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결혼이 쉬운가요2021.11.15.
[삼 일 뒤에 봤으면 해요. 처음 만났던 그 호텔 그 스카이라운지에서 오후 3시에요.]
재희의 메시지를 확인한 무혁은 답장을 보낸 뒤 휴대 전화를 내려놓았다. 재희와 헤어진 뒤 곧바로 사무실에 온 무혁은 급하지도 않은 일을 처리했다. 그러다 저녁 식사 시간을 피해 잠시 숨 돌릴 시간까지 정확하게 계산한 뒤 재희에게 겨우 보낸 잘 들어갔냐는 메시지 한 통. 비록 용건만 간단히 오간 대화였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간 무혁은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불 꺼지지 않은 오피스타운 전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을 응시한다. 선볼 때와 다름없는 먼지 묻은 셔츠, 흐트러진 머리. 주름 잡힌 미간, 표정이 보이지 않는 얼굴. 무혁은 제 모습이 다른 이에게 위협적으로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신경 쓰고 갔었을 텐데.”
처음엔 내키지 않는 선 자리였다. 지독한 워커 홀릭인 무혁에게 맞선 자리는 시간 낭비, 그 자체였다. 좋은 조건의 맞선 자리가 들어와도 몇 번이나 고사했었고 부모님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나이 서른셋. 결혼하기에 많은 나이가 아니지만, 자식에겐 무관심해도 사회적인 시선에 민감한 부모님은 은근히 속이 탔던 모양이다.
“언제까지 일만 하고 살 거니? 한 번 나가보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니. 내 얼굴 봐서라도 얼굴만이라도 비추고 와.”
갑자기 회사로 찾아온 어머니는 3일 만에 보는 아들에게 잘 지냈느냐, 안부 인사도 하지 않고 맞선 이야기부터 꺼내 들었다. 무혁은 맞선도, 결혼도 모두 회의적이었다. 기대가 없고 시간 낭비라 생각하니 장소도 적당히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곳, 시간도 딱 차를 마실 시간만 잡았다. 한 시간. 딱 한 시간만 버린다는 생각을 가졌다. 맞선 자리 가기 직전까지 무혁은 공사 현장을 누볐다. 차림새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여자에게 호감 사고 싶지도 않았고, 제 모습을 보고 여자가 화를 내며 뻥, 차주면 고마웠다. 뺨을 때리려 한다면 기꺼이 뺨을 내줄 수도 있었다. 의미 없는 맞선 자리에 있으니, 차라리 그게 나았다.
‘그런데 설마 그녀였을 줄은.’
맞선 상대에 관심이 없으니, 한창 일에 집중하느라 흘려들은 이름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약속장소에 도착해 그제야 맞선 상대 이름을 찾은 무혁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신재희. 숨이 멎었다. 굳이 직원에게 묻지 않아도 금세 눈에 들어왔다. 창가에 앉아 밖을 보고 있는 그녀를 보자마자 발이 절로 움직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녀 앞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흠칫하는 듯했지만, 무혁의 시선에 그런 건 들어오지 않았다. 긴장되었는지, 목소리가 떨렸다. 신재희. 입 밖으로 낸 이름을 몇 번이나 속으로 불러보았다. 맞은 편에 앉았다. 저를 보는 그녀의 표정이 굳어 있자, 아차 싶었다. 처음으로 제 차림새에 인지가 된 것이다. 뒤늦게 후회가 든 데다가 긴장이 되어 마침 나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반이나 비워 버렸다. 그리고 더듬더듬 자신에 대해 말하는 그녀를 보며 무혁은 감회가 새로웠다.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와 많이 달라지지 않아서 가슴이 더 아팠다. 묻고 싶었다. 왜, 그때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냐며. 무혁은 자신에 대해 더 알려주고 싶어 욕심을 부리며 답지 않게 많은 말을 했다. 뜨뜻미지근한 반응. 무혁은 처음으로 위기를 느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쳤다.
“난 나쁘지 않은데. 재희 씨도 나쁘지 않다면 결혼합시다.”
그때 재희 반응을 떠올리자, 무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성급했다. 이마를 짚던 손을 뗐다. 무뚝뚝한 남자의 얼굴이 서울 야경에 음영 졌다. 남자의 얼굴은 한층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무혁은 그 모습을 감추듯 한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쓸어내린 손 아래로 어둡게 가라앉은 남자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고,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또한 진심이었다. 놓치면 이대로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을 감당할 수 있겠냐는 그녀의 말에 앞뒤 잴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가능하다는 걸 알려주었다. 부족하다면 기꺼이 더 보여줄 의향도 있었다. 그녀는 당황한 듯했지만 곧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만나서 처음으로 보여주는 그 웃음에 무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은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그녀에게서 돌아온 말은 ‘결혼할 마음이 없다’였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시간은 벌었으니.”
우선은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무혁은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초조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백화점 앞에서 보여준 재희의 그 표정이 톡 튀어나온 돌부리처럼 걸렸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H 호텔 스카이라운지 입구 앞에서 재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맞선 보러 온 장소에 며칠 만에 다시 오는 기분이 묘했다. 스카이라운지에 들어선 재희의 시선이 딱 한 곳에 멎었다. 그 넓은 스카이라운지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무혁의 모습이 단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혁은 처음과 달리 말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반듯한 자세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휴대 전화라도 만질 법도 한데 그는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2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각. 굽이 낮은 구두가 대리석 바닥에 약하게 마찰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남자의 커다란 몸이 일으켜진 것은. 또각. 한 발 더 내디뎠을 때 남자의 고개가 천천히 재희를 향해 돌려졌다. 재희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남자의 깊은 시선이 찌르는 듯했다. 재희가 마른침을 삼키며 걸음을 떼자, 남자도 움직였다. 거리가 좁혀졌다. 재희가 시선을 들었다. 여전히 미간에 주름이 져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 움찔하며 걸음이 멈추자, 남자의 걸음도 멈췄다. 짧게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오시느라 고생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남자의 모습은 근사했다. 커다란 덩치에 딱 맞아떨어지는 슈트 차림과 보기 좋게 올린 머리, 남자다운 단단한 턱과 짙은 눈썹. 여전히 무서운 인상이었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흑백 마피아 콘셉트로 촬영한 모델같이 보였다. 시가가 더없이 어울릴 것 같은 남자. 강렬한 인상에 한 번, 비율이 좋은 커다란 몸에 한 번 더 시선이 가는 남자였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이리로.”
전과 달리 남자가 여자를 자리로 정중하게 안내해 주었다. 재희가 의자를 빼서 앉으려 했다. 그러나 무혁이 더 빨랐다. 무혁이 의자를 빼주자 재희가 당황하며 주춤했다.
“앉으십시오.”
“아, 네.”
재희가 어색하게 의자에 앉아 그제야 무혁이 맞은편에 앉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매너에 재희는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애써 눌렀다.
‘항상 빨리 안 앉으면 느리다고 혼났는데.’
왠지 정말 귀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이런 대우는 처음인지라 민망하기도 하고 쑥스러워 재희는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자 재희는 잔을 그러쥐며 아직 차가운 손을 녹였다. 남자의 앞에는 전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절반쯤 비어 있었다. 춥지 않은 걸까. 잠시 쓸데없는 생각이 스쳤다.
“어떻습니까?”
“네?”
“오늘 한 번 더 보기로 했는데, 어떤지 물었습니다.”
남자가 본론부터 꺼내서 재희는 할 말을 잃었다. 두 번째 만남이니 조금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일상적인 대화를 할 법도 한데, 이 남자는 참 직설적이었다.
“글쎄요. 만난 지 오 분도 안 지났는데, 그리 물어보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주어진 며칠 시간 동안 생각은 충분히 하셨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건…… 그렇지요.”
집에서 나오기 직전까지도 무혁이 사준 가방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환불할 것인가, 말 것인가. 선은 어차피 조건이 비슷한 남녀가 만나 서로를 탐색하고 결혼할지 말지 결정하는 자리였다. 괜찮으면 몇 번 더 만나보고 결혼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자리. 하지만 할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의 사업을 위해. 재혁의 미래를 위해. 재희에게 이 선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러긴 싫어.’
아버지와 재혁을 위해 희생하기 싫었다. 재혁에겐 선택권이 없다고 말했지만, 결혼까지 할머니 뜻대로 진행되는 건 싫었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 엉망이었던지라, 그도 결혼 생각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눈앞의 남자는 단 몇 마디 나누지도 않은 사이에 결혼을 입에 올렸다. 서로 맞선은 처음이고 나쁘지 않다면 결혼하자고.
‘이 남자에게 결혼은 쉬운 걸까.’
눈앞 남자의 의중이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날 몇 마디 나눠보지도 않은 여자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쉽게 입에 올리는 걸까. 재희는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혁 씨는 결혼이 쉬운가요?”
남자의 시선이 피부에 따갑게 박혔다.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재희는 시선을 들지 못했다. 그와 마주 볼 용기가 없어 재희는 아랫입술을 몇 번이나 베어 물었다가 풀었다. 손가락이 부산스럽게 찻잔에서 배회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서로 나쁘지 않다면 결혼하자는 말을 쉽게 하는 것 같아요.”
“…….”
“마음이 변했다는 말도 그렇고…… 그렇게 비싼 가방을 대뜸 사준 이유도 모르겠고, 생각해 보라고 시간을 준 것도 사실 이해가 가질 않아요.”
재희의 시선 끝에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남자의 커다란 손이 보였다. 그날, 백화점 앞에서 제 손을 감싸 쥔 저 커다란 손은 거칠지만 따뜻했다. 문득 귓불이 뜨거운 건 실내 온도가 지나치게 따뜻해서라고 재희는 애써 생각했다.
“쉽지 않습니다.”
무혁은 나지막하지만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재희 씨와 결혼하고 싶은 건 진심입니다.”
“그 자리에 제가 아니라 다른 분이 앉아 있었어도요?”
재희의 말이 끝맺음과 동시에 무혁의 앞에 놓인 유리잔에 든 얼음이 잘그락, 녹아 마찰음을 냈다. 잠시 고민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무혁의 곧바로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차만 마시고 일어났습니다.”
일어났을 거라는 가정조차 세우지 않았다. 입에 발린 말일까? 남자들은 마음에 드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얼마든지 입에 발린 말을 할 수 있다고.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고, 희수가 말해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것 때문에 몇천이나 하는 가방을 사줄 리가.’
무혁은 자신과 다르게 망설임이 없었다.
“재희야. 넌 마치 사슬에 발 묶인 코끼리 같아.”
언젠가 재희의 독립을 격려하면서 한 희수의 말이 떠올랐다.
“쇠사슬에 발이 묶여서 도망가지 못하는 아기 코끼리가 그대로 자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성체가 된 뒤에도 얼마든지 쇠사슬을 끊고 도망갈 수 있어도 그러지 못해. 소용없다는 걸 어릴 때 이미 배웠으니까. 재희 널 보면 마치 그 코끼리 같아. 얼마든지 그 집에서 나올 수 있는데도 할머니 때문에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하니까.”
희수의 말이 맞았다. 얼마든지 독립할 수 있음에도 할머니가 두려워 독립하지 못했다. 처음 시도했던 독립 시도도 할머니에 의해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항상 무언가를 할 때 할머니가 신경 쓰였다. 재희는 그렇게 자랐고, 지금도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달랐다. 남들이 보기엔 비상식적인 일도 그는 맞다고 생각한다면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성격 같았다. 가방을 받았을 때 부담스러운 한편 짜릿했다. 자신은 하지 못할 행동을 남자는 거침없이 했다. 막힘없는 남자의 행동에 속이 다 시원했다. 이 남자는 결혼한 뒤에도 변함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재희의 눈동자가 스르륵 올라갔다. 재희가 시선을 내리고 있는 동안 한 번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무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올곧은 시선에 재희는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