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찬란할 미래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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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찬란할 미래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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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찬란할 미래들 (1)
2023.01.12.
“혹시 아이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릴 생각 없느냐, 엘리제?”
“예?”
갑자기 프시케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엘리제에게 물었다.
“가족 초상화를 그릴 생각이긴 합니다만. 왜 그러시나요, 폐하?”
엘리제의 예지몽 때문만은 아니지만 엘리제와 데몬에게는 가족 초상화가 갖는 의미가 남달랐다. 그래서 안 그래도 두 사람은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그림을 남길 예정이었다.
“데비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남겨달라 부탁하고 싶었다. 꼭 그려다오. 그리고 내게도 한 장 보내줄 수 있느냐?”
본래 귀족이나 왕가는 기념할 만한 일을 궁중 화가를 시켜 그림으로 그리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프시케의 말이 크게 의아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아이 그림을 그리라고 권하는 건 드문 일이었고 프시케의 성정을 생각해 볼 때 그녀의 부탁은 엘리제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보내드릴 수 있지요, 폐하.”
엘리제가 환하게 웃었다.
“정말 아이가 너무 예쁘구나. 나는 진정 데비에게 사랑에 빠진 기분이란다. 로안에게도 데비의 모습을 당장 보여주고 싶을 정도야.”
그제야 엘리제는 어렴풋하게 프시케의 속내가 느껴졌다.
‘데비가 정말 마음에 드셨구나. 아마 폐하께서도 아이를 갖고 싶으신가 봐!’
로안이 프시케와 같은 생각이라면 참 좋을 텐데.
그가 엘리제 덕에 살아나고 죽을 고비를 넘기더니 완전 딴사람이 된 것 같다는 소문은 작년부터 유명했다.
매일 프시케를 위해 꽃을 꺾어 선물하고, 그녀를 보필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내조에 필요한 살림, 철학, 예법, 병법까지 다시 공부하는 등.
자나 깨나 프시케밖에 모르고 그녀를 진정 아끼는 애처가가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엘리제가 첩이었을 때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으나, 사실이었다.
이제는 황제 프시케와 반려인 로안이 역대 미로니카 황가의 부부 중 가장 사이가 좋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없었고, 그것은 프시케의 임신과 출산 기간동안 황국 국정에 빈틈이 생길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들 때문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프시케의 결혼생활이 예전보다 행복하다면 엘리제에게도 가장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엘리제가 조심스레 프시케에게 물었다.
“폐하, 통치하심에 어려움이 있지는 않으신지요?”
“괜찮단다, 엘리제. 걱정해주어 정말 고맙구나. 로안이 뜻밖에도 아주 큰 힘이 되고 있다.”
마치 엘리제의 생각을 잃은 듯이 프시케가 로안을 언급하며 활짝 웃었다.
그 미소만 보아도 그녀가 조금도 꾸밈없이 현재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이에요. 행복해 보이셔요.”
엘리제가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응, 행복하단다.”
프시케는 데비를 엘리제의 품으로 전해주면서도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아이는 그녀를 향해 연신 방긋방긋 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아마, 더 행복해질 준비가 된 것 같구나. 나와 로안 사이에도 아이가 생긴다면 두 아이를 친구로 맺어주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아이를 바라보며 웃는 여제의 모습에서 엘리제는 프시케의 미래를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저 역시도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폐하.”
***
하나의 방을 가득 채울 만큼의 출산 축하선물을 남기고 프시케는 반나절 만에 미로니카로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황제가 길게 자리를 비우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기 때문이었다.
사려 깊은 프시케답게 그녀는 떠나기 전 엘리제의 안부와 함께 데비의 건강도 축복해주었다.
“대공국에 이미 충분한 양의 정령석도 있고, 또 데비는 폭주할 일이 없을 테니 정말 다행이구나!”
프시케는 진정 제 일처럼 기뻐했다.
강대한 마력과 정령의 힘을 조화롭게 가진 데몬의 아들 데비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두 힘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엘리제 역시 임신 후 건강이 조금씩 회복되었고, 믿을 수 없게도 출산 후 더욱 건강해졌다. 데몬은 그녀의 꿈이 현실로 실현되어 가는 것에 안도함과 동시에 왜 그림 속 아이가 많았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왕궁을 나서던 프시케가 엘리제의 두 손을 꼭 잡고 물었다.
“부디 건강해라 엘리제. 종종 데비를 보러 와도 되겠느냐?”
“물론이지요, 폐하. 데비가 조금 더 크면 제가 데리고 찾아뵙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오면 되니 염려 말아라, 엘리제.”
슬쩍 데몬의 눈치를 보며 그녀가 황급히 손을 휘젓고 작별 인사를 했다.
“전하께서도 건강하세요. 또 뵙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폐하.”
프시케와 데몬의 인사도 미소로 이어졌다.
그렇게 황제를 태운 황금빛 마차는 황국을 향해 출발했다.
*
손님 배웅을 마친 후, 엘리제는 데몬과 함께 직접 데비를 목욕시키고 재우기 위해 침대에 몸을 기대었다. 유모와 시종들이 물론 있었지만, 목욕과 수유는 엘리제 부부가 반드시 늘 함께하는 일정이었다.
엘리제가 수유를 하고 나자, 데몬이 데비를 안아 등을 쓸어 내리며 토닥였다.
한참 뒤 아기가 작게 공기를 뱉어낸 후에야 두 사람은 부부의 침대 바로 곁 아기침대에 데비를 눕혔다. 잠든 아가의 배를 토닥이며 자장가를 흥얼거리는 엘리제의 등 뒤로 데몬이 다가와 허리를 감싸 안았다.
“프시케 폐하를 오랜만에 뵈어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네, 정말 좋았어요. 친언니를 만난 것 같이요.”
그 말에 데몬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엘리제가 미로니카에 프시케를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을 알면서도 번번이 그녀의 외출을 막아왔으니까.
아무리 사람들이 로안이 갱생했다 주장하여도, 데몬은 사람은 다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특히 한번 변화했던 경험이 있는 자라면, 더더욱.
하지만 사실 로안을 믿지 못한 마음보다, 자신이 엘리제와 한 시도 떨어지기 싫은 마음 때문에 타국에 보내지 못했던 것이 컸다. 일국의 왕이 되니 자리를 비우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리 좋으셨다면 다음부터는 저와 함께 가시지요. 이제는 다니엘에게 맡기고 함께 다녀와도 될 듯합니다.”
“정말요? 너무 좋아요!”
엘리제가 기쁜 마음에 몸을 돌려 데몬을 마주 안자, 그가 포근히 그녀의 등을 끌어안으며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향기로운 체취가 그를 만족스럽게 감쌌다.
새로이 독립한 나라를 정비하여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일정 기간이 필요했었다.
데몬은 어느 정도 나라의 중요 직책을 맡을 인재들을 뽑아 다니엘과 함께 교육해왔고 이제는 자리를 많이 잡아 든든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든든함에는 새로 신성국의 성하가 된 미카일도 끼어 있었다.
***
새벽의 어둠이 신성국에도 드리웠다.
“으앙!!”
성하께서 머무시는 신성한 저택 ‘하얀 탑’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시원하게 울어대는 목소리가 하나가 아닌 둘이다.
“여보……. 노아, 샬럿 깼어요.”
“내, 내가 가리다.”
지친 마가렛의 부름에 대답하며 미카일은 천근보다 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아기침대로 향했다. 조금 전 겨우 몸을 누인 마가렛은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남아 있질 않았다.
침대에서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밀색 머리의 남자아이 하나와 갈색 머리 여자아이 하나.
두 사람 사이의 아이는 이란성 쌍둥이였다.
축복도 기쁨도 두 배가 되었으나, 막 성하로 즉위한 된 탓에 미카일은 육아와 업무가 동시에 몰아치는 폭풍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기저귀가 젖은 건 아닌데 배가 고픈 모양이요, 부인.”
“……샬럿부터 제게 데려와 주세요.”
마가렛이 눈도 못 뜬 채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도우미도 유모도 여럿이었지만 쌍둥이는 유난히 손을 탔다.
부모의 품이 아니고서는 자지러지게 우는 탓에 사람이 있어도 쓸 수가 없었고, 마가렛과 미카일 두 사람은 피골이 상접 해 있었다.
6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 밤에 배가 고프다고 깨어 우는 쌍둥이 덕분에 두 사람이 푹 자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임신했을 때는 입덧 때문에 고생이었고, 달이 차오를수록 두 배로 무거운 몸 때문에 고생했던 마가렛은 이제 어린 아가들 보기가 힘에 부쳐 매일 기절하듯 잠들기 일쑤였다.
그나마 미카일이 가진 신성력으로 매일 치유 마사지를 받지 않았더라면 정말 울며 쓰러졌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쪽쪽.
야무지게 딸 샬럿이 젖을 빠는 소리가 들렸다. 마가렛이 수유를 하는 동안 미카일은 우는 노아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얼마 후 두 아이는 배가 부르자 언제 울었냐는 듯이 다시 마가렛의 품에서 잠들었다. 마가렛 역시 아이들과 함께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깊이 잠들어 있었다.
미카일이 꾸벅꾸벅 졸면서도 마가렛에게 안마를 시작했다. 눈 부신 빛이 그의 손에서 쏟아지고 마가렛과 쌍둥이의 표정이 더욱 편안하게 바뀌고 있었다.
***
“노아! 샬럿! 왕궁에 갈 시간이다.”
“네, 어머니!”
대체 언제 다 크냐고 투덜대었던 것이 엊그제만 같은데.
미카일과 마가렛의 쌍둥이들이 벌써 7살이 되었다.
쑥쑥 자라 어느새 제법 큰 아이들을 보며 마가렛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아이들의 방을 나가자 책가방을 손에 든 샬럿이 외쳤다.
“이러다 수업에 늦겠어, 노아!”
성장도 배움도 모두 노아보다 한 뼘 빠른 샬럿은 마치 누나처럼 잔소리를 했다.
“알았어, 샬럿. 금방 챙길게, 재촉하지 마.”
앞니가 하나 빠진 노아가 서둘러 가방에 책들을 넣었다.
“어휴! 미리 챙겨놨어야지!”
“숙제하느라 그랬지. 스승님 숙제는 너무 어려워. 난 차라리 다시 어머니께 배우면 좋겠다고.”
이가 빠진 탓에 노아의 발음이 샜다.
“일국의 재상께 배우는 건 엄청난 행운이라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그리고 난, 숙제 별로 어렵지 않던데?”
“칫, 넌 원래 뭐든 잘하잖아. 삼촌한테도 맨날 칭찬받고.”
노아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스승님은 그들의 삼촌, 이젠 왕국이 된 크레미언국의 재상 다니엘이었다.
샬럿은 노아뿐만 아니라 또래 아이들보다 명석하여 눈치도 빠르고 배움도 빨랐다.
덕분에 모든 곳에서 칭찬이 자자했는데, 그런 샬럿이 아무리 노력해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아이들이 왕궁에 있었기에 샬럿은 자신도 왕궁에서 배우고 싶다고 미카일을 조르게 되었다.
노아는 쌍둥이 누이 때문에 원치 않은 공부를 덩달아 하게 된 셈이었다.
“왕자님과 공주님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어! 난 더 잘하고 싶다고!”
“내 생각은 좀 달라, 샬럿. 왕자님이랑 공주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천재셨어.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가문에 흐르는 피가 다르다고 하셨는걸.”
“그러니 더욱 열심히 배워야지! 나는 나중에 삼촌과 외삼촌처럼 그분들 곁에서 힘이 되고 싶단 말이야.”
샬럿의 꿈은 다니엘처럼 궁에서 나라를 위해 일하는 행정관이 되거나, 하임처럼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보좌관이 되는 것이었다.
“그럼 너는 그렇게 해. 나는 아버지 뒤를 이어 신성국을 지킬게.”
노아가 어깨를 펴며 호언장담했다. 가슴을 두드리며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어쩐지 아버지인 미카일의 흉내를 내는 것 같아 웃음이 터졌다.
“푸하하하. 표정이 아버지가 잘난 척하시는 거 같아! 그래, 노아. 네가 꼭 신성력을 잘 다루게 되면 좋겠다.”
채비를 마친 두 아이가 서둘러 밖으로 달려 나갔다. 쌍둥이가 다람쥐처럼 날쌔게 마차 안으로 오르고 둘의 호위 사제까지 마부 옆에 자리를 잡자 마가렛이 배웅을 했다.
“오늘도 잘 배우고 오너라, 사랑하는 아가들!”
“예, 어머니. 다녀올게요!”
샬럿의 의젓한 인사 뒤로 노아가 천진난만하게 외쳤다.
“어머니께서도 뒤보리 크림 열심히 만드세요. 참, 제 블루베리 파이도 잊지 마시고요!”
“어머나, 엄마의 사업까지 걱정해주는 거니?”
7살 아들의 인사에 마가렛은 웃음이 났다. 엘리제가 물려준 화장품 ‘뒤보리 크림’ 사업은 아직도 마가렛이 잘 운영 중이었다.
정령수 대신 비슷한 효과를 내는 재료와 성분을 찾느라 초반엔 고생을 좀 했지만, 현재는 신성국에서 납품하는 이 효과 좋은 크림을 찾는 이가 더욱 많아졌다. 덕분에 마가렛은 사업가로도 성장하는 중이었다.
“파이도 잊지 않고 잘 챙길 테니 스승님 말씀 잘 들어라, 노아! 샬럿도 잘 다녀오렴!”
간식 주문까지 마친 쌍둥이들을 실은 마차가 드디어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왕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두 아이를 위해 데몬이 보내준 은빛 마차에는 아이들을 위한 보호 마법과 먼 거리도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마법이 걸려있었다. 편안히 몸을 기대어 앉은 노아가 옆자리 샬럿에게 물었다.
“근데, 샬럿! 너는 나보다 신성력도 강하면서 왜 왕궁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