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분열 속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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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분열 속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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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분열 속 황제
2022.12.22.
국경에 있던 황군은 황궁이 있는 수도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황제에게 반기를 든 모두를 진압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들기 위해 진군 중이었으나 그들의 목숨을 되살린 이는 엘리제였다.
“저는 싸우지 않겠습니다!”
“저 역시 못 합니다. 저를 죽인 것은 황제 폐하의 권능이었고, 저를 살린 분은 성녀이십니다!”
어느새 그들은 엘리제를 성녀라고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여신이라고도 했다.
“황제 폐하의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것인가!”
말은 그렇게 했으나 황군을 이끄는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웠다.
그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황제가 이능으로 무차별 학살을 가했던 것을. 운 좋게 살아남아 몸을 숨기고 있을 때 그다음으로 그들이 분명하게 본 것은 죽은 이를 살려내는 엘리제의 기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고 휘청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감싸 안았던 것은 크레미언 대공이었다.
이제 그들은 누가 그들의 적이고, 아군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저는 제 목숨을 구해주신 분께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황군의 갑옷을 벗어 던지고 대공가의 기사단에 투항하겠다는 이가 한둘씩 늘었다.
“이런 불충한 것들! 전시에 명령 불복종은 죽음임을 모르느냐!”
지금 여기서 황제의 명에 따르지 않으면 살아남아도 후에 죽음을 맞을 뿐이었다.
특히 귀족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귀족들에게 그 작위와 영토를 준 자는 황제다. 그러니 그들은 황제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 선택이 가져올 미래는 너무나 뻔했다. 황제가 준 지위와 재산 모두를 반납해야 할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황제는 무시무시한 파괴력까지 갖추지 않았는가.
괴물이지만 그들이 모셔야 하는 주인이었다.
“반역의 무리에 투항하겠다면 여기서 너희들의 목숨을 거둬가겠다!”
수도로 향하는 황군을 막기 위해, 그들의 뒤로 대공가의 기사단이 쫓아오고 있었다.
되살아난 수백의 병사가 항복을 원했으나 황군은 그들을 보내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대공의 기사들이 지척에서 외쳤다.
“아직도 지금 진짜 적이 누군지 모르겠는가!”
“우리는 황제 폐하를 위해 싸울 뿐이다!”
“그가 정령 황제가 맞긴 할까?”
“반역의 무리의 말은 들을 필요 없다! 당장 공격하라!”
“우리는 황궁으로 진격한다!”
“저희는 투항하겠습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는 사이 투항하는 이, 진격하는 이, 대공가에 맞서는 이로 나뉘어 황군은 완전히 분열되고 있었다.
***
같은 시각, 궁은 또 다른 큰 충격에 휩싸인 상황이었다.
프시케가 그동안 미로니카에 내려오던 전설이 ‘사실’이라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전설이라니.
지금과 같은 혼란한 상황에 황후가 예상치 못한 언급을 하자 귀족들이 당황하여 물었다.
“우리 미로니카의 건국에 관한 그 전설 말씀이십니까?”
황국의 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미로니카를 세운 알렉산더와 그의 친구 페인에 관한 신화.
역사에 기록된 초대 황제 알렉산더는 페인의 강력한 힘을 통해 제국을 통일하였고, 후에 공을 높이 사 그에게 대공의 지위를 내렸다. 그렇게 크레미언 대공가가 시작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두 초대 황제 알렉산더와 그의 친우 페인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에는 숨겨진 진실이 신화 속에 있습니다.”
황후가 답했다.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존재가 신화 속에는 등장했다.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강력한 마물들을 무찌르고 인간 사이의 전쟁도 종식시켜 제국을 통일한 ‘위대한 이’가.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그게 초대 황제를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그저 전설이라 생각했다. 나라마다 흔히 존재하는 이야기일 뿐 실제 그런 이가 존재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왜 그토록 위대한 이에 대한 기록이나 유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황후가 곧 그들의 생각을 뒤엎는 말을 했다.
“전설에 등장하는 그 위대한 이가 바로 페인입니다. 전해지지 않은 내용은 마물을 무찌르고 제국을 통일하여 처음 황제가 된 이 역시 페인이라는 것입니다.”
“!”
그 말은 황국의 근간을 흔드는 실로 엄청난 말이었다.
미로니카를 건국한 초대 황제가 어찌하여 대공가의 시조로 바뀌어 있다는 말인가?
황제였던 자가 스스로 대공으로 물러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솔직히 믿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말도 안 됩니다!”
예상했던 대로 귀족들이 반박했다.
“황후 폐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크레미언 대공가는 왜 가만히 있었습니까?”
사실 귀족들은 이미 예전부터 의아해했었다. 황제보다 권력과 마력이 센 대공가가 왜 한 번도 황위를 욕심내지 않았던 것일까? 그토록 강력한 힘을 갖고도.
하지만 그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건국 초부터 황가와 대공가의 관계가 그러했으니까. 그저 대공가의 충심을 높이 샀을 뿐. 그런데 지금 황후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이상했다.
“황후 폐하의 말씀대로라면 그토록 강력했던 페인이 황위를 빼앗기고 가만히 있었고, 새로 황제가 된 알렉산더께서 황위를 빼앗은 이후 페인과 그 가문을 살려두었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 황제가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가만히 황제의 자리를 빼앗길 황제도, 황위를 빼앗고 그를 살려놓을 황제도.
“그것은 황가와 대공가 사이에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약속이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깝지만.”
다니엘이 대신 답했다. 그리고 그 ‘빌어먹은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아시다시피 대공가의 가주에게 내려오는 마력은 일정한 주기로 폭주를 합니다. 페인 각하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멈추기 위해 정령석이 필요했습니다.”
폭주를 했던 것이다.
위대하고 강력한 힘으로 마물을 몰아내고 미로니카를 세웠던 황제 페인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폭주하는 황제에게 정령석을 내밀며 위협하는 자가 나타났다.
알렉산더였다.
***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괴성을 지르며 황제가 달려들었다.
데몬은 엘리제를 끌어안은 채 한쪽 팔로 공격을 감당해 내고 있었다.
폭발적인 흑마법의 폭격이 이어지자 정령의 힘으로 회복됐던 신체에 무서운 속도로 상처가 생겨났다.
“데몬!”
눈앞에서 그의 신체가 찢기고 벌어진 살이 터져나가는 것이 보이자 순식간에 엘리제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정령의 힘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힘이 헬리오의 상처마저 치유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검게 변한 황제는 더 이상 아름다운 로안의 모습이 아니었다.
잔인하게 일그러진 얼굴 뒤로 괴물이 된 헬리오의 민낯이 비칠 뿐이었다.
데몬의 눈에는 그의 얼굴뿐 아니라 힘에도 변화가 있음이 느껴졌다.
‘……이상하군.’
공격을 막아내면서 헬리오의 힘의 고스란히 느껴졌다.
분명 자신과 마찬가지로 헬리오도 힘을 회복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강력한 힘으로 공격해올 것을 각오하였는데 힘의 크기가 그대로였다. 게다가 아까부터 헬리오의 움직임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그때.
꿈틀!
황제의 얼굴과 다리 근육이 동시에 뒤틀렸다.
***
수백 년 전.
미로니카 황국을 세운 후 페인이 막강한 마력의 노예가 되어 주변을 다치게 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작은 정령석을 들고 한 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순식간에 황제의 폭주를 잠재웠다. 아주 잠시만.
차라리 평온을 맛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정령석이 힘을 다하고 다시 찾아온 폭주는 페인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더 큰 고통 속에 빠진 황제의 목줄을 쥐고 청년이 제안했다.
“정령석이 매장된 곳은 저만이 알고 있습니다.”
제안을 가장한 협박이었다.
청년 없이는 폭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황제가 받아들이기까지는 며칠이 채 걸리지 않았다. 폭주한 힘이 주변 이들의 목숨까지 앗아가자, 소중한 이들을 더 잃고 싶지 않았던 페인은 조건을 받아들였다.
맹수를 조련하는 조련사처럼, 알렉산더는 정령석을 이용하여 페인의 주인이 되었다.
그것이 황가와 대공가 사이의 약속, 거래의 시작이었다.
정령석을 제공받고, 그들의 검과 방패가 되는 것.
당연히 황가는 정령석을 철저히 독점하고 통제했다. 다른 이들은 정령석의 존재조차도 모르게.
“이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이곳에 있습니다.”
프시케가 황궁에 모인 귀족들을 향해 침착하게 말했다.
그 말에 다니엘이 들고 온 서류들을 공개했다.
거래가 이루어진 수백 년 동안 대공가에서 보관해온 서신과 거래에 대한 계약서였다.
그 안에는 로안의 아버지와 조부의 것, 심지어 로안과 데몬의 친필 서명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 사실을 황제인 로안 역시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귀족들의 얼굴이 혼란으로 창백해졌다.
미로니카는 크레미언가의 가주로 인해 세워졌고, 지금의 황가는 그들을 협박하여 황위를 가졌다.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 사실을 밝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공가에서 잃어버렸던 황위를 되찾기라도 하겠다는 말일까? 황후와 손을 잡고?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왜 하필 지금인가?
충격적인 폭로에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말씀하신 바가 사실이라 하여도 미로니카의 황위는 이후 알렉산더 황제 폐하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것이니 문제가 없습니다.”
초대 황제가 바뀌었을 뿐, 그 이후 미로니카를 통치하고 이끌어 온 것은 현 황가가 맞으니까.
황후는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모두 들은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물론 지금 황제께서 가지고 계신 황위의 정당성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미로니카의 건국이 대공가의 시조를 통해 이루어졌고 이제 그 결말을 볼 때라는 것입니다.”
결말을 본다고? 설마, 대공을 이제 와 황제로 추앙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공가는 이제 그 약속 관계를 끝내려 합니다.”
반역이 맞구나. 그것도 황후와 대공이 손을 맞잡은.
황제의 편 귀족들이 생각하는 찰나.
“크레미언 대공가는 공국으로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
황위를 되찾는 것이 아니고?
“이미 대공가는 충분한 양의 정령석을 확보하였고, 대공 각하께서는 더 이상 폭주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만큼 강해지셨습니다.”
그럼, 더욱 황제가 되고 싶은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이제 대공을 조이는 목줄도 없고 마력은 이전에 비해 더욱 막강해졌다.
그토록 강력한 힘과 황위를 이을 정당성이 있는데 왜 황제가 되지 않겠다는 것인가.
“동시에 대공가는 이 자리에 계신 분을 새로운 황제로 모시고자 합니다.”
“!”
이 자리에 있는 자라고? 귀족들이 서로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다니엘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프시케의 선언이 이어졌다.
“미로니카의 황제는…….”
모두가 숨을 죽여 황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황제의 군대는 지금 대부분이 국경에 있었고, 황궁으로 돌아온 이들 역시 황후의 명을 따르거나 치료 중이었다. 황제 로안의 편에 선 귀족들은 긴장으로 말아 쥔 손에 땀이 흥건하였다.
이곳에서 황후가 다음 황제가 될 이를 지목하는 순간에 그들은 그자와 지금의 황제 중 누구를 따를지 결정 내려야 했다.
“황제는…… 제가 되겠습니다.”
“!”
당당한 그녀의 목소리에 귀족들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황후를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황국과 로안을 제 손으로 지켜야겠습니다.”
황후가 황제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 옆에 선 다니엘이 단호하게 외쳤다.
“프시케 황후 폐하께서 황제가 되시는 날까지 대공가가 함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