큼 무혁 씨의 신상 정도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뿐이죠.”
“…….”
“무혁 씨도, 저도 서로 잘 모르니까 몇 번 본 거로 결혼을 결정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문득 의문이 생겼다. 선 자리가 파투나도 정말 집에서 쫓겨날지도 미지수였다. 모르긴 몰라도, 아버지나 재혁을 위해서라면 할머니는 재희를 결혼 시장에 던져놓고 계속해서 선 자리에 내보낼 위인이었다. 계속해서 선 자리를 파투 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리저리 물건처럼 선 시장에 던져졌다가, 팔려 가겠지.
‘어쩌면 이 남자가 내 발에 묶인 사슬을 끊을 계기가 될지도 몰라.’
언젠가 책장 뒤 얼굴 모르는 친구가 제게 ‘그림’을 알려준 것처럼 이 남자도 갑갑한 그 집에서 나올 탈출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이 남자와의 결혼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어차피 해야 할 결혼이라면 망설임 없이 거침없는 이 남자가 괜찮을 것 같았다. 만약 맞선 시장에 던져졌을 때 이 남자보다 더 나은 상대가 나올지도 미지수였다. 재희는 일생일대의 도박을 한번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굳혀가도 일말의 망설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재희가 머뭇거릴 때 무혁을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합시다.”
“……?”
어리둥절한 얼굴의 재희를 보며 무혁이 말을 이었다.
“일 년만 같이 삽시다.”
“네?”
재희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농담하는 거냐는 듯 재희가 쳐다보았지만, 무혁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하다.
“혼인 신고는 하지 않고 일 년 동안 같이 살아보고 결정하는 건 어떻습니까.”
“…….”
재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결혼이 쉽지 않다면서 결혼하자고 하고 제가 응하지 않으니 이젠 조건까지 거는 남자.
“왜…… 왜 이렇게까지 저와 결혼을 하려는 건가요?”
무혁은 재희와 만나고 나서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남자가 이러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뭘 보고 자신과 이토록 결혼하려는 걸까. 무혁이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재희가 말을 이었다.
“저, 무혁 씨가 생각하는 만큼 좋은 여자가 아닐 수도 있어요. 사치를 좋아할 수도 있고요.”
재희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무혁 씨를 이용해 내 잇속만 챙기는 여자일 수도 있어요.”
죄책감에 끝말을 흐리며 재희는 남자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창밖 세상은 여전히 황량하고 건조하다. 거기에 잿빛 구름이 잔뜩 깔린 하늘은 땅으로 꺼질 듯 무겁게 내려앉았다. 재희는 그 풍경이 마치 제 세상 같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무관심과 할머니의 모진 소리를 마음에 두지 않기 위해 재희 스스로 세상을 잿빛으로 바꾸어 놓았다. 생채기가 나도 티가 나지 않도록. 마치 이 겨울처럼. 대신 일부러 감춰놓은 세계를 재희는 그림에 담았다. 온전한 세상의 색채를 잃고 싶지 않은 그녀만의 작은 발버둥이었다. 재희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곧 여자의 공허한 시선이 남자에게 닿았다. 남자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재희의 동공이 약하게 흔들렸다.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여자에게 향해 있었다. 아까와 다른 황량한 겨울 따위 모조리 태워버릴 듯한 강렬한 시선. 재희는 그 시선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욕심. 갈망. 그리고…… 닿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 남자의 표정은 덤덤했으나 그 눈동자에 타오르는 온갖 감정은 여자를 단단하게 사로잡았다. 여자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두근거렸다. 누군가가 이토록 자신을 갈망했던 적이 있던가. 재희는 흐트러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없었다.
“상관없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남자의 입술이 열리며 한 치의 흔들림이 없는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치해도 좋고, 저를 이용해도 좋습니다.”
“……무혁 씨.”
“재희 씨가 그 어떤 여자라 해도 내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후회할 텐데요.”
“후회할 선택은 하지 않습니다.”
테이블 밑으로 재희는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확신에 찬 남자의 말에 아까보다 더욱 심장이 격하게 요동쳤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남자는 단단한 벽 같았다. 밀어내려고 해도 굳건히 버티며 밀어지지 않는 남자. 자신의 선택에 물러섬이 없는 남자. 아이러니하게도 재희는 그 모습에서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 한쪽 구석에서 옅게 피어오르는 기대감.
‘……어쩌면.’
가지고 싶었던 가족이란 울타리를 이 남자는 튼튼하게 잘 지어줄 것 같았다. 같이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며 시간과 추억을 쌓아나가다 보면 어느 틈엔가 잿빛 세상이 조금은 다양하고 풍성한 색채로 넘실거리지 않을까. 이 남자라면 그렇게 해 주지 않을까.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겼다.
“좋아요.”
재희는 남자에게 끌려 들어가듯 저도 모르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결혼해요.”
담백한 대답에 덤덤했던 무혁의 표정이 순간 안도감에 흐트러졌으나, 재희는 가쁘게 뛰는 심장과 강렬한 무혁의 시선의 여운에 눈치채지 못했다. 그날 딱 두 번 만난 무혁과 재희는 결혼하기로 했다. * * *
“강진 회장님 댁에서 연락이 왔다. 결혼 진행해 보자고 하더구나.”
아침 식사 자리에서 신채근이 입을 열자 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 재혁이 대번에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요? 진짜 그러재요?”
“그럼 거짓말이겠냐.”
신채근이 혀를 차며 대꾸했다. 재희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던 할머니가 심통 맞게 말했다.
“저것이 쓸모가 있을 때도 있구나.”
“어머니.”
신채근이 나지막하게 불렀으나, 할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 아범아. 앞으론 어떻게 할 거냐.”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상견례 자리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그쪽에서도 그러길 원하고요.”
자신의 상견례 이야기를 하는 거였지만, 재희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들렸다.
“그나저나 너 그 그림 나부랭이 언제까지 할 거냐?”
한 번도 재희에게 시선을 주지 않던 할머니가 대뜸 물었다. 남의 일인 양 불편한 속내를 감추고 담담한 얼굴로 식사에 집중하던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눈을 내리깔았다. 어릴 때 어디서 계집애가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냐며 호되게 혼난 뒤로, 재희는 할머니와 시선을 잘 마주치지 못했다.
“얼마 벌지도 못하는 그딴 일 그만두고 우리 예비 사위 내조나 하거라.”
할머니의 타박에 목에 모래가 걸린 것처럼 서걱거린다. 재희는 못 들은 척 물을 마셨지만, 서걱거리는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여자란 자고로 조용히 내조나 하는 게 최고의 덕목이고 삶이야. 남편이 잘되어야 가정이 평탄한 법이다. 되지도 않는 그림 나부랭이 그린답시고 가정을 소홀히 하면 못 쓰는 법이야. 그리고 나나 네 아비 얼굴에 먹칠하면 안 된다.”
“……네.”
“내 네가 미술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앞으로 들어간 돈을 재혁이한테 썼으면 재혁이는 더 좋은 대학 갈 수 있었을 거야.”
재혁은 할머니의 기대가 버거운 나머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방황했었다. 그 기간이 길어져 고3 때까지 이어졌고, 결국 재혁은 할머니가 기대한 S 대학교에서 떨어졌다. 그래도 기본 머리는 좋은지라 S대 못지않은 좋은 대학에 입학했으나 할머니 마음에 차지 않았다. 할머니는 재수를 권유했고, 재혁은 단식까지 해가며 재수를 거부했다. 귀한 손주가 밥까지 굶어가며 거부하니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포기했지만, 대신 재혁이 S대에 가지 못한 이유를 모조리 재희 탓으로 돌렸다.
“……죄송해요.”
재희는 그 사실을 입 밖에 꺼내는 대신 습관처럼 죄송하다고만 했다. 그게 조용히 넘어가는 방법임을 재희는 오랜 시간 몸으로 체득해 알고 있었다. 숟가락을 입에 물고 눈치 보던 재혁이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밥만 퍼먹었다. 식사를 겨우 마친 재희는 불편한 명치 부분을 꾹 누르며 방으로 돌아왔다.
‘답답해.’
이 집에서 유일하게 안락한 공간인 자신의 방을 돌아보며 재희는 컴퓨터를 켰다. 이메일을 열자 전 회사의 팀장이 보내준 작업 의뢰서가 들어와 있었다. 내용을 확인한 재희가 구상 도안을 그리기 위해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 들었다. 바지런히 그림을 그리던 재희의 손이 멈췄다.
‘결혼해도 이 일 계속할 수 있을까.’
늘 집 안에서 숨죽이며 살아온 재희는 하고 싶은 걸 한 적이 별로 없었다. 재희는 어느 것에도 욕심내지 않았다. 집에선 성적 상위권을 원했기에 늘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해서 전교 5등 안 성적을 유지했다. 집에서 하지 말라면 하고 싶은 일도 하지 않았고, 하라면 싫은 일도 군말하지 않고 했었다. 늘 숨이 막혔고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해소할 방법을 몰라서 속이 끓었다.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겨울. 재혁의 일로 쫓겨나듯 집에서 나와 거리를 방황하던 재희가 발길 닿는 대로 가다 보니 도착한 곳이 바로 노을 서점이었다.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낡디낡은 작은 서점. 노을 서점 앞에서 서성이는 재희를 맞아주던 선한 인상의 주인 할아버지. 주인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었을 뿐이다. 그때 닿은 연 이후로 속이 답답하고 울렁거릴 때마다 습관처럼 가던 노을 서점이었다. 노을 서점은 포근하고 아늑해서 힘든 마음이 스르륵 풀리는, 재희에겐 마법 같은 장소였고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날도 15살의 재희는 하교하자마자 노을 서점으로 향했다. 겨울의 칼바람을 뚫고 간 노을 서점은 여전히 아늑했다. 주인 할아버지는 마실을 나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훈훈한 공기와 오래된 나무와 낡은 책 냄새. 포근하고 익숙한 그 냄새를 맡으며 재희는 늘 앉았던 책장에 무릎을 모으고 기대앉았다. 책장 너머에는 항상 그 사람이 있었다. 재희가 언제 오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그 사람. 그리고 책장 너머 있을 그 사람을 향해 재희가 말했다.
“……저 왔어요.”
처음 노을 서점에 오게 된 날, 그 사람이 건넨 피자 한 조각으로 시작된 인연.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아무도 모르는 재희만의 비밀스러운 친구. 책장 뒤 그 사람은 말수는 적었지만, 묵묵히 재희의 말을 들어주었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있으면 그 사람은 물 한 잔, 우유 한 잔, 쿠키 하나 등 소소한 걸 건네주었다. 백 마디 말보다 그 사람의 말 없는 위로가 더없이 따뜻했다. 그날은 유난히 더 힘든 날이었던 것 같았다.
“전 겨울이 싫어요. 춥고 삭막하고 건조하고. 내 세상 같잖아요.”
“…….”
“내 세상이 조금 더 밝고 따뜻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큰 욕심인 걸 알아요. 그래도…… 그냥 그랬으면 좋겠어요.”
평소 힘들다고 말을 하지 않던 재희가 자기도 모르게 그냥 툭, 던지듯 무심코 말을 꺼낸 걸 보면. 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무 바닥에 종이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책장 너머의 그 사람이 종이 한 장과 연필을 밀어주고 있었다. 재희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런 그녀의 모습이 보이기라도 한 듯 그 사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그려 봐. 네가 원하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