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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사라진 여신과 전설의 완성 (121/126)


121. 사라진 여신과 전설의 완성
2022.12.29.


엘리제는 데몬을 향해 달려갈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자꾸 주저앉으려는 몸을 겨우겨우 일으켜 그에게 다가갔다.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이 그의 몸 전체에 고스란히 새겨져 상처에서 쉼 없이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마력이 다한 그는 성검을 쥐고 눈을 감은 채 기척조차 없었다.

마치 조각상처럼.

엘리제의 입이 달달 떨리며 슬픔에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데, 데몬…….”

제발 대답해줘요. 내가 좋아하는 그 감미로운 목소리를 다시 들려줘요, 제발.

눈물이 솟구쳐 흘렀다.

엘리제는 검을 쥔 그의 굳은 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여전히 그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인해 그녀의 은빛 머리가 붉게 물들어 갔다.

더듬더듬 그의 얼굴을 찾고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잘생긴 콧날과 반듯한 이마를 어루만졌다.

닫힌 그의 눈꺼풀과 아름다운 코, 부드럽고 도톰한 입술에 그녀의 손이 차례차례 닿았다.

마침내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는 순간.

엘리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눈부신 빛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하늘에서 푸른색 별 가루가 쏟아졌다.

눈처럼 떨어지는 정령의 힘이 데몬의 몸과 쓰러진 로안의 몸 위로 내렸다.

저 멀리서 새로운 황제의 군사가 된 이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



“로안!”

황군의 부축을 받으며 궁으로 들어오는 로안을 보고 프시케가 달려 나갔다.

미안해하는 얼굴과 촉촉하게 젖은 눈. 투명한 푸른 눈빛.

그녀가 알고 있는 로안이라는 것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프시케는 그를 안고 오열했다.


“살아계시어 정말 다행입니다!”

헬리오가 강력한 흑마법으로 로안의 몸을 빼앗고 그 안에 들어가 그를 통제하였다.

그러나 로안은 가까스로 자신의 의지를 몸 일부에 남겨놓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전장에서 엘리제가 정령의 힘을 사용하자, 헬리오가 아닌 죽어가는 로안의 영혼에 생명의 힘이 닿았다.

그 힘을 이용하여 로안은 안에서부터 헬리오를 공격했다. 꿈틀거린 근육은 그 몸부림이었다.


“면목 없구려. 의식만 남았었지만 모두 다 지켜보았소. 모든 것이 나의 부족함 때문이오.”

로안 역시 눈물을 흘리며 반성하였지만, 되돌릴 수는 없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제 몸뿐 아니라 황국이 멸망할 뻔하였다.

그러나 육체에 갇혀 발버둥 칠뿐 황국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다시금 자신의 무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 제 곁에서 쉬십시오. 황국은 제게 맡겨주시고요.”

그를 대신하여 이제 프시케가 황국을 이끌어갈 것이었다. 로안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어찌 혼자 돌아오십니까?”

데몬과 엘리제는 바로 대공가로 간 것일까?

황군과 대공가의 군사가 전장에 가까워질 때 그들 모두가 눈부신 빛을 보았다. 푸른빛이 하늘에서 별처럼 쏟아지며 데몬과 로안의 상처를 말끔히 치유하였다.

그러나 남은 이는 둘 뿐이었다.

마지막 힘을 다해 로안과 데몬을 구한 엘리제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정령의 힘을 모두 쏟아낸 그녀는 데몬의 품 안에서 무너져 내렸었다.

그렇다면 분명 데몬과 함께여야 했다.

그러나 없었다. 마치 누군가 기다렸다가 데리고 가기라도 한 것처럼.


“데몬이 그의 뒤를 쫓아갔소.”

“예?”

그 말은 진정 누군가가 쓰러진 엘리제를 데려갔다는 말이었다.

***

따스한 힘과 함께 온몸의 감각이 조금씩 깨어나는 것을 데몬은 느꼈다. 향기로운 힘은 그리움과 동시에 애틋함을 불러일으키는 그녀의 흔적이었다.


‘엘리제?’

동시에 그녀가 걱정되어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몸은 아직이었다.

죽었던 세포 하나하나에 생명이 새로 깃들듯 굳었던 몸에는 천천히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무척이나 싱그럽고 강력한 힘이라는 것이 느껴졌지만 당장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때에 누군가 품 안의 엘리제를 빼내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

자이드였다.

데몬은 전장 근처에 자이드가 숨어 있다는 것을 사실 모르지 않았다.

다만 헬리오를 상대하며 잠시도 틈을 보일 수 없었을 뿐이었다.

쓰러진 엘리제를 살피기 위해 데려가는 것이면 다행이었을 것이나, 곧이어 들린 소리는 말을 모는 자이드의 목소리였다.


“이랴!”

그가 엘리제를 데리고 시에델로 도망치려는 것이 분명했다.

전신에 감각이 돌아오자마자 데몬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이드의 뒤를 쫓았다.

***

몸이 흔들린다. 흐릿한 기억을 두드리며 드문드문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득하게 행복한 꿈.

얼핏 내가 데몬과 함께 큰 액자 아래에서 이름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꿈을 꾼 것 같은데…….

달콤한 꿈에서 깨고 나면 내가 죽은 이후일까 봐 두려웠다.

마지막 정령의 힘을 사용할 때,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절로 알 수 있었다.

그를 살릴 수 있겠다는 것을.

그렇지만 모든 정령의 힘을 다 잃고 나서도 나는 존재할 수 있을까?

그래도 데몬을 살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몇 번이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만!”

들려온 목소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내게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힘이 남질 않았다.

그저 열린 귀로 소리가 들릴 뿐.

근데 이것도 내가 살아 있어서 들리는 것인지, 죽어서 영혼이 듣는 상황인지 알 수가 없네.


“자이드!”

‘데몬!’

곧바로 들린 소리는 내가 사랑하는 그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무서울 정도로 거칠었다.

데몬의 목소리를 듣자 가슴이 미친 듯 마구 뛰었다.


“내 아내를 당장 돌려줘!”

화가 난 그가 어둠보다 짙은 목소리로 외쳤다.

아내래! 너무 좋아서 심장이 더욱 요동친다.

잠깐만! 지금 마냥 좋아할 때가 아닌데? 나를 돌려달라고?

그럼 내가 자이드에게 실려 가는 중인가?


“데몬! 모르겠나? 성녀님은 시에델에 계셔야 해! 너무 오래 벗어나 있어서 생명이 더 위급한 거라고.”

“핑계가 좋군! 시에델에 가지 않아도 그녀는 내 품에서 안전해!”

“이미 심장박동이 미약해! 너를 살리다 이 지경까지 된 사실을 모르지 않겠지. 더 이상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엘리제는 내가 지키겠다.”

“너. 역시 죽여버려야겠군.”

데몬이 무섭게 으르렁대며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자이드! 잠깐, 내 의견은?

나는 죽더라도 내 남자 곁에 있을 거라고!


“세상에 자이드! 성녀님!”

그러는 사이에 시에델 왕궁에 도착했는지 그레이스 왕후 마마가 기함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불어온 따스한 바람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다시 아득해졌다.

***

피투성이가 된 엘리제를 자이드가 안고 돌아오자, 그레이스는 기겁하였다.

성녀가 이토록 처참한 몰골이 되어 돌아오다니.

게다가 그 뒤를 바짝 쫓아온 이웃 나라 대공의 모습은, 왕후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놀라서 외치는 그레이스에게 데몬이 차갑고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시에델의 왕태자께서 감히 제 아내를 데리고 도망을 치셨습니다. 하여 저는…….”

붉은 두 눈이 형형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콰콰광. 쿵!

시에델의 대지가 흔들리고 공기마저 진동하였다.


“시에델을 용서치 않을 생각입니다.”

‘엄, 엄청난 힘이다!’

화가 난 데몬이 뿜어내는 힘은 단순한 마력이 아니었다. 파괴의 붉은 기운과 함께 묘하게 푸른 정령의 기운이 섞인 것이 왕후의 눈에도 보였다.


‘어떻게 그가 정령의 힘까지 갖게 된 것이지?’

그러나 그런 궁금증을 가질 때가 아니었다.

저토록 강한 힘을 사용한다면 시에델이 무사할 리 만무했다.


“잠시 진정하십시오. 자이드! 대공 각하의 말씀이 사실이냐?”

“……하오나, 어마마마! 엘리제 님은 저희의 성녀이시기도 합니다.”

아무리 엘리제가 시에델의 성녀라 하여도, 데몬의 말대로 두 사람이 혼약한 사이이며 본인이 원치 않는다면 억지로 성녀로 모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그레이스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한숨을 뱉는 사이, 데몬이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 남은 정령의 힘이 없을 것입니다. 제게 온전히 다 전해졌으니까요.”

데몬의 말에 그레이스의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맙소사! 엘리제가 제 모든 정령의 힘을 데몬에게 전해 주었구나!’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엘리제는 그 힘을 물로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니 모든 힘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이 가능해졌을지도.


“시에델은 제 아내를 데려간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셨습니까?”

데몬의 무시무시한 한마디에 그레이스는 덜덜 떨며 주저앉았다.

***

다시 엘리제의 정신이 차차 들었을 때는 따뜻하고 단단한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연신 그녀의 이마와 눈 위로 무수히 많은 입맞춤을 내리고 있었다.

크고 따스한 손이 그녀의 볼을 쓸어내리더니 곧 소중하게 감쌌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삼키고 입안을 갈라 숨을 불어 넣었다.

엘리제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나 살아 있구나!’

부드러움, 따뜻함. 감각이 생생했다.

그러나 누구의 품 안일까.

데몬일까.

아니면, 시에델의 자이드인가.


“이제 그만 눈을 떠…… 제발.”

“!”

누구도 아닌, 바로 그가,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와 감각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바라고 또 바라던 목소리라 순식간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눈과 입이 열리고 절로 소리가 나갔다.


“데몬…….”

“엘리제!”

아아. 살려줘서, 살아주어서…… 고맙습니다.

데몬이 엘리제에게 이마를 마주 대고 중얼대었다.


“……사랑해요.”

제일 먼저 그녀가 뱉게 되는 말은 역시 이 말이었다.

도톰하고 뜨거운 그의 입술이 엘리제의 붉은 입술을 달게 빨아들이며 작게 속삭였다.


“이제 당신의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목숨도 내게 줘야겠습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엘리제가 물었다.


“……목숨도 달라고요?”

“이토록 함부로 하시니까요. 게다가 이제부터는 목숨이 하나이십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리고 어떻게 데몬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일까? 분명 자이드에 의해 시에델로 옮겨진 것 같았는데.


“저를 살려주시면서 모든 힘을 사용하시어, 더는 이능을 행하실 수 없게 되셨습니다.”

“!”

그녀에게 정령의 힘이 없으니 목숨이 하나인 보통의 사람이란 말이었다.


“그러니 이제 더더욱 품에서 놓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잠깐만요. 그렇다면…….”

“시에델의 성녀는 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정통성인 정령의 힘이 더는 남아 있지 않으시니까요.”

“아!”

이런 결과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으나, 시에델 왕가를 향해 약간의 부채 의식이 남아 있던 터라 엘리제는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이제 더욱, 오롯이 제 것이십니다.”

붉은 눈이 기다렸다는 듯이 짙어지더니 다시 그녀의 입술을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크고 뜨거운 손이 점점 몸을 옭아매고 더듬는 것이 느껴져 엘리제는 깜짝 놀랐다.


“잠, 잠깐만요. 여기 아직 시에델 아닌가요?”

아무리 그래도 남의 나라에서라니, 부끄러워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이미 크레미언 공국입니다.”

“어디요?”

어리둥절해 묻는 엘리제를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데몬이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의 일행과 로안이 무사하다는 소식에서 프시케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까지.

엘리제는 자신이 잠든 며칠 동안의 일을 차례로 들었다.

대공가는 이미 미로니카에서 독립한 공국의 수도였다.

소중한 이들이 모두 곁에 있다니, 그녀가 기쁨에 차 외쳤다.


“당장 마가렛과 토리 로떼가 무사한지 보고 싶어요!”

“당분간은 무리입니다.”

“네?”

처음 듣는 거절에 엘리제는 깜짝 놀랐다. 이런 부탁을 데몬이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제가 기다린 시간에 대한 보상이 먼저입니다. 며칠간은 제게서 벗어나실 수 없습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붉은 눈에 드러났다. 엘리제의 두 볼 역시 붉게 물들어 올랐다.


‘이, 이 표정은 반칙이잖아!’

눈을 감고 뜨거운 그의 입술부터 받아들이는 것으로 엘리제는 살아 있는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였다.

***

그로부터 일 년 뒤.


“전하, 시에델의 왕태자로부터 또 서신이 왔습니다.”

하임이 푸른 서신이 올려진 은쟁반을 들고 크레미언 대공국 왕의 집무실에 나타났다.

미로니카 황국보다 크기가 작아도 대공국은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새로 미로니카의 황제가 된 프시케는 대공가를 따르던 귀족들의 영지까지 포함하여 대공국의 독립을 도왔다.

예상보다 큰 영토의 강력한 국가의 왕이 되었으나 데몬에게 그 모든 것은, 그저 엘리제를 지키는 울타리였다.

서류를 들여다보던 대공국의 왕이 붉은 눈을 들어 푸른 서신을 노려보았다.

벌써 일 년째. 자이드의 열렬한 구애는 계속되고 있다.

「당신께서 시에델의 성녀가 아니셔도 두 번째 남편이라도 되고 싶은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진지하고 단단한 말투. 편지 속 자이드는 진심이었다.


“또 같은 내용이겠지.”

낮은 음성과 가늘어진 붉은 눈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그렇습니다. 읽어드릴까요?”

“아니. 당장 찢어버려. 아니 불태워 버려라.”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명하는 데몬 역시 진심이었다.


“이참에 역시 시에델을 접수해버리는 것이…….”

데몬이 작게 읊조리며 붉은 눈에 마력을 채우기 시작하자 하임이 급히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답장을 대신 보내보겠습니다.”

곧 하임이 작성한 편지가 시에델을 향해 출발했다.

「이국의 왕비께 당치도 않은 욕심은 버려주시지요. 저희 왕께서 두 번의 자비는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데몬이 시에델에 남기는 마지막 인사였다.


“왕비는?”

“다니엘 재상에게 수업을 받고 계십니다만…….”

“내가 가겠다.”

“아니, 전하!”

왕비님 수업이 곧 끝날 텐데 그 잠시를 못 기다리십니까?

뱉지 못한 말이 하임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



“왕비님! 이것도 모르시면 어찌 전하의 반려라 할 수…….”

몇 년 전에 꾸었던 꿈과 비슷한 장면이 엘리제의 눈앞에 펼쳐졌다.


‘아! 그게 이 순간의 예지몽이었구나!’

어려운 예법과 풀이 죽어 있는 자신, 다그치면서도 애정이 느껴지는 다니엘의 훈계.

엘리제는 문득 작품 속 온전한 인물이 된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미로니카의 황제께서 전하와 왕비 전하 두 분을 초청하셨으니 그전까지는 익히셔야 합니다.”

“네, 알겠어요. 로안 국서님은 좀 어떠세요?”

“건강을 많이 되찾으시어 이제 승마도 가능하신 정도라 합니다.”

“다행이네요.”

“황제 폐하께서 왕비 전하께 무척이나 고마워하고 계십니다.”

로안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엘리제 그녀니까.

황제 프시케의 선정으로 미로니카 황국은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운 번영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폐하께서 말씀해주신 전설 말이어요. 이루어졌네요!”

붉은 머리의 여인이 황국의 주인이 되는 날, 영원한 평화와 행복이 미로니카에 있게 된다던 전설. 다니엘 역시 프시케에게 들어 알고 있는 터였다.

전설대로 붉은 머리의 여황제가 미로니카의 주인이 되었다.


“그 말씀이 맞군요.”

다니엘이 웃었다. 그때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방을 흔들었다.


“내 아내에게 눈웃음치면 아무리 다니엘 너라도 용서치 않겠다.”

“전하!”

문가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엘리제가 벌떡 일어나 데몬에게 달려가 안겼다. 은빛 머리카락이 향기롭게 찰랑였다.

다니엘이 고개를 저으며 한탄하였다.


“왕비께 이토록 집착하시는 왕이라뇨…….”

엘리제를 향해 웃기만 해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니.

말은 그렇게 해도 다니엘은 미소 지으며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오늘 수업도 감사해요, 재상님.”

방문까지 닫아주며 왕과 왕비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다니엘에게 엘리제가 인사를 전했다. 문이 닫히자마자 데몬이 엘리제를 안아 들며 입맞춤을 시작했다.


“전하…….”

“둘만 있을 때는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덴, 오늘 마가렛이 미카일에게 청혼을 받았다고 하던데요…….”

안아 든 엘리제를 데몬이 부드러운 카우치에 눕히며 대답했다.


“예, 저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제 막 사랑을 키워나가고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것은 가까운 이에게도 기쁨이었다.


“그런데요, 당신께서는 저를 왜 사랑하셨나요? 저는 이 세상의 사람도 아니잖아요.”

갑자기 의아한 질문이었으나 데몬의 붉은 눈은 그저 사랑스럽다는 듯이 휘었다.


“그게 당신께 중요합니까?”

이곳이 이야기 속이라는 것을 아는 엘리제는 종종 혼자만 느끼는 불안함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다시 원작대로 흘러가 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그가 갑자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가끔은 그 사랑이 당신 뜻이 아니면 어쩌나 겁이 나거든요…….”

그녀는 이세계에서 온 존재고, 이 세상의 정해진 결말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제가 있는 이곳이나, 당신께서 사시던 그곳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생각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아닙니까. 이곳이 이야기 속이든 아니든, 당신께서 살고 계신 곳이 제게는 현실입니다.”

“아……!”

이세계(異世界)에서 온 그녀를 몸과 마음을 다해 아끼고 사랑하는 것.

그것은 그에게 정해진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신을 위해 살고 목숨 바쳐 사랑하는 것.


“그것이 제 숙명이라고 제 마음이 정했습니다. 달리 이유가 필요합니까?”

도리도리.

말이 필요치 않았다.

그저 그와 닿고, 체온을 나누며 행복을 느끼면 되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엔,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에는 달리 이유가 필요치 않다.


“충분해요. 당신만 제 것이라면요.”

“세상이 바뀌어도 영원히 당신의 것임을 맹세합니다.”

마주 닿은 손과 그의 단단한 몸이 따듯했다.

한없이 뜨겁고 충만하기만 한 날이었다.

< 집착 황제의 첩인데 곧 죽게 생겼습니다. 완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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