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마침내
(120/126)
120. 마침내
(120/126)
120. 마침내
2022.12.26.
황후가 황제가 되겠다고?
그렇다면 지금의 황제는 어찌 되는 것이지?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계신데 어찌…….”
“굳이 황후께서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오르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황후의 자리에서도 황국을 충분히 통치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황국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황후야말로 진정 황제가 될만한 인품과 능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을.
게다가 지금은 대공가라는 강력한 힘까지 쥐고 있었다.
황국에 내려오는 전설과 황위를 이을 정당성, 강력한 마력과 군사력.
크레미언 대공가는 이 모두를 갖추었다.
게다가 현 황후와 황제 사이에는 아직 아이가 없고, 마땅한 방계 혈족도 없다.
그러니 로안이 죽는다면 어차피 황후나 다른 가문을 통해 황위를 이어야 할 상황이었다.
귀족들이 이 사실을 상기하는 동안 프시케가 단호하게 말했다.
“역사적으로도 황후가 황제가 되어 나라를 다스린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그렇기는 하나, 보통 그것은 황제가 피치 못할 상황으로 통치할 수 없는 경우에…….”
귀족들의 아우성에 황후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경들은 폐하께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였습니까?”
순간적으로 차가운 정적이 집무실을 감쌌다.
“지금 황제 폐하의 몸에는 다른 영혼이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뭐, 뭐라고요?”
연이어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말에 모두 입을 벌렸다. 그러나 막연하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치부할 수가 없었다. 그들 역시 직접 황제의 이상한 부분을 느껴왔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변한 황제의 모습도 그러했고, 황후를 통제하던 모습도 그러했다.
갑자기 생긴 괴력, 전장에서 들려온 새로 생긴 권능의 소식.
그 모든 것이 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만나자 마치 퍼즐 조각처럼 들어맞았다.
황궁의 주치의와 몇몇 이들이 흘렸던 소문을 그동안 귀족들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생각이나 불경한 말을 뱉는 순간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흑마법사가 황제 폐하의 몸을 장악하고 있으며, 저 역시 그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눈치챈 백작부인이 저를 구하려다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놀라 숨 들이켜는 소리와 한탄이 들려왔다.
이상하다고 여겼던 일련의 일들이 프시케의 말을 들으니 명확하게 하나의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설마, 정말일 줄이야!”
“그렇다면 어서 황제 폐하의 몸에서 그 흑마법사를 몰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가, 지금 전쟁터에서 그 황제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 그들도 알아차렸다.
얼굴이 하얗게 변한 이들 앞에 시종이 헐레벌떡 뛰어와 외쳤다.
“황후 폐하! 국경으로 보내셨던 치료사와 의원 일행이 모두 돌아오고 있습니다.”
혹시 싸움이 끝나기라도 한 것일까.
걱정과 의아함에 프시케가 물었다.
“국경의 사상자가 많다 하였는데 다시 돌아오고 있다니 도대체 무슨 연유더냐?”
“그것이…… 어느 여인이 나타나 죽은 이들을 살렸다고 합니다.”
“!”
“뭐라고?”
죽은 이들을 살려냈다고? 한둘도 아닌 그렇게 많은 사람을?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시종의 말을 듣는 순간 대부분은 신성국의 왕인 성하를 떠올렸다.
하지만, 방금 시종은 여인이라 하지 않았는가.
‘설마……!’
프시케와 다니엘은 다른 한 사람을 떠올렸다.
‘엘리제!’
하나, 그렇게 막강한 힘이 한 사람의 능력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일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여인이 크레미언 대공의 사람인 듯합니다. 그리하여 황군의 대부분이 대공가에 투항 중이라 합니다.”
그 한마디에 귀족들은 다시 혼란 속에 빠졌다.
“황군이 투항 중이라고?”
“황군 역시 황제께서 사용하신 권능으로 막대한 희생을 입었다고 했었지요. 그렇다면 황후 폐하 말씀이 더욱 사실임이 분명합니다.”
다시 혼란스러운 사이, 때마침 미카일이 황궁에 도착했다.
그 역시 자신이 본 것들을 모두 전했다.
정직하고 청렴한 사제가 전장에서 일어난 일이 모두 사실임을 밝히자 황후와 뜻을 같이해 온 귀족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사제님과 황후 폐하의 말씀대로 누군가 황제 폐하의 몸을 조종하여 황국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귀족들은 이 사태를 파악하고 해결할 능력이 자신들에게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평생 그래왔듯, 누군가 이 상황을 책임지고 해결해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게 누구든 자신들의 주인이 될 자가 이왕이면 현명하고 강한 사람이면 좋을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충분한 정당성과 자신들을 향한 자비까지 갖춘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겠는가.
자애롭고 인자하며 강력한 뒷배를 가진 누군가.
귀족들이 하나둘 그들의 앞에 당당하고 우아하게 서 있는 프시케를 바라보았다.
“저희 백작 가문은 황후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빠르게 상황 파악과 계산을 끝낸 귀족들이 황후에게 너도나도 충성을 맹세하기 시작했다.
“크레미언 가문과 황후 폐하의 말씀에 따를 것을 저희 가문 역시 맹세합니다.”
황제가 흑마법에 장악되자 황국의 미래를 걱정해온 황후가 대공과 함께 드디어 움직이기로 했다는 사실을 믿었고, 이제 그들 앞의 매력적인 새로운 군주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프시케와 대공가를 향한 모든 귀족들의 충성 서약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
황제가 갑자기 공격을 멈췄다. 여전히 불편해 보이는 표정으로.
데몬을 노려보고 있었으나 짓씹으며 중얼대는 말은 다른 이를 향한 것 같았다.
“네까짓 것이 뭘 할 수 있다고…….”
가소롭구나, 로안.
몸에 남아 있을 뿐 기척도 내지 못할 정도에 불과했는데 어떻게 갑자기 근육을 비틀 정도의 힘을 갖게 된 것이지?
꿈틀대는 근육이 헬리오의 통제를 벗어나고자 발악하고 있었다. 로안의 의지가 있는 그곳에 헬리오가 손을 올렸다.
그사이, 데몬의 팔에 안긴 엘리제는 피가 흐르는 데몬을 마주 안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어쩌면! 정령수를 만들 때처럼 원하는 대상에게만 그 힘을 붓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향기로운 빛이 몸에서 터져 나오자 그녀가 바라는 대로 데몬만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입맞춤을 통해 힘을 전하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그랬다가는 데몬의 시야를 가려 더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혹시나 하며 시도한 방법이
다행히 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제가 힘을 사용하자 데몬이 그녀를 말렸다.
“제발 날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나누는 것은 그만둬, 엘리제.”
“하지만!”
엘리제는 자신에게 힘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도 데몬의 품 안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힘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그를 위해 사용하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엘리제의 눈에 눈물이 들어찬 그때.
퍼억! 황제의 다리가 한 번 더 뒤틀리나 싶더니 갑자기 그가 자신을 향해 힘을 폭발시켰다.후드득.
“꺄악!”
엘리제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녀의 품에 숨어 있던 토리와 로떼도 덩달아 놀랐다.데몬과 그녀의 몸 근처까지 붉은 피와 살점이 튀어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눈앞의 황제가 스스로 다리를 잘라낸 것이었다.
‘지금!’
데몬은 엘리제를 놓고 등 뒤로 손을 뻗어 감추어두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검날이 순식간에 헬리오의 몸통을 꿰뚫었다. 성검이 닿은 자리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큭……!”
그러나 그는 여전히 황제의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몸에 연결된 검날을 잡았다.
“성검은 역시…… 네가 가지고 있었나? 하지만 어리석구나……, 데몬.”
그 즉시 황제의 몸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지글지글 끓는 거대한 힘을 일으키며 그가 자신과 검날에 무시무시한 폭발을 가했다.
순식간에 데몬과 황제의 몸이 상처투성이로 변하고 잘려 나간 황제의 다리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러나 마치 자신의 일부가 아닌 양, 황제의 표정은 태평하기만 했다.
엘리제는 그 모습에 기겁하였다.
사랑하는 데몬의 몸에 다시 수없이 많은 상처가 생기고 있었다. 게다가 데몬에게 공격을 가하기 위해 로안의 육체까지 찢고 엉망으로 만들다니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헬리오가 손을 들어 다시금 빛을 터뜨리자 사라졌던 황제의 다리가 다시 생겨났다.
“!”
파괴력과 치유력을 동시에 가진 괴물.
그제야 데몬은 헬리오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원래대로라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는 것도.
서둘러 황제의 몸에서 검을 빼내며 몸을 뒤로 물렸다. 이 상태로는 성검을 사용해도 더욱 위험해질 뿐이었다.
‘진명을 몰랐다면 정말 끝이 없었겠군.’
데몬은 눈을 붉게 물들이며 엘리제의 보호막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방금 생긴 상처에서 강한 고통이 느껴졌다. 마력의 손실이 커 힘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약점을 찾아 일격에 공격하여야 한다.’
헬리오가 단순히 성검으로 찌르기만 한다고 없앨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방금 확인했다. 역시 진명을 사용해야 했다.
진명을 알고 있는 것을 들킨다면 데몬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일격이어야 한다. 잘렸다가 다시 재생된 황제의 다리가 붉은 눈에 들어왔다.
‘다리를 잘라낸 이유는 그곳이 자신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그곳에 헬리오가 아닌 다른 이의 의식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분명 로안일 것이다.
‘그럼 헬리오의 의식은 어디에 있지? 설마, 목이라도 쳐야 하는가?’
하지만 프시케가 꼭 로안을 구해달라 그에게 부탁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며. 그러니 목을 잘라낼 수는 없었다.
엘리제가 죽은 이를 다시 살려낼 수 있겠지만, 정령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그녀의 생명을 갉아먹는 일이다. 생각만으로도 데몬은 살을 에는 듯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로안은 흑마법에 의해 영혼이 사용된 것이라, 엘리제의 능력으로 살릴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로안의 의식이 다리라면, 헬리오의 의식은 어디에 집중되어 있을까.’
데몬이 가늘어진 눈으로 황제의 몸을 훑어보고 있는 그때 엘리제가 날카롭게 외쳤다.
“안 돼! 얘들아!”
언제 품에서 빠져나간 것인지 갑자기 토리와 로떼가 헬리오의 뒤에서 나타나 달려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황제가 몸을 돌려 두 동물에게 공격을 가했다.
“토리! 로떼!”
비명과 같은 엘리제의 외침이 이어짐과 동시에 두 동물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둘을 구하기 위해 앞으로 튀어 나가는 엘리제를 데몬이 서둘러 끌어안았다.
“위험합니다!”
엘리제는 토리와 로떼를 향해 손을 뻗었다. 눈물이 그녀의 앞을 가렸다. 힘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엘리제는 정령의 힘을 개방했다.
눈부신 푸른빛과 향기로운 힘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빛이 토리와 로떼를 감싸자 피투성이가 되어 고통스럽게 숨을 쉬던 두 동물의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데몬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상처가 아물고 힘이 차올랐다. 그럴수록 엘리제의 몸이 그의 품 안에서 축 늘어져 가는 것이 느껴져 데몬은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그, 그만해!”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황제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성검이 뚫었던 상처에서는 여전히 검은 연기가 피어 나왔다.
정령의 힘이 닿아도 황제는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스러워할 뿐.
엘리제가 힘을 개방하다 데몬의 품에서 쓰러질 때까지 황제는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마침내 데몬은 보았다.
‘저기!’
붙어 있었다. 황제의 머리 뒤에.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헬리오의 실제 얼굴이.
‘뒤에 있었구나.’
데몬은 재빨리 엘리제를 내려놓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다시 한번 성검을 들어 로안의 머리 뒤에 감춰져 있었던 헬리오의 얼굴을 잘라냈다.
스걱.
머리카락이 삭둑 잘려 나가듯 헬리오의 얼굴이 떨어져 나갔다. 감춰져 있던 헬리오의 육신이 얼굴 아래로 나타났다. 곧바로 데몬은 그 심장에 성검을 꽂아 넣었다.
푹!
검은 피가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검날이 헬리오의 몸을 뚫고 땅속까지 파고들었다.
“컥, 나는 불……멸, 네까짓…… 것들이 나를…….”
로안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어도, 성검이 심장을 꿰뚫었어도 헬리오는 살아 있었다.
바닥에 꽂힌 채로도 헬리오는 데몬에게 공격을 퍼부어댔다.
상처투성이가 되면서도 데몬은 붉은 눈을 물들이며 검을 더 밀어 넣었다.
득득. 뼈와 심장이 썰리는 느낌이 선명했다.
“크헉!”
헬리오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 순간.
“헬리오…….”
“!”
성자라 불리던 자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 이름…… 참, 오랜만, 이군.”
웃는 헬리오의 입 끝에서 주룩 검은 혈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불려야 하는 것은 온전한 진명이다. 크레미언 대공이 그 뒤까지 알 리가 없다.
그래야 하는데.
“타나…….”
그러자 헬리오의 시선이 마구 떨렸다.
“으아악!”
괴성을 지르며 데몬의 입을 막기 위해 그가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부르지 마! 부르지 마, 감히!!”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성검에 꽂힌 헬리오가 허우적거렸다.
동시에 더욱 격한 공격으로 데몬의 몸 역시 여기저기가 부서지듯 찢기고 터지며 무너지고 있었다.
“안 돼요! 데몬!!”
그의 등 뒤에 정신을 차린 엘리제가 절망에 가득 차 외쳤다.
“……토스.”
데몬이 진명을 완성했다.
그와 동시에 데몬은 모든 마력을 모아 헬리오의 몸에 일격을 가했다.
콰과광! 주변을 휩쓰는 강력한 폭발이 일었다.
절망과 공포가 가득한 눈으로 헬리오의 눈이 커다랗게 열리고.
“마, 침내…….”
바라기라도 했다는 듯이 헬리오가 마지막 말을 뱉었다.
그리고 검은 연기와 함께 순식간에 그의 몸이 스스로 불길 속에 사그라들었다.
한 줌의 재도 남기지 않고.
바닥에 꽂힌 성검만이 그가 있었던 자리를 알려주고 있었다.
신의 허무한 종말이었다.
검의 손잡이를 잡고 버티던 데몬 역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