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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시들시들한 왕비 (122/126)


외전 1. 시들시들한 왕비
2023.01.02.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밝은 햇살이, 크고 넓은 창가로 쏟아져 들어왔다.

신선한 아침 바람이 열린 창으로 들어와 길고 찬란한 은색 머리카락을 날렸다.

볼에 닿는 느낌이 간지러워 들어 올린 하얀 손이 이내 입을 가린다.


“왕비님, 많이 곤하셔요?”

크레미언 대공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푸른 응접실’.

왕비 엘리제는 우아하고 기품있는 모습으로 늘어지게 하품 중이었다.

마주 앉은 마가렛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어제도 얼마 못 주무신 거예요?”

“아, 아냐!”

엘리제는 하품하느라 입을 가렸던 가느다란 손을 흔들며 애써 웃었다.

마가렛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긴요. 눈 밑에 검은 그늘이 볼까지 내려오셨다고요.

차마 왕비의 말에 토를 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가 전하를 뵙고 다시 간청드려 봐야겠습니다.”

부디 왕비를 밤에는 좀 재워달라고.

시들시들한 엘리제를 두고만 볼 수 없어 결국 마가렛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기, 마가렛! 내게 입덧에 좋은 차가 있는데!”

그 말에 두 여인 뒤에서 초조한 모습으로 서 있던 미카일은 더욱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엘리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나와 따뜻한 차 한잔 같이해주면 안 될까?”

나오지도 않은 마가렛의 납작한 배를 바라보며 엘리제가 두 손을 모아 웃었다.

자신의 걱정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왕비의 노력을 그녀가 왜 모를까.

한숨을 내쉬며 못 이긴 척 마가렛이 대답했다.


“예, 왕비 전하.”

마가렛이 다시 자리에 앉자 미카일은 부리나케 차 준비를 위해 응접실을 나섰다. 엘리제 눈에는 그 모습이 귀여워 쿡쿡 웃음이 났다.

토라진 부인의 화를 풀려고 저토록 애쓰는 남편이라니.

맞은편 마가렛을 향해 그녀가 작게 소곤대었다.


“그러지 말고 이제 미카일 용서해주면 안 돼?”

“……저도 그러고 싶지만, 이상하게 제 마음대로 되질 않습니다.”

“마음대로 안 된다고?”

금색 눈이 의아함과 호기심에 열려 반짝였다.


“입덧이 시작되니…… 남편이 무얼 해도 너무 밉습니다.”

“무얼 하더래도?”

대답하는 마가렛 역시 난처한 표정이었다.


“예……. 아이를 생각하면 입덧쯤이야 아무것도 아닙니다만, 이상하게도 남편만 바라보면 화가 치밀어요.”

저 마가렛의 입에서 화가 치민다는 표현이 나오다니!

적지 않게 놀라 엘리제의 입이 벌어졌다.


“저도 제가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초기에는 다들 예민해진다고 하던데 그래서인가 봐.”

호르몬의 변화와 입덧의 영향으로 얼마든지 임신 초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엘리제 역시 말로만 들었지, 실제 겪은 적이 없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끔은 눈물도 나고요. 남편 뒤통수만 봐도 미워요.”

‘그 정도라고?’

마가렛은 잠시 열심히 차 준비 중일 미카일을 떠올렸다.

하얀 사제복을 입고 진땀을 빼며 차를 고르고 찻물을 달이고 있을 그의 동그란 머리도.

오!

그토록 성스러운 사제님의 뒷모습을 보고 정작 부인은 화가 난다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불쌍한 미카일. 뒤통수가 예뻐도 소용없구나.’

생각에 잠긴 엘리제를 바라보며 마가렛이 입을 열었다.


“대비하지 못한 일이라 당황스러운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아이였으니까.


‘하긴. 신중한 마가렛은 결혼 후에 천천히 아이를 갖고 싶어 했었지.’

예상했던 부분이었지만 엘리제의 몸이 흠칫 떨렸다.


‘나도 아이를 갖게 되면 데몬이 막 미워질까?’

설마.

그의 붉은 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하고 가슴이 뻐근해지는걸.


“하지만 아이를 생각하면 다시 마음이 평안해지니 참 우습지요?”

마가렛이 곱게 웃었다. 입덧으로 고생하여 야윈 볼에 어여쁘게 보조개가 피었다.

1년 가까운 연애를 통해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지만 마가렛과 미카일은 본래 자녀계획까지는 아직이었다. 그러나 미카일이 그토록 성급할 줄이야.

두 사람의 결혼식까지는 아직 두 달이 남아 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는 말처럼, 난생처음 시작된 사제님의 사랑은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급했던 사랑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미카일이 손수 차를 들고 나타났다.


“아래 사람을 시키시지 않고요!”

엘리제가 일어나 차를 받으려 하자 미카일이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부디 제가 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곧바로 엘리제와 마가렛의 앞에 노랗게 피어나는 꽃차가 준비되었다.


“와! 향도, 색도 정말 예쁘네요.”

엘리제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산모가 좋고 예쁜 것만 보면 예쁜 아이가 태어난다고 들었습니다.”

미카일이 수줍게 대답했다.

사실 엘리제는 마가렛 몰래 이미 미카일에게 부탁을 받은 상황이었다.

아내의 마음을 풀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그러니 눈앞의 꽃차는 두 여인 모두를 위한 차이지만 다분히 의도적으로 마가렛의 취향을 먼저 고려한 것이었다.


‘암. 이해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제가 먼저 차를 드는 모습을 확인하고 마가렛 역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따스하고 달달한 찻물이 넘어가자 마가렛의 입가에도 편안한 미소가 지어졌다.


“찻물 온도가 괜찮습니까?”

너무 뜨겁지 않은지 조심스럽게 묻는 남편에게 마가렛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차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제야 미카일의 얼굴에도 여유와 미소가 돌아왔다.


“참, 사제님. 어제 황궁에 다녀오셨다 들었어요. 폐하께서도 무탈하시지요? 저도 곧 뵈러 가고 싶은데요.”

미로니카의 여제 프시케.

황제 프시케는 여전히 황국을 평화롭게 잘 다스리고 있었고 그 곁에서 로안도 점차 건강을 되찾았다.


“예, 전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황제 폐하께 미리 말씀드려 약속을 잡겠습니다.”

하지만 데몬이 허락해줄 리 없다.

헬리오에게 몸을 빼앗겨 만신창이가 되었던 로안이 엘리제의 이능 덕에 극적으로 살아나고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해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질 즈음.

그때부터였다.

데몬이 엘리제의 황궁 나들이를 막은 것은.


“네, 고마워요.”

프시케를 보러 가고 싶은 그녀의 마음은 잘 알지만, 일국의 왕비와 이웃 나라의 황제와의 만남이니 가벼이 허락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라고 다니엘에게 전해 들었다.


‘이해는 하지만…… 뭔가 더 있는 느낌이야.’

혹시 더이상 정령의 힘이 이제 없으니 걱정되어 그러나?

데몬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 나들이를 막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아닌 것을 알면서도 아쉬운 마음은 가끔 서운함으로 이어졌다.


‘이능 없이도 내 몸 하나쯤 지킬 수 있는데. 호위도 같이 가고…….’

못 가게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거겠지.

그녀에게 말해줄 수는 없는.

엘리제는 향기로운 찻물을 다시 머금고 잔을 내려놓았다. 눈앞에서 새댁이 툴툴대고 그의 신랑은 쩔쩔매고 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두 사람을 바라보며 엘리제 역시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마음 한편을 누르는 무거운 마음을 애써 외면하면서.

***

크레미언 공국 국왕 내외의 사이가 너무 좋아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소문은 이미 나라 안팎에 파다했다.

왕비가 있는 곳이 어디든 곧 왕이 나타났으므로, 사람들은 그것이 그냥 소문에 그치는 것이 아닌 사실임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더 좋은 방도가 없습니까? 왕비님께서 항상 수면 부족에 시달리시잖아요.”

마가렛은 의사에게 호통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임신과 입덧으로 마가렛은 왕비를 모시던 일에서 잠시 물러났다. 그랬는데도 매일같이 엘리제 걱정으로 그녀는 잔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다.


“수면은 부족해 보이십니다만, 건강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십니다.”

왕비의 나이 든 주치의는 표정의 변화가 별로 없다.

시종일관 ‘신혼에는 다들 그런걸. 너도 잘 알잖아?’ 하는 표정일 뿐.


“단순히 수면 부족이시면 푹 주무시고 나면 괜찮으셔야 하잖아요!”

마가렛이 걱정하는 것이 이것이었다.

엘리제는 푹 자고 일어나는 날에도 피곤해했으니까.

아니, 되레 어쩌다 데몬이 없는 날에 더 피곤해 보이기까지 했다.

처음에 마가렛은 제가 아닌 엘리제에게 아이가 생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자신보다도 엘리제가 조는 날이 더 많았으므로.


“그것은 왕비 전하께서 원체 몸이 약하시어…….”

“그러니까 그 약하신 몸을 튼튼하게 해드릴 방도가 없냐는 말이어요.”

죄 없는 주치의만 잡고 늘어지는 마가렛 앞에 낮은 음성과 함께 데몬이 나타났다.


“걱정해줘서 고맙군, 마가렛.”

“전, 전하!”

주변 모두가 서둘러 예법에 맞게 인사를 올렸다.

구세주를 만난 듯 주치의는 활짝 웃으며 몸을 반으로 접었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무리하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일전에 보내주신 선물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전하.”

마가렛의 임신 소식에 데몬은 많은 육아용품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보석이 박힌 손바닥만 한 신발을 받고 마가렛은 벅찬 눈물을 흘렸었다.


“꼭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넘치는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왕비의 몸은 내가 챙길 테니 마가렛은 당분간 자신의 몸을 더 챙겨 줘. 미카일이 매일 사색이라 안쓰럽더군.”

“송, 송구합니다! 전하.”

데몬의 말에 마가렛도 입을 다물었다.

붉은 눈이 어두운 빛을 내며 가라앉았다.

그 역시 알고 있다. 제 목숨보다 소중한 왕비의 상태를.엘리제가 체력이 약한 탓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는 것도.

***



“……엘리제?”

왕궁에 어둠이 찾아왔다.

꽃향기가 나는 왕비의 방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크고 무거운 그림자가 찾아들었다.


“전……하?”

갓구운 파이를 들고 데몬이 침대맡으로 다가가자, 달콤한 냄새가 엘리제를 일으켰다.


“내가 깨운 겁니까?”

파이를 내려놓으며 크고 따스한 손이 그녀의 둥근 이마를 쓸었다.

기분이 좋아 절로 소리가 나왔다.


“흐응. 아뇨, 기다리다 잠깐 졸았어요. 맛있는 냄새가 나요.”

“늦었지만 조금 들어보겠습니까? 당신께서 좋아하는 사과 파이입니다.”

듣기만 했는데 입안 가득 달콤하게 사르르 녹는 잼 맛이 상상되어 침이 고였다.

맛있겠다. 속도, 바삭하게 부서질 겉면도.


“네! 조금만요.”

엘리제는 몸을 세우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데몬이 파이를 먹기 좋게 자르며 속을 가르자 안에서 김이 올랐다.


“아직 뜨겁습니다.”

그가 후후 파이 조각을 들고 불었다.


‘저렇게 큰 남자가 작은 조각을 들고 정성스레 식히고 있다니.’

누구도 아닌 그녀를 위해.

엘리제의 두 볼이 발그레해졌다.


“이제 되었습니다.”

냠.

작은 파이 조각이 그녀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데몬은 오물거리는 엘리제의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맛있습니까?”

“네!”

누가 만든 건가 싶을 만큼 적당히 달고 부드럽다.

아름다운 금색 눈이 부드럽게 휘자, 붉은 눈도 따라 웃었다.


“저도 맛을 좀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엘리제가 파이 접시를 받아 작은 조각을 포크로 찍으려 할 때였다.


“그 조각 말고요.”

“네?”

이거 말고? 그럼 조금 더 큰 조각을 줄까?

그녀가 포크를 옮기는데.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것인지 그의 따스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닿았다.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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