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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환불 기간은 14일 (3/128)

#3화. 환불 기간은 14일2021.11.08.

어느덧 차는 S 백화점 본점 입구에 도착했다.

1654950272657.jpg“여긴 왜……?”

의아한 얼굴로 무혁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재희가 내리자 무혁은 발레파킹을 맡긴 뒤 성큼 걸음을 옮겼다. 재희가 제자리에 선 채 우물쭈물하자 무혁이 돌아보았다. 어서 오라는 듯한 시선에 재희는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

1654950272657.jpg“무혁 씨.”

어떻게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탔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이어진 침묵을 견디다 못해 재희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무혁의 시선이 재희에게 향했다. 그와 눈 마주치자 재희가 움찔 몸을 떨었다가, 입속 살을 잘근잘근 씹으며 두려움을 다스렸다.

1654950272657.jpg“저기…….”

16549502726584.jpg“나중에.”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무혁은 말을 끊고 걸음을 옮겼다. 재희는 한숨을 삼키며 이제 그에게 묻기를 포기하고 걸음을 옮겼다. 검은색 코트로도 감출 수 없는 셔츠 군데군데 묻은 먼지 자국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재희는 지금 걷고 있는 복도가 휘황찬란하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정작 그 시선을 받는 무혁은 덤덤한 얼굴이다. 명품관이 늘어선 길목의 한 매장 앞에 선 무혁이 말했다.

16549502726584.jpg“들어갑시다.”

결코, 올 일도, 구경할 수도 없었던 명품관 로고를 본 재희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1654950272657.jpg“여긴…….”

재희는 명품관에 익숙하지 않았다. 어릴 적 가족끼리 쇼핑갈 때도 할머니가 싫어했기 때문에 항상 재희는 빠져야 했다. 쇼핑을 다녀오는 가족 손에 명품이 들려 있어도 재희의 몫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기에 재희는 서운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밖에까지 나가서 할머니에게 시달리느니, 집에 혼자 있는 게 더 편한 재희였다. 대학 입학했을 때 신채근이 축하 선물로 명품 지갑을 딱 한 번 사준 적은 있었다. 그때 제외하고는 재희는 단 한 번도 명품을 만져보거나 구경한 적도 없었다. 집에 손 벌리기 싫어서 아르바이트하고 학점 챙기느라 학기를 무사히 보낸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그런데 H 브랜드라니. 아무리 명품에 관심 없는 재희라도 H 브랜드는 쉽게 접하기 힘든 브랜드인 걸 알고 있었다. 밝고 고급스러운 매장 인테리어에 익숙하지 않은 재희는 어쩐지 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와서는 안 될 장소에 감히 제가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16549502726584.jpg“어서.”

무혁의 재촉에 재희는 주춤 뒤로 물러나려는 발을 억지로 붙잡고 따라 들어갔다. 무혁이 들어서자 그를 알아본 매니저가 서둘러 다가왔다. 재희는 조금 떨어져서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는 무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움츠린 자신과 다르게 무혁은 조금도 어색함 없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서 있었다. 여기에서 그와 자신의 격차를 새삼 실감한 재희가 쓰게 웃었다. 이윽고 대화가 끝났는지 매니저가 어디론 가로 안내하자, 무혁이 재희를 돌아보았다.

16549502726584.jpg“이리로.”

더 이상 그에게 뭔가 듣기를 포기한 재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들어갔다. 안내된 프라이빗 룸에서 재희는 무혁과 조금 떨어져 앉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무혁이 잠시 재희를 응시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직원이 차와 쿠키를 두었다. 재희는 고맙다고 인사한 뒤 눈동자를 슬슬 굴렸다. 좋은 향기와 좋은 음악이 흐르는 매장이 어쩐지 별세계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잠시 후 직원이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블랙 색상에 금장이 둘린 버킨백을 들고 왔다.

16549502726604.jpg“이번에 새로 나온 신상입니다. 특별한 분들을 위해 한정판으로 나온 가방이며…….”

직원이 극소수 VVIP 고객들을 위한 모델이며, 가방 재질이 어떻고 조곤조곤 설명했으나, 긴장한 재희의 고막에서 모조리 튕겨 나갔다.

16549502726584.jpg“마음에 듭니까?”

멍하니 가방을 보던 재희가 덤덤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무혁은 재희와 시선을 마주치며 대답을 기다렸다. 왠지 재희는 마음에 든다고 해야 할 것 같아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무혁은 망설이지 않고 카드를 꺼내 들었다.

16549502726584.jpg“그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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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화점을 나오는 재희의 손엔 H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매장 분위기와 무혁의 시선에 눌려 거절의 말조차 꺼내지 못한 재희가 발레파킹을 기다리다 입속 살을 사리물었다.

1654950272657.jpg‘과해.’

새삼 손에 들린 쇼핑백이 무거웠다. 그가 왜 처음 본 자신에게 이런 받기에도 부담스러운 가방을 사주었는지 의문스러웠다. 무혁에게 거절당하기 위해 던진 말이었는데 웬만한 차 한 대값의 가방을 얻게 되자 무섭기까지 했다. 차가운 겨울 공기를 숨과 함께 들이켜자 머릿속이 맑게 갰다. 재희는 용기를 냈다.

1654950272657.jpg“무혁 씨. 이건 받을 수 없어요.”

재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가방이 든 쇼핑백을 내밀었다. 혹시 가방이 다칠까 싶어 조심스럽게 내민 누드 색 매니큐어를 바른 재희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무혁의 입매가 일자로 굳혀졌다. 지그시 쳐다보는 무혁의 시선이 무서워 재희는 사색이 된 채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1654950272657.jpg“처음 만난 사이인데 과해요. 게다가 이거 가격이…….”

차마 입에 담기도 무서운 가격이라 재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침묵에 재희는 초조하게 입속 살만 잘근잘근 씹었다. 뭐라고 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이 남자는 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16549502726584.jpg“재희 씨가 본인을 감당할 수 있겠냐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1654950272657.jpg“네?”

긴 침묵을 깬 무혁의 말에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잠깐, 아주 잠깐 무섭기만 하던 남자의 눈에 웃음이 스친 것 같기도 하다.

16549502726584.jpg“그 증명을 한 것뿐입니다.”

재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6549502726584.jpg“난 재희 씨가 마음에 듭니다.”

1654950272657.jpg“…….”

16549502726584.jpg“그러니 결혼합시다.”

어안이 벙벙한 채 무서움도 잊고 무혁을 멀거니 바라보던 재희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푸하, 작게 터지는 웃음소리에 무혁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스쳤다. 재희가 콧등을 살짝 찡그리며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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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엉뚱한 남자. 선 자리를 파투 내기 위해 바로 지어낸 말을 그는 곧이곧대로 듣고 거침없이 카드를 꺼내 들었다. 거침없는 그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우스워서 재희는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오랜만에 웃어서일까. 크게 소리 내어 웃지 못했지만, 재희는 잔웃음을 흘리다 겨우 멈췄다.

1654950272657.jpg‘얼마 만에 이렇게 웃어보지.’

하아, 재희의 입술 사이로 기분 좋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차가운 공기에 뿌연 입김이 서렸다가 사라진다. 재희는 웃음을 머금고 무혁을 올려다보았다.

1654950272657.jpg“무혁 씨는 정말 엉뚱한 분 같아요.”

16549502726584.jpg“처음 듣는 소립니다.”

건조한, 잔상이 남을 것 같은 라운지에서 본 흐릿한 표정과 달리 생기가 도는 재희의 표정에, 무혁은 본인조차 인식하지 못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윽고 웃음을 멈춘 재희가 말했다.

1654950272657.jpg“하지만 죄송해요. 무혁 씨. 역시 전 이걸 받을 수 없어요.”

16549502726584.jpg“어째서입니까.”

표정이 굳어진 무혁을 보며 재희는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1654950272657.jpg“전 결혼할 마음이 없거든요.”

솔직한 재희의 말에 무혁이 입을 다물었다. 무혁의 엉뚱함 때문이었을까. 한결 편해진 느낌이다. 재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4950272657.jpg“그러니까 죄송해요. 무혁 씨. 이 가방 받을 수도 없어요. 없던 일로 해요, 우리.”

무혁의 덤덤한 시선이 겨울바람에 발갛게 물든 가느다란 손가락에 닿았다.

16549502726584.jpg“나는.”

무혁의 커다란 손이 재희의 작은 손을 덮었다. 크고 뜨거운 손이 덮이자 재희가 움찔,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겨울바람 한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재희의 두 손을 따뜻하게 감싼 무혁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49502726584.jpg“없던 일로 하기 싫습니다.”

재희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1654950272657.jpg“네?”

무혁이 쇼핑백을 재희의 품에 안겨준 뒤 손을 거뒀다. 뜨거운 체온이 멀어지자 손이 허전해졌지만, 재희는 애써 무시했다.

16549502726584.jpg“나는 재희 씨와 결혼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1654950272657.jpg“……그런 분이 선 자리에 그렇게 나오신 건가요.”

끝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무혁이 너무나도 뻔뻔하여 저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왔다. 당황할 줄 알았던 무혁은 제 차림을 한번 보더니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49502726584.jpg“이 선 자리가 내키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재희 씨를 보곤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재희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지만, 무혁은 덤덤한 표정이다.

16549502726584.jpg“그 가방을 환불할 수 있는 기간은 14일 이내입니다. 그동안 저와 한 번 더 만나보고 생각해 보십시오.”

1654950272657.jpg“…….”

16549502726584.jpg“환불할 것인지, 그대로 쓸 것인지.”

그 말이 마치 이 남자가 자신을 거절할 것인지, 받아들일 것인지 생각해 보라 말하는 것으로 들렸다면 내 귀가 이상한 걸까. 더불어 거절해도 이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남자의 결연한 의지마저 보이는 듯했다.

1654950272657.jpg‘왜?’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의 태도에 쇼핑백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살짝 들었다. 그때 차가운 하얀 무언가가 톡, 재희의 콧등에 떨어졌다. 콧등에 느껴지는 차가움에 재희의 시선이 저절로 하늘로 향했다. 진중한 눈으로 재희에게 집중하던 무혁의 시선 역시 하늘로 향했다.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 민들레 홀씨 같은 하얀 눈송이가 황량한 도시 곳곳에 떨어지기 시작한다.

1654950272657.jpg“날씨가 따뜻하다 싶었더니…… 올해 첫눈이네요.”

재희의 입술 사이로 새하얀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송이송이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는 재희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자리한다. 무혁은 그런 재희에게 조용히 시선을 두었다가 묵묵히 눈송이가 떨어지는 하늘로 옮겼다.

16549502726584.jpg“그렇군요.”

그날처럼 겨울비였다면 더 좋았을 것을. 그럼 재희 씨, 당신은 그때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 무혁의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은 재희의 서글픈 미소 때문인지, 그녀가 기억을 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높은 건물 사이로 차게 불어 닥치는 겨울바람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 * * 무혁이 집에 데려다주었을 땐 저녁 시간 전이었다. 재희는 대문 앞에 서서 명품 로고가 그려진 쇼핑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1654950272657.jpg“환불…… 이라.”

몇 번 무혁의 말을 곱씹던 재희는 대문 옆에 설치된 무인택배함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연 뒤 쇼핑백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할머니는 항상 택배 가져오는 심부름을 영산댁이 아닌 재희에게 시켰다. 깐깐하고 의심이 많아서 수십 년째 집에서 일하는 영산댁을 잘 못 믿는 성격 때문이었다. 쇼핑백을 넣어둔 재희는 몸을 일으켰다. 이따 가족들이 모두 잠든 후에 다시 꺼내올 생각이었다. 무혁에게 선물 받았다는 걸 알면 할머니는 당장 결혼을 서두르려고 하실지도 몰랐다.

1654950272657.jpg‘혹시라도 내가 결혼해서 이 집에서 나가게 된다면 그때나 영산댁에게 맡기시려나.’

쓸데없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와 결혼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하지 못했을까. 무혁이 제안한 14일의 고려 기간. 어이없기도 하고, 고저 없는 일상에 마침 게임처럼 퀘스트가 하나 생긴 것 같아서 재밌기도 했다.

1654950272657.jpg“아.”

문득 재희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집에선 웃어선 안 되는데. 난 그럴 자격이 없는데. 재희는 볼을 톡톡 두드리며 입가의 웃음을 지웠다. 오늘 무혁과 만남은 고저 없는 일상에 갑자기 커다란 짐승이 난입한 것처럼 격렬했다. 그리고 그 꿈같은 격렬함은 대문을 올려다보는 순간 순식간에 현실로 끄집어내졌다. 대문을 올려다보는 재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1654950272657.jpg“이제 현실로 돌아가야지.”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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