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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결혼합시다. (2/128)

#2화. 결혼합시다.2021.11.04.

16549502542225.jpg“신재희 씨?”

그 벽이 으르렁거리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분명 벽이라고 끝까지 믿었을 것이다. 재희의 고개가 찬찬히 벽을 따라 올라갔다.

1654950254223.jpg“아, 네?”

눈앞에 세워진 벽이 사람의 몸임을 인지한 재희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하다 흠칫, 몸을 떨었다. 어디서 뭐 하다 온 것인지 흉흉한 겨울바람이 스며 나오는 검은색 코트로도 미처 감추지 못한 먼지가 잔뜩 묻은 구겨진 슈트. 거기에 단추 몇 개가 풀어지고 더러운 드레스 셔츠. 엉망으로 흐트러진 까만 머리카락과 감정이 보이지 않는 짙은 시선. 미간에 잡힌 내 천(川)자 주름이나 선이 거친 얼굴은 절로 몸이 떨려올 정도로 무서웠다. 거기에 190은 족히 넘어 보이는 큰 키와 위압적인 덩치 때문에 재희는 지은 죄도 없는데 잔뜩 긴장되었다.

16549502542225.jpg“반갑습니다. 강무혁입니다.”

딱딱하고 묵직한 목소리. 클래식이 흐르는 따뜻한 라운지를 순식간에 차갑게 누르는 분위기를 가진 남자가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남자는 대충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며 맞은편에 앉았다. 재희는 남자의 먼지투성이 구겨진 슈트 차림새에 지금 이 자리가 선 자리인 걸 알고는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을 소개했다.

1654950254223.jpg“신재희입니다.”

재희는 자꾸만 움츠려지는 어깨를 억지로 펴며 남자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하고 말았다. 강무혁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재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흡사 호랑이를 목전에 둔 것 같아 재희는 차마 그를 마주 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라운지 직원이 서비스용 미소를 띠며 주문을 받아간 뒤 잠시 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무혁 앞에 내려놓았다. 커피가 나올 때까지 둘 사이엔 한마디 대화조차 없었다. 얼음이 한가득 든 컵을 바라보던 재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1654950254223.jpg“저…….”

16549502542225.jpg“잠시.”

재희가 겨우 용기를 내 뭐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무혁이 말을 끊더니 꽤 갈증이 일었던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물처럼 단숨에 들이켰다. 단단하고 굵직한 목덜미와 공격적으로 움직이는 목울대를 재희는 멍하니 쳐다봤다. 무혁은 순식간에 절반 정도 비어버린 컵을 내려놓더니, 그래도 더운지 셔츠 소매를 걷었다. 아주 잠깐 그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재희의 시선이 황급히 옮겨지면서 남자의 팔뚝에 닿았다. 그을린 피부에 툭 튀어나온 힘줄과 군데군데 하얗게 새겨진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을 본 재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영화에서 나온 조폭이 오히려 신사처럼 느껴질 정도로 남자는 정말로…… 정말로 무서웠다.

16549502542225.jpg“목이 좀 말랐습니다.”

남자는 태연하게 말하며 뒤늦게 따뜻한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물수건에 시커먼 검댕이 묻어 나왔지만, 재희는 애써 못 본 척했다. 도대체 정확히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다 온 걸까. 재희가 마른 침을 삼키며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는 더러워진 물수건에 잠시 시선을 두더니 재희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16549502542225.jpg“일이 있어서 현장에 좀 다녀오느라 이렇습니다.”

1654950254223.jpg“아, 네.”

재희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화가 끊기자 침묵이 대신 자리했다.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고, 대신 샅샅이 뜯어보듯 재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재희는 따갑게 꽂히는 부담스러운 시선에 마치 구석으로 몰린 토끼가 된 듯한 기분이다. 라운지에 흐르던 클래식 곡이 바뀌고 숨이 막혀올 때쯤 남자가 입을 열었다.

16549502542225.jpg“어디까지 듣고 왔습니까.”

1654950254223.jpg“네?”

재희가 고개를 들고 남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아주 잠깐 남자의 차분한 눈동자에 반가움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워낙 찰나이고 긴장한 재희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16549502542225.jpg“나에 대해 어디까지 듣고 왔는지 물었습니다.”

1654950254223.jpg“아…… 강무혁 씨가…….”

16549502542225.jpg“무혁 씨라고 부르십시오. 나도 재희 씨라고 부를 테니.”

1654950254223.jpg“아, 네.”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제멋대로 툭툭 던지는 말이지만, 왠지 남자의 말에 수긍해야 할 것 같았다. 재희는 더듬더듬 다소 자신감이 없는 목소리로 들은 대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1654950254223.jpg“그러니까…… KJ 그룹 강진 회장님의 장남이고…… 현재 건축사 사무소 운영 중이라고 들었어요. 33세이고…….”

재희는 할머니에게 들었던 대략적인 정보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잘못을 저질러서 선생님에게 혼나는 학생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반응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남자는 무표정으로 듣고만 있다. 얼른 끝내고 싶은 마음에 말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1654950254223.jpg“그리고…….”

묵묵히 듣던 무혁이 말꼬리를 잘랐다.

16549502542225.jpg“그것뿐입니까.”

1654950254223.jpg“네?”

16549502542225.jpg“다른 건 없습니까.”

1654950254223.jpg“무슨……?”

영문을 모르겠다는 재희의 표정에 무혁의 미간이 희미하게 좁혀졌다. 무슨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재희를 빤히 보던 무혁이 곧 낮은 한숨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16549502542225.jpg“전 머리가 좋은 데다 체력까지 좋아서 회사를 운영하는 데 도움 될까 하여 로스쿨에 들어가 변호사 자격증도 땄습니다. 안정적인 거래처도 있고, 정부와 협약을 맺고 공공사업도 하고 있으며 업계에서 많이 알려진 편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도움 받은 건 아닙니다. 오롯이 자력으로 일구어낸 겁니다.”

자랑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으스대거나 거만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저 사실만을 전달하는 아나운서처럼 무뚝뚝하고 담담한 어조로 무혁은 자신을 소개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는 무혁의 의도를 재희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뭔가 반응을 바라는 듯 무혁의 기대 어린 시선이 재희에게 향했다.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걸까. 무혁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는 재희가 어색하게 웃으며 의례적인 대답을 했다.

1654950254223.jpg“대단…… 하시네요.”

그 말밖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무혁이 손가락을 까닥이며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린다. 재희는 순간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나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한 것 같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다시 흐르려는 찰나, 무혁이 입을 열었다.

16549502542225.jpg“더 알고 싶은 게 있습니까? 제 과거라든가.”

1654950254223.jpg“네? 아뇨……. 이미 충분히 설명해 주셔서 궁금한 점 없습니다.”

재희의 대답에 못마땅한 듯 무혁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그걸 놓치지 않은 재희의 안색이 걱정으로 어두워지자, 무혁의 미간이 다시 펴졌다. 무혁은 목이 탄 듯 셔츠 단추를 한두 개 더 풀더니 절반 정도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한 탓에 갈증이 일었다.

16549502542225.jpg“재희 씨는 몇 번째입니까?”

1654950254223.jpg“네?”

16549502542225.jpg“이번 선이 몇 번째인지 물었습니다.”

1654950254223.jpg“아…… 처음이에요.”

재희의 대답에 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든 듯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가 사라졌다.

16549502542225.jpg“저도 처음입니다. 그러니까 합시다.”

1654950254223.jpg“네? 무엇을……?”

재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자, 무혁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16549502542225.jpg“결혼.”

무혁의 직구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재희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뒤늦게서야 그가 한 말이 뇌에 전달되어 이해된 모양이다. 재희 반응이 어떻든 상관없이 무혁이 확인 사살하듯 단호하게 못 박았다.

16549502542225.jpg“난 나쁘지 않은데. 재희 씨도 나쁘지 않다면 결혼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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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희는 허벅지에 올린 손을 말아쥐었다. 그와 만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다. 재희는 남자가 애매한 시간대에 약속 잡은 것도 이해했다. 애초에 재희도 내키지 않는 자리였으니. 그래도 적당히 옷차림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입고 나왔다. 그러나 강무혁은 그러지 않았다. 부모님 주선으로 만나는 자리에 예의 따위 다 갖다 버린 엉망인 차림새로 나타난 남자. 온몸으로 이 자리가 내키지 않음을 표현하면서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도 전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결혼을 입에 올렸다. 그것도 저런 무서운 얼굴로.

1654950254223.jpg‘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잖아.’

재희는 입 속 살을 사리물었다. 그의 무례함에 화가 났다. 그 집에선 아무리 심한 말을 들어도 화가 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강무혁의 말에 화가 났다. 얼마나 나를 쉽게 봤으면! 물론 정중하게 말해도 재희는 순순히 응해 줄 생각 따위 없었다.

1654950254223.jpg“무혁 씨.”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혁이 재희의 말을 기다렸다. 재희는 떨리는 숨을 골라내며, 의자 팔걸이에 올려진 무혁의 곧고 길쭉하지만 투박한 손을 힐끗 쳐다봤다. 저 손으로 테이블을 한번 내려치면 박살 날 것 같다.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결혼을 했는데 손버릇이 좋지 않은 남자라면…… 저 손에 맞는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서 재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미간을 좁힌 무혁과 시선을 마주했다. 재희는 바닥까지 용기를 박박 긁어모아 억지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1654950254223.jpg“절 감당할 수 있겠어요?”

무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재희를 응시할 뿐이다. 무거운 그의 침묵에 애써 긁어모은 용기가 모래처럼 사르르 흩어지는 것 같다. 잠깐 후회가 들었지만, 재희는 흩어지는 용기를 주섬주섬 긁어모았다. 여기서 물러나면 안 돼. 재희는 자꾸만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말을 이었다.

1654950254223.jpg“저요, 부족한 것 없이 자라왔어요. 뭐든 갖고 싶은 건 다 가져야 하고 욕심도 많아요. 솔직히 선 자리인데, 여기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요. 좀 더 고급스러운 장소도 많았을 텐데 말이에요. 게다가 저는 입맛도 까다롭고 미술을 전공해서 취향도 까다롭거든요.”

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가 커다란 손이 말아쥐면서, 불룩 튀어나온 힘줄에 재희는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심장이 떨리다 못해 몸이 달달 떨리고, 온몸의 핏기가 사라지는 것 같다. 때리면 얼마나 아플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재희는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1654950254223.jpg“안 그래도 아버지께서 오늘 선 자리에 다녀오면 H 버킨백을 사주신다고 해서 나온 거거든요. 아시려나 모르겠네요. 한정판이라 웬만한 VVIP 아니고선 구하기 어렵거든요. 그러니까…….”

얼마 전 재벌가 손녀인 대학 동기가 SNS에 올린 가방을 떠올리며 말하던 재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앞에 앉아 있던 무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재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스며 나왔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무혁의 입매가 단단히 굳어졌다.

16549502542225.jpg“갑시다.”

1654950254223.jpg“네? 어딜…….”

무혁은 대답 대신 코트를 챙겨 들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에스코트를 바라지도 않았지만, 배려가 없는 그의 행동에 재희는 따라갈까 말까 아주 잠깐 고민했다.

1654950254223.jpg‘그래. 가보자.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만날 일 없는 남자니까…….’

안 좋게 헤어졌다는 말이 할머니 귀에 들어가길 원하지 않았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재희는 그를 따라나섰다. 호기롭게 따라나섰지만, 재희는 얼마 안 가 후회했다. 발레파킹을 맡긴 차가 호텔 본관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침묵이 힘들어질 무렵 구세주처럼 검정 세단이 호텔 본관 앞에 섰다. 무혁만큼이나 큰 세단이다.

16549502542225.jpg“타십시오.”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매너 정도는 있었는지 무혁이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 재희가 차에 오르자 무혁이 어딘가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 차 안은 조용했다. 시트의 폭신한 감촉도, 남자의 거친 인상과 달리 새것처럼 깔끔한 차 내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음악이라도 틀어줄 만도 하건만,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운전에만 집중할 뿐이다. 결국 재희는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숨이라도 틔우기 위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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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장한 재희와 다르게 무혁은 심란했다. 차가 신호에 걸리자 무혁의 시선이 재희에게 향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재희의 모습에 무혁은 씁쓸함을 삼켰다.

16549502542225.jpg‘기억 못 하는 건가.’

지금도 그날 일이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다. 겨울비가 내리는 어느 겨울. 낡은 서점에 갑자기 찾아온 여자아이. 책장에 기대앉아 숨죽여 우는 그 소리가 가슴이 저렸던 여자아이. 그저 그런 삭막한 겨울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여자아이. 그 울음소리를, 웃음소리를, 어쩌다 닿은 손끝의 온기도 잊은 적이 없다. 재희는 잊어버린 것 같지만.

16549502542225.jpg‘상관없어.’

기억하지 못해도. 그때와 달리 지금 바로 옆에 있고 함께 있다. 지금이 이 순간이 중요하니까. 다시는 그때와 같은 그런 후회를 겪고 싶지 않았다. 지그시 눈을 감으며 호흡을 다듬는 무혁의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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