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당신을 닮은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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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당신을 닮은 아이
2023.01.09.
붉은 눈이 커져 당황으로 흔들렸다.
“아이…… 말씀이십니까?”
혹 그녀가 어디에서 부족함을 느낀 것일까.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던 것일까.
남편이나 결혼이 만족스럽지 않아 아이를 통해 대신 만족감을 느끼는 유부녀들도 많다고, 예전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데몬은 엘리제의 몸 상태를 걱정하느라, 그녀가 먼저 아이를 원한다고 말할 경우는 생각해보지 못한 터였다.
둘만의 관계가 혹 그녀는 부족하게 느껴졌을 수 있지.
더구나 그녀는 이세계(異世界)에서 왔으니 자신들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졌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몸이 예전과 다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설마…….’
데몬은 조심스러운 생각에 천천히 엘리제를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리제는 말을 이었다.
“네, 아이요. 체력이 부족한 것 같으니 갖기 전에 운동으로 건강을 챙기고 싶어요. 요즘 몸이 너무 약한 것 같거든요.”
왕비로서 맡은 소임을 다 하고 아이도 갖고 싶다고, 그녀가 그의 품에서 조잘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럽고 안타까워 데몬은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벅차오르는 복잡한 감정에 말을 이을 수가 없다.
그러자 엘리제가 흠칫 말을 멈추었다.
“혹시, 데몬……. 아이를…… 싫어하세요?”
남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그녀를 데몬은 더욱 꽉 끌어안았다.
자신의 침묵이 그녀를 더 난처하게 한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당신의 아이라면.”
그러자 엘리제의 붉은 입술이 뾰로통 삐져나왔다.
“제 아이라뇨. 당신과 제 아이예요.”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그녀가 다른 사람과의 아이를 생각할 리 없지 않은가.
붉은 눈을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가 못마땅한 빛을 띠며 반짝였다. 데몬은 그 눈빛에 항복을 선언했다.
“제가 실언하였습니다. 당연히 당신과 제 아이입니다. 이왕이면 당신을 닮은 아이라면 더욱 사랑스럽겠지요.”
“저는 당신을 닮은 아이를 갖고 싶은데요.”
붉은 눈이 부드럽게 휘며 살짝 웃었다.
“예, 어느 쪽을 닮든 분명 소중한 아이일 테지요. 그보다 엘리제, 혹여 제가 부족하였습니까? 저 하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셨습니까?”
“네? 무슨 말씀이셔요! 그럴 리가요!”
데몬을 닮은 아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찰 만큼 행복한데. 데몬은 그녀와 생각이 다른지 질문하는 낯빛이 어두웠다.
“혹여 제가 미흡하여 부인께 아이에 대한 갈망이 생기도록 한 것은 아닙니까?”
행여나 결혼생활에 부족함을 느껴 아이를 통해 허전함을 달래려는 것이면 안 된다.
“그런 것이라면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아이를 원하게 된 것이 아녜요. 저는 원래 아이를 좋아했어요. 당신과 둘만도 이렇게 행복한데 우리를 닮은 아이까지 있다면 얼마나 더 행복할까 생각했을 뿐이어요.”
엘리제는 솔직한 마음을 말했다. 그녀의 단단한 어조에서 쉽게 뱉은 말이 아님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전하께서는…… 아이를 원치 않으시나요? 제가 당신을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 말씀드려도 어쩐지 근심 있는 어두운 표정이셔요.”
“아닙니다. 다만 어두운 표정은……, 당신께 미안했을 뿐입니다. 몸이 약하다 스스로 느끼실 정도인데, 제가 잘 챙기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게 어째서 전하의 탓인가요. 제가 본래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겠죠.”
데몬은 그 말에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영혼이 몸에 들어와 있다고 하여도, 원래 제 몸이 아니었던 거잖아요. 그래서인지 정령의 힘이 사라진 후로는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기분이 종종 들었거든요. 마치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요.”
“!”
역시,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나 보다.
마지막 말에서 데몬의 몸이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세요, 전하? 제가 놀라게 해드렸나요?”
굳은 그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엘리제가 물었다.
그녀에게 숨기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듯했다. 이렇듯 그녀가 느끼고 있었으니.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데몬이 붉은 눈을 들어 올렸다.
“당신이 걱정되어 아이는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몸에 기운이 없으신 것이 느껴져서…… 무리가 될까 두려웠습니다.”
아이를 가지면 그 아이가 가진 마력 덕분에 몸이 잠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겠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엘리제가 건강을 잃을까 봐 그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출산 이후는 어떠할까.
그녀의 몸이 계속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제 몸은 걱정 마세요. 제가 정령의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예지몽을 종종 꾸었던 거 기억하시죠?”
고개를 들어 올리며 엘리제가 여전히 데몬의 품에 안긴 채 해사하게 웃었다.
“예, 기억합니다.”
환하게 웃으니 그녀의 모습이 눈부셔 눈이 시렸다.
데몬은 엘리제의 보석 같은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때 꾸었던 꿈 중에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었어요.”
‘이름’에 대한 꿈.
“엄청 큰 가족 초상화 앞에서 당신과 대화를 나누던 꿈이었어요. 꿈속 초상화를 통해 전대 대공 각하와 대공비 마마의 모습도 보았고요.”
데몬의 눈이 떨려왔다. 그동안 엘리제가 이런 꿈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당신의 어릴 적 모습도 그려져 있었어요. 꿈을 꾼 당시에는 그게 혹여 당신의 상처를 건드리는 일이 될까 봐 말을 꺼내지 못했었어요.”
데몬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있었으니까.
“그 꿈속에서, 사실 우리의 초상화도 보았거든요.”
“우리 말씀이십니까?”
데몬은 그녀의 이야기에 더욱 귀 기울이기 위해 그녀를 안아 올려 눈높이를 맞추었다. 엘리제의 길고 하얀 두 팔이 그의 어깨에 살며시 걸쳐졌다.
“네. 지금의 당신을 너무 닮은 모습이라 꿈을 꾼 직후엔 어릴 적 당신이라 생각했었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여자 형제가 없지 않아요?”
그는 다소 놀라 대답했다.
“맞습니다. 저는 외동입니다. 당신께서 보신 그림 속 아이는 혹, 한 명이 아니었습니까?”
데몬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녀의 말대로 그 꿈이 예지몽이라면, 그녀는 아이를 여럿 낳고 건강히 그의 곁에 있어 줄 수 있다는 말이 될 테니까.
“네. 남자아이 하나, 여자아이 둘이었어요.”
셋이나?
“당신께서 산통으로 힘드실 것을 생각하면……. 제 예상보다는 여럿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사랑의 결실이라 생각해요. 매일 밤 저를 그토록 아끼시면서 설마 아이가 하나뿐일 거라 생각하셨어요?”
“!”
데몬은 할 말을 잃었다.
분명 엘리제만 건강하다면 자신은 그녀를 닮은 아이를 하늘이 주시는 만큼 갖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예?”
붉은 눈이 이번엔 당황으로 흔들렸다.
“다음 초상화에서는 분명 제가 아주 어린 남자아이도 안고 있었거든요.”
“넷, 넷입니까? 부인의 모습은 건강했습니까?”
“무슨 서운한 말씀이세요! 더 낳을 수 있을 만큼 얼굴이 좋던데요?”
작은 희망과 기대로 부풀었던 그의 가슴이 이젠 정말 터질 듯이 뛰었다. 그때까지 엘리제가 건강하다는 것도 기쁜 일이었고, 자신이 네 아이의 아빠가 될지도 모른다니.
행복감도 네 배가 되는 기분이었다.
“어디까지나 꿈일 뿐이어요. 그림 속 여인이 저와 비슷한 외모일 뿐, 제가 아닐 수도 있고…….”
“당신이 분명합니다, 엘리제.”
그녀 말고는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여인은 없으니까.
“당신께 어찌 말을 드려야 할지 몰라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소중한 꿈을 먼저 꾸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이를 갖게 되면 그녀의 건강을 잃게 될까 걱정이었는데 엘리제의 예지몽 이야기를 들으니 기운이 났다.
정령의 힘을 잃고 나서는 예지몽을 꾼 적이 없었다.
힘을 잃기 전에 꾸었던 꿈이니 이전에 꿈들과 마찬가지로 미래를 본 꿈이 맞지 않을까?
“꿈속에서 함께 아이들 이름을 고민하고 있었어요. 데몬 당신을 잇는 이름이라 이름까지도 닮게 하고 싶었거든요. 데온, 데니아, 데렐, 그리고…….”
데몬은 아이들의 이름을 종알종알 읊어대는 입술을 바라보다 그대로 삼켜버렸다.
“전, 전하!”
짧지만 뜨거운 입맞춤 덕에 엘리제의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의 촉촉한 입술을 엄지로 쓸며 그가 말했다.
“아이의 이름은 천천히 함께 고민해 보고 싶습니다. 그보다 몸을 챙기실 약과 가벼운 운동부터 시작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신 뜻이 그러하심을 알았으니 더 망설일 이유가 없을 듯합니다.”
대답을 듣고 엘리제의 눈에도 그제야 안도의 빛이 찾아왔다.
“고마워요. 정말 바라던 일이었어요.”
사랑하는 당신을 닮은 아이를 갖는 일.
고마움의 뜻이라며 그의 목에 둘렀던 팔을 끌어당겨 엘리제가 입을 맞추었다.
“지금 당장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네?”
방금 그녀가 왕의 허락을 받은 거라 생각했는데, 이번엔 자신이 허락할 일이 남았던가?
“첫째를 만드는 일 말입니다. 일단 넷이라면 아주 부지런해야겠습니다.”
“앗!”
말을 함과 동시에 그가 그녀를 안은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침실로 향했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긴 손가락이 안아 들고 있는 그녀의 드레스 등 지퍼를 내렸다.
“데몬! 하지만 아직 훤한 낮이잖아요!”
“그러니 지금이어야 합니다. 밤이라면 제가 너무 기뻐서 당신을 또 무리하게 할지도 모르니까요.”
그의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는지 붉은 눈이 일렁이며 진득하고 열정적인 빛을 띠었다.
‘맙소사.’
엘리제는 저도 모르게 자신이 불어낸 야수 앞에 침을 꼴딱 삼켰다.
***
일 년 후, 크레미언 대공국은 영토를 넓히고 착실히 왕국으로 발돋움하였다. 그사이 엘리제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였고, 그토록 바라던 아이가 생기는 기쁜 일도 겪게 되었다.
곧 왕비 엘리제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이웃 나라에도 닿았다. 미로니카와 시에델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축하 인사와 선물이 도착하였다.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 되는 날.
황제 프시케는 축하를 위해 귀족들을 설득하여 직접 마차 가득 선물을 들고 데몬과 엘리제의 나라에 방문하였다.
“엘리제!”
“황제 폐하!”
밝은 표정으로 서둘러 나오는 엘리제를 향해 프시케가 달려갔다. 프시케가 황제의 자리에 앉은 후 처음 만나는 것이니 몇 년 만의 재회였다.
“찾아뵙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친정 식구를 만난 듯이 반가운 마음에 엘리제는 울컥하였다.
“무슨 말이냐. 나 역시 미안하구나, 정말 보고 싶었다.”
두 사람은 오래전에 헤어졌던 자매가 상봉하듯 서로를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을 두 사람 뒤에서 데몬이 미소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로안 국서께서도 건강하시지요?”
“응. 이제 혼자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였단다. 모두 네 덕이구나, 엘리제. 그의 목숨을 구해주어 정말 고마워.”
“그 말씀은 전에도 몇 번이나 하셨어요.”
“백번 천번 고맙다 해도 부족할 만큼 네게 큰 은혜를 입었지 않느냐. 그나저나 아이라니, 정말 축하한다. 국왕 전하께도 축하 인사드립니다.”
프시케의 존대와 인사에 데몬도 예를 갖추어 인사를 나누었다.
한때 황비와 대공이었던 두 사람은 이제 국경을 나란히 하는 두 나라의 황제와 왕이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친 데몬이 잠시 나가서 아이를 직접 품에 안고 응접실 푸른 방에 나타났다. 아이를 품에 안은 모습이 무척이나 익숙해 보였다.
“세상에! 엘리제, 아빠를 쏙 빼닮은 아이로구나! 한번 안아봐도 될까?”
“물론이지요, 폐하. 영광입니다.”
프시케는 천사 같은 아이를 받아 품에 안았다.
몹시도 작고 부드러운 생명체가 놀라우리만큼 아름다웠다.
왜 흔히 갓난아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모습에 비유하는지 프시케는 알 것 같았다.
아이는 엘리제가 예지몽에서 본대로, 데몬을 그대로 닮은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크레미언 가의 장자였다.
“아이의 이름은 정했는가?”
“데이비드라 하였습니다. 저는 데비라고 불러요.”
“세상에! 정말 사랑스러운 데비구나.”
프시케가 아이를 엘리제가 알려준 애칭으로 부르며 고개를 내려 눈을 맞추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가가 프시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배냇짓을 하였다.
“!”
아이는 원래 다 이렇게 이쁜 것인가!
프시케는 말 그대로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