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돌아가자2021.11.01.
차가운 겨울바람이 키 작은 건물을 매섭게 후려쳤다. 해가 일찍 저물면서 행인들의 발걸음이 뜸해지자, 상인들은 가게 문을 꽁꽁 닫아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청계천의 겨울. 그 겨울은 낡은 거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낯선 이방인이 나타나면서 조금 달라졌다. 190은 되어 보이는 듯한 큰 키, 장대한 몸집에 걸쳐진 광택이 나는 검은색 코트가 매서운 겨울바람에 무심하게 휘날렸다. 일반 남자들보다 키도, 몸집도 두 배는 커 보이는 남자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흐트러졌다. 흩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짙은 눈썹 사이의 내 천(川)자 주름이 눈에 띈다. 굳게 다문 입술과 그늘지고 피곤해 보이는 눈 때문에 다소 퇴폐적인 분위기를 가진 남자였다. 수제화 장인이 공들여 만든 최고급 남성용 구두를 신은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오로지 단 한 곳이었다. 해가 지면 노을이 가장 먼저 닿는 곳. 제대로 된 간판조차 없지만, 노을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이기에 사람들이 당연히 아는 곳.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 거리와 함께한…… 낡디낡은 그곳. 그 서점.
‘오랜만이군.’
남자의 거친 손가락 끝이 세월에 닳고 닳아 매끄러워진 나무문 손잡이에 닿았다.
‘노을 서점.’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아무렇게나 아슬아슬하게 쌓인 책더미가 남자의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에 흐릿하게 비쳤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내부가 눈앞에 그려진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입구에 들어서면 아무렇게나 쌓은 듯 보이지만,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질서 있게 쌓인 책더미가 있다. 그 책더미 뒤로는 오래되어 군데군데 헤진 소파가 있고, 주인의 애정과 정성이 엿보이는 잘 손질된 나무 탁자가 놓여 있다. 그곳에 사람들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토론했으며, 갈 곳 없는 학생은 공부를 했다. 겨울이면 연식이 오래된 낡은 난로에 석탄을 넣고 불을 피우고…… 그러다 배고프면 서점 할아버지가 주는 과자나 핫초코 같은 간식을 받아먹던 그런 곳. 세월에 바스러져 이젠 주인 할아버지는 안 계시지만, 그래도 언제나 그리운 이곳. 그녀와 처음 만났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녀와의 추억이 가득한 곳. 이곳에 그녀가 있다. 남자의 눈이 떠졌다.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가 그리움과 추억으로 일렁인다. 남자가 힘을 주어 문을 열려고 하자 덜컹, 낡디낡은 문은 어긋난 문지방에 걸려 쉽게 열리지 않는다. 남자는 몇 번 덜컹거리던 문을 완전히 열고 서점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익숙하고 그리운 묵은 책 내음과 낡은 난로 냄새, 훈훈한 공기가 남자를 반겼다. 남자는 발소리를 죽여 어느 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의 키를 훌쩍 넘을 만큼 높게 세워진 책장. 그 책장 맨 위쪽에는 ‘고전문학’이라고 적힌 작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남자는 한글과 한자, 영어로 뒤섞인 책 중 한 권을 뽑아 들었다. 남자는 무심한 눈으로 책장을 훌훌 넘겨 훑으며 이곳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을 여자를 기다렸다.
“응. 알아. 괜찮아. 얘는……. 미안할 게 뭐 있어.”
책더미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맑고 생기가 가득한 목소리. 한때 자주 들었던 웃음기 서린 그 목소리. 언제부터인가 한집에 있으면서도 듣지 못했던 그리운 목소리. 남자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는 절망. 실망. 슬픔이었다. 남자가 뒤늦게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여자는 형편없이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여자를 보는 남자의 마음 또한 처참하게 무너졌었다.
“여긴 걱정하지 마. 뭐? 아니거든. 너도 참.”
남자는 오랜만에 듣는 생기 가득한 목소리를 감상하듯 책에 고정하던 눈을 감았다. 자박자박,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그에 따라 건설 현장에서 무거운 철근을 옮길 때처럼 남자의 숨결 또한 긴장으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여자는 알까. 남자가 긴장으로 떨리는 적이 몇 번 없음을. 그 몇 번의 떨림마저도 여자와 함께 있었을 때뿐이란 걸.
“응, 알았다니까. 잔소리 그만해. 나 이제 책 정리해야 해. 이만 끊…….”
책장 모퉁이를 돌던 여자의 말끝이 흐려졌다. 남자는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짙은 눈썹 아래, 온갖 감정이 뒤섞인 검은 눈동자가 다채롭게 일렁였다. 와르르, 여자의 손에 들려 있던 책 몇 권이 바닥에 흩어진다. 남자는 발치까지 굴러떨어진 책을 주워들고 걸음을 성큼 옮겼다.
“…….”
여자 머리 위로 남자의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여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굳게 닫혀 있던 남자의 입술이 열리며, 그 사이로 나지막하고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돌아가자.”
휴대 전화 너머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여자는 답할 수 없었다. 온 신경이 뾰족하게 세워지며 눈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쏠려 친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한때 무섭기만 했던 남자. 한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산 남자. 어쩌면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을까, 기대했던 남자. 한때 제게 행복을 가져다주었던 남자. 그리고 처참하게 모든 걸 부숴버린 남자.
“재희야.”
남편 강무혁이 그녀를 데리러 왔다.
* * * H 호텔 주변을 가득 메우던 색색의 단풍잎이 어지러이 떨어지던 가을이 지나고, 그 자리에 무채색의 시린 겨울이 자리 잡았다. 잿빛으로 물든 하늘은 무거웠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조경수는 짚으로 만든 옷을 입고 콩알만 한 전구를 둘러 겨울을 맞이했다. 재희는 H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앉아 통유리 너머 펼쳐진 겨울 풍경을 무감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린 바람이 몰아치는 바깥과 다르게 H 호텔 스카이라운지는 따뜻했고,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은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여주었다. 재희는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2시 40분.’
약속 시각인 오후 3시까지 20분 정도 남았다. 오늘은 재희가 선보는 날이었다. 보통 식사 시간에 맞춰서 선을 보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맞선남이 너무 바쁜 탓에 어중간한 오후 3시로 약속이 잡혔다. 그야말로 차만 마시는 시간만 겨우 낸 거라고 말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할머니는 우리 집안을 무시하는 거냐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재희는 상관없었다. 선을 보러 나오긴 했지만, 재희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결혼에 대해 긍정적이지도 않았고, 되도록 차만 빨리 마시고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내키지 않는 선 자리지만, 20분이나 일찍 나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적어도 집보다는 이곳이 더 심적으로 편했기 때문이었다. 재희는 하얀색 라운드 셔링 블라우스와 H라인 검은색 스커트, 그에 맞춰 신은 스킨색 구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계절을 타지 않는 밋밋하고 재미없는 차림새. 평소 편한 옷을 주로 입고 다니는 재희에겐 더없이 불편했다. 재희는 다시 시선을 통유리 쪽으로 옮겼다. 오늘 옷차림새만큼이나 통유리에 비친 제 모습은 생기가 없고 표정조차 건조하다. 재희는 제 모습을 외면하듯 눈을 감았다.
‘만약 이 자리가 잘 안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그 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집에서 벗어난다. 두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지만 강하게 바라는 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긴장과 설렘으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 선 자리에 나오는 계기가 된 얼마 전 일이 머릿속에서 되새겨졌다. * * *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식사 자리. 중견회사 대표인 아버지는 새벽같이 출근을 한 상태였다. 메인 반찬과 찌개는 모두 가장 상석에 앉은 할머니와 새어머니 홍연화, 배다른 남동생인 신재혁 앞에 몰아져 있었다. 제 앞에 놓인 김치나, 김, 콩자반 따위로 죽은 듯이 식사하던 재희의 손이 멈춘 건 할머니때문이었다.
“선 자리에 나가라.”
“네?”
재희는 저도 모르게 반문하며 고개를 들었지만, 매섭게 쏟아지는 할머니의 시선에 다시 숙여야 했다.
“어디서 계집애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노려봐.”
“죄송합니다.”
재희가 얼른 사죄했지만, 할머니의 욕설은 끝나질 않았다. 웬만한 할머니의 욕설은 흘려넘겨 들었지만 언제 들어도 ‘제 동생을 잡아먹은 년, 제 어미를 잡아먹는 년’ 등의 말은 상처 부위에 소금을 얹은 것처럼 따갑고 쓰렸다. 새어머니 홍연화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맺혔고, 이복동생인 재혁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제 앞에 놓여 있는 음식을 묵묵히 먹기 바쁘다.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푹 숙인 재희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던 할머니가 말했다.
“모자란 너라도 알 게다. 네 맞선 상대는 건설회사로 이름 높은 KJ 그룹 강 회장님의 장남이다.”
KJ 그룹.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해외에서도 입지가 탄탄한 회사였다. 특히나 건설로 손에 꼽히는 기업으로, 중견기업 운영하는 재희의 집안과 하늘과 땅 차이였다. 원래대로라면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집안. 인맥을 최대한 활용해 아버지 신채근이 어렵게 가지고 온 선 자리였으나, 재희에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회사를 승계받길 바라는 강 회장님의 뜻과 달리 장남은 건축사가 돼서 따로 회사를 차렸다고 하더구나. 그래도 그 핏줄 어디 가겠니. 현재 운영하는 건축사 사무소가 탄탄한 데다 승승장구하고 있다 하더구나. 거기다 변호사 자격증까지 있으니…… 제대로 된 직업 하나 없는 너에겐 과분한 자리지.”
엄밀히 말해서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재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말대꾸를 한다면 더 큰 폭언으로 돌아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자고로 첫째 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했다. 큰 집안과 사돈 맺으면 네 아버지에게도 좋고, 마침 우리 재혁이도 건축사가 되고 싶다고 하니, 서로 좋은 게 아니겠느냐. 이 기회에 밥값을 하거라.”
재희는 결혼은 이르다고, 선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할머니의 매서운 눈초리에 입을 꾹 다물었다.
“너 같은 것도 딸이라고 아범이 직접 가져온 자리다. 그러니 이러쿵저러쿵하지 말고 선보러 나가.”
* * * 그게 일주일 전 일이었다. 애초부터 재희의 의사 따위 중요하지 않은 자리였다. 싫은 자리이지만 동시에 싫지 않은 자리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선 자리 이후로 재희는 자신의 인생이 크게 변할 거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그 집에서 벗어날 기회일지도 몰라.’
재희는 항상 독립을 갈망했다. 갑갑한 그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딱 한 번 몰래 독립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재희를 제 손안에 두고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할머니에 의해 무산이 된 것이다.
“네까짓 게 감히 가출을 해? 먹여주고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것이! 네가 정녕 우리 집안에 먹칠을 하는구나.”
친구 희수와 함께 깔깔거리며 정성껏 꾸몄던 원룸은 할머니 손에 의해 엉망이 되었다. 집주인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계약 파기를 원했고 재희는 죄인처럼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재희는 독립한 지 하루 만에 다시 집으로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손에 의해 회사를 그만둘 때처럼 또다시 재희의 자유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런데 이번엔 할머니가 먼저 선 자리를 파투 내거나, 남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집에서 쫓아내 버리겠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재희에겐 세상 그 어느 말보다 달콤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정말 괜찮을까. 정말 나 그 집에서 나올 수 있는 걸까.’
일러스트레이터로 실력을 인정받아 꾸준히 외주가 들어오고 있었다. 넉넉하진 않아도 모아둔 돈도 있고, 독립한다면 외주를 더 받을 수 있다. 그러면 그럭저럭 혼자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이 선 자리가 파투나거나 남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할머니는 과연 날 가만히 놔둘까? 오히려 집안에 먹칠을 했다며 몇 개월은 외출 금지당하지 않을까. 독립은커녕 오히려 선 자리에 재희를 물건처럼 내놓고 이리저리 굴릴 사람이었다. 재희의 할머니란 사람은. 재희의 불안한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혼란한 재희의 마음처럼 꾸물꾸물 시커멓고 무거운 먹구름이 회색 겨울 하늘을 뒤덮었다.
‘눈일까, 비일까.’
이왕이면 비면 좋겠다고 재희는 생각했다. 겨울비가 내리는,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그 겨울. 서점 할아버지가 건네준 우유 한 잔에 숨죽여 울고 있을 때, 모습을 보이지 않은 누군가가 조용히 건네준 조금 식은 피자 한 조각에서 온기를 느꼈던 그날. 주인 할아버지의 인자한 미소와 노을빛을 가득 머금은 따스한 서점의 풍경이 통유리창 너머로 아롱거린다. 겨울비라면 선 자리가 끝나고 나가는 길에 좀 걸을까 생각하던 찰나, 잔잔한 클래식이 흐르는 라운지가 웅성거렸다.
“……!”
추억에 잠겨 있던 재희가 웅성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눈앞에 갑자기 세워진 시커먼 벽에 그대로 숨을 멈추며 뻣뻣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