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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 찬란할 미래들 (2) (126/126)


외전 5. 찬란할 미래들 (2)
2023.01.16.



 
당연히 자신보다 신성력도 뛰어난 샬럿이 신성국의 왕인 아버지의 뒤를 이으려 하겠지 생각했는데.

노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리고 왕궁 말고 미로니카 황궁도 있잖아. 근데 꼭 크레미언 왕궁을 고집하는 건, 혹시 거기 꼭 가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거야?”

“뭐……, 삼촌도 외삼촌도 크레미언 왕궁에 계시기도 하고…….”

그리고 그분도 계시고.


“맞다! 샬럿 너도 들었지? 미로니카의 황녀께서 그렇게 귀여우시다던데. 나는 한번 뵙고 싶더라.”

“세 살이시던가? 지금 한참 귀여우실 나이시지. 그래도 난 왕궁이 좋아. 황궁은 필요 없어.”

프시케와 로안의 사이에서도 귀여운 올리비아가 태어나 잘 자라고 있었다.


“황궁은 필요 없다고? 그럼 왕궁에는 필요한 게 있다는 말이야? 마음에 든 뭐라도 있나 봐?”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나? 황궁은 필요 없으니 왕궁에는 필요한 게 있다니.


“어, 어?”

아무 생각 없이 되는 대로 뱉은 질문인데 샬럿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노아의 갈색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뭐야. 너 얼굴 빨간데? 진짜 왕궁에 뭐라도 있는 거야?”

“조, 조용히 해! 그,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어딨어? 그런 거 없어’도 아니고 그런 게 있다고?

노아의 얼굴이 놀람 뒤 호기심으로 장난스레 변했다.


“뭐야? 나한테만 말해주면 안 돼? 어머니도 아셔? 어쩐지! 샬럿, 왕궁에 보내 달라고 완전 열심히 조르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나! 혹시 너…….”

제법 조숙한 샬럿과 달리 노아는 순진하고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매일 붙어 지내다 보니 벌써 마음을 들킨 모양이었다. 샬럿은 긴장으로 목이 타기 시작했다.

콩닥콩닥 빠르게 뛰던 심장이 더욱 터질 듯 달리기 시작했다.


“너, 설마! 다니엘 삼촌 좋아하냐?”

“뭐? 어휴! 이 바보. 내가 삼촌을 좋아해서 어쩌겠냐!”

7세 아이들의 대화라 믿기 어려울 만큼 어른스러운 말투가 샬럿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게다가 이마를 탁! 치는 행동까지. 노아는 마치 작은 마가렛을 보는 듯했다.

동시에 샬럿은 그래도 노아가 눈치가 없어서 참말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님 말지, 왜 또 바보래! 하긴 삼촌하고는 결혼 못 하는구나.”

“누, 누가 당장 결혼하고 싶대?”

천진난만한 아이들답게 대화의 흐름이 고무공처럼 멋대로 튀었다.

갑자기 결혼이라는 낱말이 나오자, 샬럿의 얼굴이 다시 한번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꿈꾸던 미래에 그분과의 결혼도 포함되어 있지만 샬럿의 생각에도 당장은 곤란했다. 그분도 자신도 아직 7살이다.

어쩐지 평소답지 않은 샬럿의 당황한 모습이 노아의 눈에는 더욱 수상해 보였다.


‘뭐지? 저 반응은? 진짜 왕궁에 마음에 든 누군가가 있는 건가?’

이제 눈빛이 탐정처럼 빛나고 있었다.


‘설마 조숙한 샬럿이 국왕 전하를 연모하고 있는 건가?!’

검은 머리 붉은 눈에 눈부신 외모, 강력한 힘. 크레미언 국왕 전하는 그 누가 봐도 단 한눈에 반할 만큼 정말 멋진 분이니까.


‘그치만 그건 좀 많이 안 될 거 같은데? 국왕 전하 곁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비 전하가 계시잖아.’

노아는 처음 엘리제 왕비를 보던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통해 듣던 신화 속 여신, 하늘에서 신을 모신다는 천사님이나 그분처럼 아름다울 것이 분명했다. 노아는 넋을 놓고 한참이나 엘리제를 올려다봤었다.


‘그럼 이제 샬럿은 어쩌지?’

아무래도 누이의 첫사랑은 가슴 아프게 끝날 것 같아 안타까워 어쩐지 안쓰럽게 느껴졌다.


‘어제 다니엘 삼촌이 내주었던 어려운 문제를 푸는 기분이 딱 이랬는데!’

답이 없어 아득하고 어려워 답답하기만 한 기분.

노아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

왕궁에 도착한 쌍둥이는 수업을 받기 위해 별관으로 향했다. 새로 증축된 별관에는 왕과 왕비를 위한 커다란 침실과 왕자, 공주들을 위한 방, 응접실과 아이들을 위한 넓은 공부방과 놀이방이 있었다.

엘리제 왕비의 부탁으로 크레미언 국왕이 다양하게 마련해 놓은 각양각색의 아름답고 우아한 방들이 왕국의 새로운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넓어진 영토와 강력한 마력, 정령석과 뛰어난 재상의 외교 덕분에 크레미언 왕국은 번영을 다지는 중이었다.

이토록 강력해진 나라의 왕 데몬과 왕비 엘리제의 슬하에는 현재 두 아들과 두 딸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태어날 아이 하나도.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계단을 오르던 노아가 허리를 굽히고 한 손을 뒤로 한 채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하얀 얼굴이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년이 서 있었다.

차가운 인상, 하얀 피부. 검은 머리에 붉은 눈.

얼음 왕자라 불리는 크레미언 왕국의 왕세자 데이비드였다.


“어서 와. 노아, 샬럿. 기다리고 있었어.”

좀처럼 웃지 않기로 유명한 데이비드가 쌍둥이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곳곳에서 숨죽인 탄성이 터졌다.

왕궁에서 일하는 이들 모두가 신성국의 귀여운 쌍둥이와, 아름다운 왕자를 보기 위해 이 시간을 기다렸다. 데이비드 왕세자는 측근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는데 유독 쌍둥이에게는 다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왕세자의 귀한 미소를 보겠다고 근처에 몸을 숨기고 이때를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다.

시종장이 된 제레미와 왕의 비서인 하임도 가끔 함께 몸을 숨기고 아이들을 지켜볼 정도였다.

측근인 두 사람에게도 왕자와 공주의 미소는 소중해서 늘 귀한 보물처럼 느껴졌다.


“왕세자님, 오늘도 무탈하신지요?”

하루 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지만 샬럿은 반가운 얼굴로 우아하게 치마를 들어 올렸다.

조금도 흠잡을 데 없는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덕분에. 샬럿도 별일 없었지? 어서 들어가자.”

다정함이 느껴지는 따스한 말투였다. 샬럿의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하고 두근거렸다.

친절하게 쌍둥이를 친히 방까지 안내하는 왕세자를 샬럿이 먼저 성큼 따라갔다.

노아 역시 바로 둘의 뒤를 쫓았다.

세 아이가 성큼 들어서는 방 안으로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 때문일까?

노아의 눈에, 오늘따라 뒤에서 본 샬럿의 귀 끝이 유난히 붉어 보였다.


“어서 오세요, 노아 오라버니, 샬럿 언니.”

“어서 들어오세요, 두 분!”

노아와 샬럿의 등장에, 책을 펴며 수업을 준비하던 두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째 데니아와 셋째인 데이지였다. 연년생인 두 아이는 모두 인형같이 예쁜 외모에 밝은 성격이었다. 특히 데이지는 엘리제를 쏙 빼닮아 몹시 사랑스러웠다.

노아와 샬럿도 신성국의 왕자와 공주이니, 수업을 듣는 아이 다섯이 모두 왕족이었다. 두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아름다운 세 공주와 두 왕자가 한자리에 앉아 수업 준비를 위해 책을 펼쳤다.


“샬럿 언니 어제 과제가 어렵던데 다 하셨어요?”

이제 네 살이 된 데이지가 옆자리의 샬럿에게 물었다.

물론 샬럿은 숙제를 완벽히 끝냈다. 하지만 다 했다고 자랑하듯 우쭐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아 살짝 망설이던 차.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는 샬럿의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비드가 데이지에게 살며시 몸을 기울여 말했다.


“물론 샬럿은 다 했을 거야. 워낙 성실하니까. 하지만 혹시라도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질문은 조심하는 게 좋아, 이지.”

“아하! 네, 데비 오라버니.”

샬럿의 얼굴이 다시 한번 붉어졌다.

데이비드 왕세자가 방금 자신을 성실하다고 칭찬한 거 아닌가?


“난 어려워서 몇 문제는 못 풀었는데.”

노아가 불쑥 털어놓았다.


“그래요? 노아 오라버니? 저는 다 풀긴 풀었어요. 니아 언니도 다 풀었고요.”

또박또박. 데이지의 작은 입에서 솔직한 답변이 흘러나오자 노아의 놀란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엑?! 다 풀었다고?”

어제부터 끙끙대다 결국 포기하고 만 그 문제들을 다섯 살 니아도, 심지어 네 살인 데이지도 다 풀었다니!


“말도 안 돼!”

망연자실하여 외치는 노아의 모습에 모두가 참았던 웃음을 결국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하.”

맞은 편에 앉은 데이비드가 활짝 웃자, 샬럿은 그만 심장이 턱! 멎는 기분이었다.

그의 모습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워 저도 모르게 멍하니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저 환하게 웃는 것뿐인데 세상 가장 귀한 보석이 흩뿌려지는 것만 같다.


“모두 일찍 오셨군요.”

때마침 그들의 스승인 다니엘이 책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다섯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모아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스승님?”

“예, 덕분에 안녕합니다. 제자님들께서도 모두 무탈해 보이시니 바로 시작할까요?”

미래의 다섯 주인공을 위한 오늘의 수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샬럿은 살며시 귀밑머리를 넘기며 고개를 책으로 떨구었다.

살짝 숙인 동그랗고 뽀얀 두 볼이 발그레하니 진한 분홍빛 물이 들어 있었다.


 

***



“어찌 답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이른 것 아닌가 싶은데요. 올리비아 황녀가 이제 세 살이지 않아요?”

같은 시각, 왕궁의 ‘푸른 응접실’에서는 엘리제가 데몬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다.


“데이비드가 아무리 왕세자라 하여도 아직 어려요.”

미로니카 황국에서 온 서신 때문이었다.


“그저 친선을 위한 것이니 너무 부담가질 것 없습니다.”

걱정하는 엘리제의 곁으로 데몬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며 옆에 앉았다.


“아이들의 미래를 미리 정해놓는 기분이라 맘이 편치가 않네요. 저는 정중히 거절하고 싶어요, 전하.”

“나의 왕비께서 그러시다면 그리하시면 됩니다. 미리 걱정할 것 없어요, 엘리제. 아이들은 분명 행복한 미래를 잘 살 거니까요.”

데이비드는 7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점점 강해지는 왕국의 왕세자였고, 결정적으로 데몬을 이어 강력한 마력과 정령의 힘을 동시에 가진 특별한 존재였다. 어느 나라에서든 탐낼만했다.

데몬과 엘리제의 다른 아이들도 마력과 정령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첫째인 데이비드의 힘은 월등했다. 그리고 이능이 아니더라도 왕세자의 됨됨이나 능력이 출중하여 늘 주변의 뜨거운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프시케 황제께서 우리의 왕세자를 욕심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데이비드가 100일 되어 처음 프시케가 아이를 안았을 때부터, 프시케는 마치 운명처럼 데이비드를 무척이나 귀여워했었다.

이미 그때부터 프시케는 데이비드 왕세자에게 푹 빠졌었지만, 사실 현명한 여제가 계산한 이 요청에는 황궁 내 소란을 잠재우고 어린 황녀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 더 컸다.


“황제 폐하와의 우정을 생각했을 때는 약혼요청을 수락하고 싶지만, 혹시라도 데비가 좋아하는 다른 이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데비를 사랑하는 다른 이가 나타날 수도 있고요. 저는 아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로 찾았으면 좋겠어요.”

데몬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던 팔로 부드럽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우리처럼 말입니까?”

넓고 단단한 품 안에 엘리제의 몸이 폭 들어와 안겼다. 가만히 있어도 그의 심장 소리와 따듯한 숨이 느껴져 충만하게 행복했다.


“네, 우리처럼요. 우리보다도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엘리제는 고개를 들어 데몬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붉은 눈이 진득해지더니 어느새 입술이 내려왔다.

촉.

가벼운 입맞춤이지만 엘리제의 몸이 자르르 떨렸다.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신이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니까요.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 리가요.”

쿡. 데몬의 말에 엘리제가 소리 내어 웃었다.


“맞아요. 저도 무척 행복해요. 우리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사랑스러운 말에 데몬이 그대로 고개를 내렸다. 촉 초옥. 입맞춤이 조금 더 깊고 길어졌다.


“데비의 인기가 남다를 것이 자명하긴 하지요. 아름다우신 당신을 닮아서입니다.”

데몬의 말에 엘리제가 지지않고 답했다.


“매혹적인 전하를 닮아서겠지요.”

어느새 폭신한 카우치에 엘리제의 등이 닿아있었다. 대화와 입맞춤 몇 번 하는 사이 데몬이 그녀를 안은 채로 몸을 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두 사람을 모두 닮을 수밖에요. 함께 만들었으니.”

함께 만들었다.


“맞는 말씀인데…… 전하께서 하시니, 왜 이렇게…… 야하게 들리지요?”

묻는 엘리제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건 제가 그렇게 들리게끔 말을 해서일 것입니다.”

“야하게 들리게요?”

“당신을 유혹하는 중인데 모르셨습니까?”

쿡. 엘리제에게서 다시금 웃음이 터지자 데몬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설마, 지금도요? 아직 낮이에요, 전하.”

“나는 늘 당신을 원해, 엘리제.”

붉은 두 눈이 진득하고 뜨겁게 일렁였다.


“그러니 아이들의 미래 말고, 당신을 늘 갈망하는 내 마음을 걱정해. 그게 당신의 유일한 고민이면 좋겠어.”

이렇게 뜨거운 눈빛과 품 안에서 이토록 행복하다니 엘리제는 꿈만 같았다.

자신의 아이들도 이렇게 행복한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네, 그럴게요. 나의 전하.”

나의 엘리제.

나의 데몬.

그들은 서로를 부르며 다시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었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품과 숨결이 아득할 만큼 좋았다. 부족함 없이 충만하고 황홀한 행복감에 휩싸여 엘리제는 그저 믿기로 하였다.

두 사람이 앞으로도 뜨겁게 서로를 사랑할 것임을.

아이들의 미래는 그들의 미래보다 더 찬란할 것임을.

그렇게 아이들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멋지게 꽃피울 것임을.

그리하여 언젠가 두 사람의 아이들 이야기도,

자신이 빙의하게 되어 새로 쓰게 된 이 이야기처럼,

한편 한편이 작품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는 전설이 될 것임을.

왕국의 아름다운 왕과 왕비의 그림자가 하나가 되어 오래도록 행복하였다.

<집착 황제의 첩인데, 곧 죽게 생겼습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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