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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왕의 고민 (123/126)


외전 2. 왕의 고민
2023.01.05.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가 놀라 크게 열렸다.


“전, 전하!”

“맛보고 싶은 것이 파이라 한 적 없습니다.”

당당한 데몬의 말에 더욱 당황한 엘리제는 이제 볼이 아니라 얼굴 전체가 붉어졌다.

어찌 된 것인지 그의 속삭임과 뜨거운 손길은 매일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고 매번 몸과 마음이 달아올랐다.


“말씀을…….”

엘리제의 말을 끊고 데몬이 조금 더 깊이 입을 맞추었다. 그 바람에 그녀는 접시와 포크를 든 채 굳어버렸다.

그는 이런 그녀의 모습을 사랑했다.

커지는 동공으로 오롯이 그의 모습만을 담는 금안을.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살짝 벌어져 반짝이는 향기로운 입술을.


“당신이 너무 좋습니다.”

그가 입을 떼어내며 숨을 뱉듯이 고백했다.

설렘에 떨리는 눈동자, 오르내리는 숨을 따라 잘게 진동하는 동그란 어깨까지.

그녀의 모든 것이 미칠 듯 좋았다. 매번, 매일 보아도 질리지 않을 만큼.

뜻밖의 고백을 들은 엘리제는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뛰고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하지만 파이는…….”

데몬이 굳은 엘리제의 손에서 접시와 포크를 가져와 치우며 말을 이었다.


“역시, 아직 맛을 알기에는 한참 부족합니다.”

“데몬!”

커다란 몸이 그녀를 다시 침대 위로 쓰러트리며 단숨에 그녀의 입술을 삼켜버렸다.

이러려고 가져온 파이인가요!

입 밖으로 뱉지 못한 말은 그녀의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한참 뒤, 입 안까지 샅샅이 훑어 맛을 본 후에야 그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엘리제는 겨우 찾은 입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붉은 시선과 함께 뜨거운 입술이 그녀를 향해 다시 내려왔다.

길고 긴 밤의 시작이었다.


 

***



“전하, 새벽 훈련 다녀오십니까?”

어둑했던 하늘이 동쪽 끝부터 서서히 불타오르며 밝아오고 있었다.

날을 꼬박 새워 훈련을 마친 데몬에게 하임이 수건을 들고 다가오며 물었다.


“왕비는?”

“아직 주무십니다.”

당연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자신의 품에 있었으니 많이 고단했을 것이었다.

곤히 잠들었을 그녀를 생각하며 데몬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

아무도 모르는 국왕의 고민은 날이 새어 아침이 되어도 이어졌다.

사실, 새벽 훈련은 머리를 맑게 하기 위함이었다.

엘리제의 곁을 지키고 조금 더 온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연무장을 찾았다.

지난밤, 그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온몸과 마음을 다해 그녀를 안았다.

그것이 그녀를 위한 최선이었다.

물론 매일 품에 안고 또 안아도 그녀를 향한 마음을 채우기에는 부족했기 때문도 있다.

매일 밤을 부서져라 안고 사랑을 속삭여도 더욱 더 사랑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히 솟았으니.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정령의 힘이 사라졌으니 시에델을 떠나면 생명이 줄어드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능이 모두 사라져 평범한 인간이 된 그녀는 더욱 그가 잠시도 품에서 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녀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고, 바람 불면 날아갈 듯 연약하게 느껴졌다.


‘처음엔 다행이라 생각했건만…….’

정령의 힘은 그동안 자신과 엘리제를 이어준 능력이자 동시에 그녀의 삶에 족쇄이기도 했기에 힘이 사라졌을 때 데몬은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곁에 살아 있다는 그 사실에 감사할 뿐.

그러나 곧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의 힘은 마지막 소멸의 순간, 데몬에게 모두 담겼다.

덕분에 데몬은 마력과 동시에 정령의 힘도 가진 유일한 존재가 되었지만 그 대신 엘리제의 몸에 남은 힘이 아무것도 없게 된 것이었다.

특별한 힘을 가졌던 이가 그 힘을 모두 사용하고도 살아남은 적이 그동안 없었기에, 힘을 잃은 후의 상태에 대해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엘리제의 생명이 고갈되어간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차렸을 때, 데몬은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밤을 함께 보낼 때마다 품속에서 그녀의 생명이 차오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일을 밤낮없이 간절하게 그녀를 보듬고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녀의 볼에 생기가 돌 때야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욕심내어 지나치면, 엘리제의 체력이 버티질 못해 역효과가 났다.

데몬은 편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살아 있으나 생명의 기운이 손에 담은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며칠 버틸 만큼의 생명을 데몬이 매일 그녀의 몸에 채워 넣고 있어 목숨이 유지되는 상황이었다.

그마저도 넘치거나 부족한 날이면 엘리제는 잠에 빠져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편히 재운 날, 데몬이 곁에 없는 날 그녀가 더욱 피곤해했던 것이 그 때문이었다.

***

훈련을 마친 데몬이 집무실로 들어오자, 이른 아침임에도 다니엘이 그를 깍듯이 맞이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전하.”

“오늘도 철야인 건가?”

다니엘 곁에 높이 쌓인 서류더미를 바라보며 데몬이 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주군께서 주무시질 않는데 제가 어찌 잠을 이루겠습니까.”

다니엘은 재직 1년도 되지 않아, 젊은 철혈 재상이라고 인근 국가에까지 명성이 자자했다.


“귀한 능력과 충심은 고맙지만, 자네가 쓰러지면 나라가 위험하니 잠은 푹 자둬.”

“명심하겠습니다.”

그만큼 그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농이 섞인 말이었지만 다니엘은 당연한 듯 자연스레 대답했다. 예리한 갈색 눈은 주군의 어두운 얼굴을 순식간에 읽어내었다.


“왕비 전하께 아직 말씀 못 드리신 겁니까?”

“……원치 않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데몬은 다른 일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으면서 아내에 대한 일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조금이라도 걱정이 되는 일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미로니카의 방문을 막은 것도 로안이 엘리제를 보고 다시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될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래도 왕비 전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전하.”

다니엘은 진지하게 다시금 간언했다.


“…….”

왕은 말이 없었다. 그녀에게 괜한 고민을 안겨주게 되는 건 아닐까? 안 해도 되는 걱정을 하게 하고, 원치 않는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 염려되었다.


“그리고 그 방법 외엔 없다는 것을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왕비께서도 분명 받아들이실 겁니다.”

그녀가 몸 안에 ‘이능’을 다시 잉태하는 방법.

대대로 마력을 가진 크레미언 가(家)의 장자는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마력을 지닌다.


“원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왕비 전하께서는 분명 아이를 좋아하실 겁니다, 전하. 여쭙지 않고는 모르는 일입니다.”

모르는 일이긴.

말만 꺼내도 그녀가 오해하게 될 것이 분명한데.


‘혹 아이를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엘리제는 내가 아이를 원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녀라면 주저 없이 바로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정말 그녀가 아이를 좋아하고 갖고 싶어 한다고 하여도.

아이가 그녀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건강한 여인도 마력을 가진 아이를 잉태하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하물며 엘리제는 홑몸인 상태로도 생명이 부족한 판인데…….’

아이를 갖는 일은 그녀의 모든 것을 거는 일이 될 것이었다.

붉은 눈이 무섭도록 차가운 빛을 띠고 철의 재상을 돌아보았다.


“다니엘, 함구하라.”

다른 안전한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절대 그녀는 알아서는 안 되었다.

***



“오늘은 몸이 좀 개운하네?”

충분히 잔 것도, 늦잠을 잔 것도 아닌데 구름 위에 누워있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

몸이 붕 뜨는 느낌.


“분명…… 잠을 얼마…… 못 잤는데?”

말을 하며 드문드문 밤사이 데몬과의 시간이 떠오르자 절로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리자 마치 곁에 있는 것처럼 그의 시원한 향기가 훅 느껴졌다.

옆자리는 비어 있지만, 어슴푸레 그가 이마에 입을 맞추며 아침 일찍 정무를 보러 가겠다 내게 속삭였던 것이 생각났다.


“……행복하다.”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데몬와의 순간은 너무나도 달콤하여 마치 입 안에서 녹아 사라지는 솜사탕처럼 순식간에 흘러버렸다.


“그런데 너무 저질 체력이다.”

아무래도 운동을 시작해야겠다. 오후만 되면 너무 피곤해.

봄도 아닌데 병든 닭처럼 볕 아래에서 꾸벅꾸벅 조는 것도 한두 번이지.

모르는 이가 보면 내가 임산부인 줄 알겠다.

진짜 산모인 마가렛은 완전 씩씩한데.


“왕비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문 앞에서 시종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응, 일어났어.”

“전하께서 식사를 함께하시고자 기다리고 계십니다.”

데몬이? 지금 점심시간도 지났을 텐데.

설마 나와 먹으려고 쭉 굶은 건가?


“서둘러 갈 수 있게 준비를 도와주겠어?”

나는 평소 즐겨 입는 분홍색 시폰 드레스를 고르고 가볍게 꾸민 후에 데몬이 기다리고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내가 좋아하는 핑크 뮬리를 정원 가득히 심어놓은 곳이었다.

그곳에 하얀 정복을 입은 데몬이 내 쪽을 향해 서 있었다.

빗어 넘긴 검은 머리가 햇빛을 받아 윤이 나고 반듯하게 잘생긴 이마와 수려한 콧날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안 그래도 멋진데 그는 오늘따라 더욱 멋지고 잘생겨 보였다.


“오늘 무슨 날이어요?”

“기념일입니다.”

기념일이라고?

당연히 깜짝 놀랐다.

내가 그와의 기념일을 잊고 있었단 말인가!

결혼기념일은 몇 달 전이었고, 그의 생일은 겨울이라 아직인데!


‘내 생일도 아니야, 도대체 무슨 기념일이지?’

일단 나는 사과부터 했다.


“죄송해요! 모르고 있었어요. 무슨 날인 거죠? 다음엔 제가 꼭 기억해서…….”

“기억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어제보다 조금 더 많이 사랑한 날일 뿐입니다.”

내가 기억 못 해서 미안할까 봐 일부러 그러는구나.


“그러지 마시고 알려주세요. 그래야 다음에는 함께 챙기죠.”

“……제게는 의미가 있는 날이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청혼한 날입니다.”

이 남자, 프러포즈한 날짜도 기억하고 있었어?

맞다! 작년 이맘 때에도 화려한 보석 장신구 세트를 선물 받았던 것이 이제야 기억났다!


“당시 상황이 여의치 않아 더 멋지게 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사랑한다고, 그러니 결혼해달라고 더없이 정직하고 꾸밈없어 그다웠던 청혼이 떠올랐다.


“어느덧 2년 전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네요!”

“그때 승낙해줘서……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맙습니다, 엘리제.”

“저도 감사해요, 전하.”

그의 진심 어린 청혼을 다시 받는 기분이라 가슴이 뜨거워졌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치고 데몬이 주위를 모두 물렸다.

하얀 테이블에 우리 두 사람이 남고, 주변이 온통 핑크빛 물결로 넘실거렸다.

분홍색 솜털로 이루어진 이불 위에 둘만 놓인 듯 포근한 기분이었다.


“이곳을 이렇게 예쁘게 꾸며주셔서 감사해요, 전하. 저도 보답으로 왕비의 소임을 해나가고 싶은데요.”

그에게 받은 마음이 고마워, 왕비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으로 보답하고 싶었다.


“배웠던 대로 왕궁의 살림부터 차분히 해 보고 싶어요.”

전투의 후유증인지, 마지막에 무리하게 능력을 모두 사용해서인지 자주 어지럽고 잠이 쏟아져서 내가 왕비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뜻하시는 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그가 곁으로 다가와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내가 좋아하는 저음이 달콤하게 온몸에 휘감겨 절로 눈이 감겼다.


“그리고 저도 곧 준비하고 싶은데요.”

나는 용기를 내어 눈을 떴다.

그의 붉은 눈이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준비 말씀이십니까?”

그는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할 거라 예상 중일까?

외출 준비? 아니면 왕궁의 살림 준비?

하지만 마가렛을 바라보며 요새 내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전하, 아니. 데몬…….”

“네, 나의 엘리제. 말씀하십시오.”

마가렛과 미카일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어수선했던 이유.

나는 아이를 갖고 싶었다.

나와 그의 아이. 우리 두 사람을 더욱 특별한 관계로 만들어 주는 감사한 축복을.

너무나 사랑스러울 것이 분명한 새 생명을.

데몬이 아이를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아이라면 그가 사랑해줄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아이까지 있다면 더욱 행복하지 않을까?

좋다고 대답해주면 좋을 텐데.

나도 모르게 긴장으로 목이 탔다.


“저…… 엄마 될 준비를 하고 싶어요.”

순간, 내 허리를 감싼 커다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나는 한 번 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데몬, 당신을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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