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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고민 (4/128)

#4화. 고민2021.11.11.

마음을 다잡았음에도 쉽게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이던 재희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2층짜리 고급 주택은 마치 괴물의 아가리같이 느껴졌다.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열자 할머니의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부터 들렸다.

16549502904662.jpg“아이구, 내 새끼. 이 추운 날에 학교 공부하랴, 뭐 하랴 얼마나 힘드누. 어멈아, 재혁이 몸이 허한 것 같다. 조만간 한의원 가서 공진단이나 주문하고 오거라.”

16549502904667.jpg“누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사이 할머니에게 붙들려 있던 재혁이 재희를 불렀다. 재혁의 손을 잡고 연신 안쓰러운 눈으로 보던 할머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눈치 보던 재희의 고개가 수그러졌다. 인상이 좋은 영산댁이 먼저 반갑게 다가왔다.

16549502904671.jpg“일찍 오셨네요. 저녁은 어떻게 하셨어요?”

16549502904675.jpg“먹고 왔어요.”

무혁이 저녁을 같이할 것을 권했지만 재희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어차피 결혼하지 않을 사람과 저녁까지 같이 한다는 건 부담스러웠다. 다행히 무혁은 강요하지 않았다.

16549502904662.jpg“들어왔으면 얼른 안 들어오고 뭐 하는 게야! 우리 장손 찬바람 맞아서 감기라도 걸리면 네가 책임질 거냐?”

이미 현관은 닫혀 있었지만, 괜히 트집 잡는 할머니였다. 영산댁이 얼른 들어가라며 등을 다독여 주었다. 거실에는 할머니와 재혁, 그리고 홍연화가 있었다. 신채근은 퇴근 전인지 부재중이었다. 아둔한 것이 생각도 없고, 저걸 어디다 쓰려는지…… 숨김없이 할머니는 험한 소리를 했지만, 재희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16549502904675.jpg“다녀왔습니다.”

늘 그랬듯 들려도 듣지 못하는 척, 보아도 못 본 척하면 되었다. 그렇게 견디다 보면 욕설이나 험담은 어느새 끝나 있으니까. 그 후는 편해지니까. 그게 재희가 이 집에서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16549502904662.jpg“그래, 선 자리는? 설마 망치고 오는 길은 아니었겠지.”

할머니의 다그침에 재희는 숨돌릴 틈도 없이 소파 끄트머리에 앉았다. 빨리 말하고 방에 들어가고 싶었다. 영산댁이 춥다며 재희 앞에 따뜻한 허브티를 내주었다.

16549502904675.jpg“……한 번 더 보기로 했어요. 서로 조금 더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요.”

무혁이 가방을 사준 일을 제외하고 대략적인 내용을 추려서 보고하듯 말했다. 그 사이 허브티는 조금 식어 있었다. 마른 입안을 허브티로 적시는 사이 할머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16549502904662.jpg“개똥도 약에 쓸 데가 있다더니, 밥값은 제대로 하는구나.”

이만 가보거라. 볼일 끝났다는 듯 할머니가 다시 재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주 잠깐 재혁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재희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16549502904671.jpg“더 늦게 오지 눈치 없게 왜 빨리 오고 난리람. 하여간, 밉상.”

왜 지금 들어와서 화기애애한 우리 가족 분위기를 망치느냐는 듯한 홍연화의 책망 어린 말투에 재희의 걸음이 잠깐 멈췄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나지막이 투덜거림을 고스란히 들은 재희는 못 들은 척 도망치듯 거실을 벗어나 방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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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502904675.jpg“하아.”

방문을 닫으며 주르륵, 그대로 재희는 주저앉았다. 내내 막혀 있던 숨통이 이제야 뚫리는 기분이었다. 재희는 좁은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2층에서 가장 구석진 곳이 재희의 방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데다 좁고 필요한 가구만 몇 개 들어간 작은 방. 햇빛이 잘 들고 넓은 재혁의 방에 비교하면 작은 방이지만, 이 집에서 유일하게 재희가 숨을 틔울 수 있는 고마운 공간이기도 하다. 어릴 땐 무서웠지만 어느 순간 이 방에서 지내다 보니 좋은 점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가령 창문 밖을 내다보면 야트막한 뒷산과 오밀조밀한 주택가의 전경이 보인다든지, 비 온 뒤 먹구름 사이로 스며 나오는 햇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가끔 창문틀에 앉아서 노는 참새가 얼마나 귀여운지…… 그런 것들 말이다.

16549502904667.jpg“저기…… 누나. 나 재혁이. 들어가도 돼?”

16549502904675.jpg“어, 응. 그래.”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 밑 서랍장에서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꺼내던 재희는 도로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할머니에게 겨우 벗어났는지 지친 얼굴로 재혁이 들어왔다. 방문을 닫고도 선뜻 다가오지 못해 머뭇거리던 재혁이 조심스럽게 초콜릿 6구가 든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에는 재희가 일전에 좋아하는 가게라고 알려준 초콜릿 가게 상호가 영문 흘림체로 쓰여있었다.

16549502904667.jpg“저기…… 이거 오늘 여친이랑 데이트하다가 발견한 가게인데…… 난 잘 모르겠지만 누나가 좋아할 것 같아서.”

반질반질한 초콜릿을 보며 재희가 흐릿하게 웃었다.

16549502904675.jpg“고마워. 잘 먹을게.”

아주 어릴 때 재혁은 재희를 무척이나 싫어했고 괴롭힘은 꽤 끈질겼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괴롭힘이 싹 끊기더니, 재혁이 재희를 따르기 시작했다. 재혁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누나에게만 말해 주는 비밀이라며 해 준 이야기로는 집에서 오냐오냐, 뭘 하든 한 번도 혼난 적 없던 재혁이 아버지 신채근에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났다고 했다. 누나를 괴롭히는 놈은 내 아들놈도 아니라며 크게 혼내자 재혁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 집안에서 작은 왕으로 군림하는 재혁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크게 혼났기 때문이었다. 재혁의 말로는 홍연화가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이대로 죽겠구나 싶을 정도로 아버지가 무서웠다고 씩 웃으며 말해 주었다. 재혁과 그럭저럭 나름 사이좋게 지냈지만, ‘그때 그 일’이 벌어진 뒤 할머니가 또 남동생을 잡아먹으려고 하냐며 화를 내었다. 그 후 재혁과 재희의 사이는 서먹해졌고 둘은 십 년 이상 제대로 된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 재혁이 먼저 이 방에 찾아온 건 의외였다. 재혁은 망설이듯 두 손을 비비다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16549502904667.jpg“누나. 결혼할 거야?”

16549502904675.jpg“응?”

16549502904667.jpg“오늘 선본 남자랑 결혼할 거냐고.”

재혁의 물음에 재희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오늘 낮에 봤던 무서운 남자를 떠올렸다. 선 자리에 나온 사람답지 않은 엉망인 머리와 옷차림. 커다란 덩치와 무서운 얼굴. 말수 적고 행동부터 하는 남자. ‘결혼 안 할 거야’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할 거야’라는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결국 제 마음도 모른 채 갈팡질팡하던 재희는 적당한 대답을 하였다.

16549502904675.jpg“잘 모르겠어.”

재희의 시원찮은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재혁이 발끈했다.

16549502904667.jpg“그게 뭐야. 싫으면 싫다고 해.”

16549502904675.jpg“재혁아.”

16549502904667.jpg“한 번 더 만나보긴 뭘 만나 봐. 처음부터 내키지 않은 자리란 거 모를 줄 알아?”

16549502904675.jpg“나에겐 거부권이 없어. 알잖아.”

재희의 말에 열 내던 재혁의 말이 뚝 끊겼다.

16549502904675.jpg“그리고 그 남자와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난 아마 이 집에서 나가게 될 거야.”

16549502904667.jpg“누나!”

16549502904675.jpg“그 남자와 한 번 더 만나보기로 한 건 내가 원해서야. 괜찮아.”

재혁이 입을 꾹 다물고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재희는 애써 그 시선을 모른 체했다.

16549502904675.jpg“쉬어야겠어. 미안하지만, 이만 나가 줘.”

재혁은 더 할 말이 있는 듯 머뭇머뭇했지만 이내 재희의 방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재희는 재혁이 주고 간 초콜릿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럼주가 들어간 초콜릿이었다. 재희는 술을 잘 하지 못했다. 술맛도 싫어했다. 당연히 초콜릿 안에 들어간 럼주도 잘 먹지 못했다. 재희가 이 가게에서 먹어본 건 럼주가 들어 있지 않은 초콜릿뿐이었다. 서로 입맛을 잘 모를 정도로 재혁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했던 몇 년의 시간이 꽤 길었단 걸 깨달았다. 재희는 초콜릿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나중에 술을 좋아하는 희수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재혁이 나간 뒤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 도착 알림음이 울렸다. 휴대 전화 화면을 열자, 프로필 사진조차 없는 무혁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16549502959721.jpg[잘 들어갔습니까.]

그의 외모와 목소리만큼이나 간결하고 딱딱한 메시지. 어쩌면 메시지조차도 똑같은지.

16549502904675.jpg“바로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으면서.”

재희는 웃으며 적당히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 답장을 보낸 뒤 휴대 전화를 내려놓았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단숨에 들이닥쳤다. 금세 볼이 새빨개졌지만, 재희는 개의치 않고 창틀에 팔을 기대며 겨울밤에 눌린 동네 전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 백화점 앞에 있을 때 내리던 눈은 집에 도착했을 무렵 그쳤다. 다행이었다. 재희는 눈이 싫었다. 어릴 때부터 눈이 오는 날이면 반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든다고 들떠 있어도, 재희는 하나도 신이 나지 않았다. 차라리 겨울비가 내렸으면 했다. 모진 산고를 이기지 못한 친모가 재희의 쌍둥이 남동생과 함께 사망한 날이 바로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그날부터였다. 갓 태어난 아기가 제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년, 동생을 잡아먹고 태어난 년이 된 것은. 알고 싶지 않은 그 진실은 아버지가 술에 취해 저녁 늦게 귀가한 날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눈이 내려 한껏 신이나 정원에서 눈치 보며 놀던 7살 된 어린 재희를 붙잡고 숨죽여 울었다.  

16549502904671.jpg“네 엄마가…… 눈을 아주 많이 좋아했다. 너처럼 그렇게 눈을 좋아하더니, 눈이 내리는 날 그렇게 가버렸어. 나를 두고……. 고생만 하더니.”

  아버지는 아마 그때 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딱 한 번 그런 이후로 아버지는 재희를 붙잡고 운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무관심했고, 어린 재희는 그날 일을 작은 가슴에 꼭 묻어두었다. 그 일을 꺼내는 순간 집안이 시끄러워질 거란 걸 어린 마음에 눈치챈 것이다. 그렇게 재희는 홀로 가슴에 묻은 채 성인이 되었다. 아마 그날의 기억은 눈이 내릴 때마다 떠오르겠지. 그래서 재희는 눈 내리는 날이 싫었다. 메시지 도착 알림음이 들렸다. 상념에서 깨어난 재희는 창문을 닫고 감각이 사라진 볼을 비비며 휴대 전화 화면을 켰다.

16549502959721.jpg[언제 만나는 게 좋겠습니까.]

용건만 남긴 딱딱한 문자였다. 늘어져 있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답장을 보내려던 재희는 문득 시간을 확인하곤 1층으로 내려왔다. 지금쯤이면 저녁잠이 많은 할머니는 주무시러 들어가셨을 테고, 가족들도 각자의 방에서 시간을 보낼 터였다. 살금살금, 도둑 걸음으로 조심히 나온 재희는 무인택배함을 열었다.

16549502904675.jpg“여기 있다.”

휴대 전화 불빛으로 무인택배함을 비춰 쇼핑백을 찾던 재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쇼핑백을 가지고 방에 돌아오자, 추위 때문에 손끝은 어느새 새빨개졌다. 언 손을 대충 녹인 뒤 가방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16549502904675.jpg“예쁘다.”

모시고 다녀야 할 정도로 헉 소리가 나는 가격의 가방이었지만, 재희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가방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가방을 받기 전 남자가 한 행동 때문이었다. 그 남자가 자신의 무례한 말에 질색하여 거절했으면 하는 마음에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진담으로 듣고 단번에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가방을 결제했다. 감당할 수 있으니 결혼하자며. 항상 눈치 보며 몸을 사리는 자신과 다른 남자.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거침없는 남자의 행동이 속 시원하기도 했다.

16549502904675.jpg“환불할지, 말지 정하긴 해야겠지만.”

사실 한 번 더 만난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변할 것 같지 않았다.

16549502904675.jpg“그래도 한 번 더 보기로 하긴 했으니까.”

재희가 말을 고르고 골라 답장을 보냈다.

16549502904675.jpg[삼 일 뒤에 봤으면 해요. 처음 만났던 H 호텔 그 스카이라운지에서 오후 3시에요.]

16549502959721.jpg[알겠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재희가 답장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딱딱한 답장이 왔다. 시간을 정한 뒤 재희는 휴대 전화를 끄고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꺼냈다. 재희는 오늘 본 무혁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더듬었다. 잠시 골똘히 무혁의 모습을 그려보던 재희의 손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금세 스케치북 위에는 미간에 주름 잡은 곰 한 마리가 뚝딱 그려졌다. 꽤 만족스럽게 그려진 그림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벌어진 창문 틈으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며들어와 웃풍에 추웠지만, 오늘은 푹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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