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구원의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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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구원의 여신
2022.12.19.
강력한 폭발.
섬광과 함께 귀를 멀게 하는 굉음이 이어졌다.
지독히 강한 흑마법에 살이 찢기고 피가 튀기며, 순간 데몬의 방어막이 터졌다.
‘이런!’
순식간에 쓰러지며 부수어지는 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데몬은 온 힘을 끌어올려 다시 한번 재빨리 방어막을 형성했다. 붉은 눈이 강한 빛을 내며 진하게 변하자 대기를 가르며 투명한 막이 형성되었다.
“으윽, 컥!”
외부의 힘과 파괴음이 차단되자 대신 기사들의 신음으로 안이 채워졌다.
“부상자를 대열 뒤쪽으로! 공격이 더 거세질 것이다.”
여전히 멀리 정면의 황제를 응시한 채 데몬이 뒤로 도열한 군사들에게 명했다.
자신과 헬리오를 제외하고는 마력이나 이능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라 방어막이 사라진 것이 찰나였어도 부상이 컸다. 데몬도 곳곳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황궁에 변화가 생긴 것이 분명한데…….’
길게 웃으며 공격을 퍼붓는 황제를 붉은 눈이 노려보았다.
황궁에서 온 소식이 그를 흔든 것인지 황제는 웃고 있으나 무척 화가 나 보였다.
더욱 과격하게 모든 걸 부수는 공격이 그 분노의 크기를 보여주었다.
그 소식이 어쩌면 데몬이 기다리던 내용일지도 몰랐다. 마가렛이 황후를 무사히 원래대로 되돌렸다는 소식. 그래서 황제가 당장 이곳을 끝장내고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어진 걸 수도 있으리라.
‘이제 곧 한계다.’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는 방어뿐만 아니라 공격이 필요했다.
마력으로 만든 방어막이 한 번 더 힘을 잃는 순간이 온다면 기사들은 모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헬리오의 공격은 황군이나 기사단 할 것 없이 무차별적이었고, 잔인하게도 지독히 강했다.
어느새 데몬의 곧게 뻗은 이마 사이에 땀이 맺혀 흐르고 있었다.
그 순간. 저 멀리 수풀 사이 몸을 숨긴 미카일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하얀 옷을 입은 사제의 손에서 작게 푸른색 손수건이 흔들렸다. 반가움에 붉은 눈에 힘이 실렸다.
“!”
쿠우우우.
지축을 흔드는 굉음을 내며 데몬이 마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푸른 손수건은 황후의 흑마법을 풀고 무사히 그녀와 만났음을 의미하는 신호였다.
변화를 느낀 황제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주춤대었다.
그리고 기대에 찬 눈으로 황제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제대로 상대할 마음이 생긴 것인가?”
드디어 반격이었다.
***
“거의 다 왔습니다!”
엘리제를 함께 태우고도 자이드의 말은 과연 빨랐다. 곧바로 둘의 뒤를 쫓았던 대공가의 기사단과도 어느새 상당한 격차가 벌어졌다.
자이드의 정령의 힘이 말의 속도를 높여 엘리제는 예상보다 빠르게 전장에 도착했다. 멀리 빛이 번쩍이고 귀를 울리는 폭발음이 들렸다.
아직 전투 중인 것을 보니 다행히 데몬이 무사한 모양이었다. 어서 그에게 더 가까이 가야 했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 것들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그녀가 마주한 곳은 진정 혹독한 전쟁터였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과 같을까.
황폐한 들판에 다친 자들과 피 흘리는 자들이 쌓여 끔찍한, 실로 처참한 현장이었다.
신체가 훼손되거나 사라져 널브러진 이가 수백, 아니 수천이었다.
“웁!”
엘리제의 속이 뒤집혔다.
바로 곁에서 자이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엘리제 님, 괜찮으십니까?”
“괜, 괜찮아요.”
이전에 타나가 황궁을 부수고 사람들에게 공격을 가했을 때도 이토록 잔인하고 처참하지는 않았었다.
헬리오의 폭력과 광기에 죄 없는 이들이 목숨과 신체를 잃고 고통의 신음이 가득한 공간.
엘리제는 갑자기 시야가 아득해짐을 느꼈다.
“엘리제 님!”
휘청이는 가냘픈 몸을 옆에 있던 자이드가 황급히 잡아 부축했다.
“어쩌면 너무 오래 시에델에서 떨어져 계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이드는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 역시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정령의 힘이 미로니카에서는 무한일 수 없으니.
그러나 차마 그녀를 두고는 갈 수 없었다. 힘을 계속 쏟아내어 정령수를 만들어내는 엘리제를 보고는 더욱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시에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잡아 뒀어야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후회스러웠다. 그녀가 힘을 사용할수록 다른 이들의 힘은 강해질지 모르나 정작 그녀의 생명은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역시 엘리제는 시에델에서 살아야 해.’
시에델, 나의 품에서.
자이드가 두 눈에 엘리제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는 동안 엘리제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할 수…… 있을까?’
헬리오가 신과 같은 이능을 가졌다 하여도 죽은 자를 되돌릴 수는 없다. 부상자, 병든 자를 일으켜 세우는 성자였으나 헬리오가 신성력으로 죽은 자를 살린 적은 없었다.
흑마법을 이용하여 죽은 이를 살려내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엘리제의 부활은 달랐다.
‘나라면……, 가능할 것만 같아!’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예지몽을 꾼 적도 없고, 이전에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 자신이 존재함을.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이었구나.’
데몬과 서로 사랑하고, 사람들을 살리는 것.
그녀는 스스로 만든 이 숙명을 받아들였다.
‘이 소설 속에서…… 이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정신을 집중하여 정령의 힘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엘리제는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행여나 헬리오가 자신의 힘을 눈치챈다 해도 이들을 구하는 것이 자신이 원하던 일임을.
힘이 열리기 시작하자 품속에서 떨고 있던 토리와 로떼가 반응했다.
뀨뀨우!!
“왕태자님, 토리와 로떼를 부탁드려요. 시에델로 가실 때 둘을 데려가 주시겠어요?”
자이드를 만나 토리, 로떼를 부탁하기 위해 여기까지 데려왔었다. 귀여운 생명체들이 엘리제의 품을 떠나려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자신의 품은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뀨! 뀨!
그런데 엘리제의 품에서 내려온 토리와 로떼가 숲을 향해 달리더니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왕태자님! 꼭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난처한 표정으로 자이드가 말을 달려 로떼와 토리의 뒤를 쫓아가자 엘리제는 차분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붉은색 꽃들로 온통 가득한 들판처럼, 황폐한 전장에 붉은 피로 물든 시신들이 쌓여 있었다.
그 들판의 너머, 천둥과 번개가 치는 곳이 보였다.
빛들이 폭발하며 굉음을 내고 있는 바로 저곳에 데몬과, 로안의 얼굴을 한 헬리오가 있을 것이었다.
엘리제가 깊게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러고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쉬이이잉.
전장의 피비린내를 몰아내는 향기로운 바람이 불고 그녀의 몸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
데몬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등 뒤로는 방어막을 유지하고, 앞으로는 헬리오를 향해 공격을 쏟아내려니 마력이 어마어마하게 사용되었다. 대공가의 기사단과 황군 양쪽 모두는 이미 공격선에서 물러나 부상자 치유에 여념이 없었다.
사실상 황제와 데몬, 두 사람의 싸움이었다.
공격을 가하며 계속해서 데몬은 성검을 이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주룩.
거세게 뛰는 심장박동에 맞춰 붉게 벌어진 데몬의 상처에서 울컥울컥 피가 쏟아졌다.
마력을 강하게 사용할수록 몸에 타격이 가는 것이 당연했다.
‘그나마 상대 역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로안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검게 변하고 있었다. 확실히 숨도 거칠어진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계속 상대한다면 분명 헬리오를 쓰러트릴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자신과 기사단의 목숨도 모두 희생되겠지만.
그때, 상처가 난 다리에 작고 부드러운 무엇인가가 빠르게 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너희!”
토리와 로떼였다.
‘설마, 엘리제가?’
맙소사, 그녀가 여기 온 것인가?
데몬의 몸에 순식간에 긴장이 흘렀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었다.
‘그녀만은!’
고개를 뒤로 돌리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후드를 쓴 누군가가 쓰러진 이들을 향해 손을 내려 눈부신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죽은 자를 살려내는 빛을.
데몬의 기사단들도, 살아남은 황군도 모두 그 모습에 넋을 잃었다.
죽어 쓰러진 수백, 수천 명이 서서히 목숨을 되찾는 경이로운 모습에 절로 입이 벌어지고 감탄이 터졌다.
꿈이라도 꾸는 듯 몽롱한 표정으로 누군가가 먼저 외쳤다.
“신……이시여!”
“아아……, 성녀다! 성녀가 오셨다!”
하늘에서 내려오기라도 한 듯.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여신이 그들을 구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데몬은 걱정으로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저토록 정령의 힘을 쏟아내 버리면!’
그녀가 쓰러져버릴 것이었다. 한두 사람도 아닌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있었다. 저러다 그녀의 힘이 다 소진되어 버리면 어찌 되는 것인가.
이곳은 정령의 힘이 스민 시에델의 대기와 대지가 아니다.
‘안 돼, 엘리제!’
데몬은 당장 몸을 돌려 엘리제를 향해 달렸다.
지금 헬리오를 막고 미로니카의 황제를 바꾸는 일은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갑자기 자신의 상대하던 데몬이 몸을 돌리자 헬리오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가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저게 누구야!”
놀라워 푸른 눈이 커졌다.
엘리제가 살아서 나타났다.
그것도 사람을 살리는 마법을 사용하면서.
‘그럼, 그게 엘리제의 힘이었나?’
프시케에게 이지를 돌아오게 한 시에델의 힘.
그런 힘을 엘리제가 가지고 있을 줄이야. 황제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지만 타나에게 검을 밀어 넣고 엘리제 역시 타나의 낫에 목숨을 잃는 것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설마!’
그렇다면 정령의 힘이 완성에 이르러 부활이라도 했다는 것인가?
“고작 인간이?”
크하하하하하하하. 전투로 가열된 황제의 몸을 울리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과연!”
자신과 프시케는 불멸의 존재라 영원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설마 또 있다는 것인가?
“그것도, 아직 나와 프시케는 할 수 없는 부활을 한다고?”
고작 한 번 살고 죽어야만 한다. 그게 그가 아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프시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그런 인간이어야 한다.
주제도 모르고 부활을 하고, 남을 부활시키기까지 하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건 곤란하지.”
자신과 프시케 둘이면 족하다. 둘의 특별함을 위협하는 것들은 필요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려대면 애써 죽인 보람이 없잖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빛을 잃을 것이다.
“데몬과 엘리제는 아무래도 나와 프시케를 위한 안배인 모양이군.”
무료한 자신을 위해 준비된 희생물. 넘어야 할 장애물이자 유희 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갑자기 검게 변한 황제의 얼굴에 환희와 희열이 차올랐다.
“감히 너희가!!”
신에 대항하다니.
황제의 포효가 전장을 울렸다.
엘리제를 향해 빠르게 달리던 데몬도 그 소리를 들었다.
‘눈치챘구나!’
더욱 날듯이 그녀 쪽으로 몸을 던졌다.
자신의 기사단을 위한 방어막을 여전히 유지한 채로, 데몬이 손을 들어 올려 엘리제를 위한 방어막 하나를 더 만들었다.
재빠르게 투명한 막이 그녀를 에워싸자 그녀의 몸이 더욱 밝은 빛으로 휩싸였다.
“!”
동시에 데몬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엘리제의 빛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이 느껴지자마자 빠른 속도로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그녀의 능력이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마치 그녀와 연결이라도 된 듯 엘리제가 뿜어내는 힘은 그 빛이 닿는 모든 것을 치유하고 정화하며 되살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헬리오 역시!’
회복되고 있을 것이었다. 다시 생생해진 헬리오를 상대할 생각으로 데몬은 아찔해졌다.
하지만 곧 다른 이유로 더욱 아찔했다. 엘리제와 지척이 되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몸이 휘청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데몬은 황급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 품속에서 작게 안도가 터졌다.
“미안해요, 데몬.”
작은 속삭임이 사랑스럽게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품 안에 들어온 부드러운 몸과 체향이 익숙하게 데몬을 감쌌다.
그러는 사이 놀랍게도 그의 상처가 모두 회복되고 마력이 다시 차오르고 있었다.
“너무 미안해요. 그렇지만……!”
데몬은 서둘러 입술을 내려 향기로운 입을 삼켜버렸다.
간절한 마음으로 차오른 마력을 다시 그녀에게 불어넣었다.
나는 너무 무서웠어. 너를 잃을까 봐.
울컥한 마음에 데몬은 입술을 떼고 당장 진심을 전했다.
“사랑합니다, 엘리제. 사랑해.”
“데몬…….”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엘리제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마치 울 듯했다. 당황과 설렘이 섞인 그녀의 얼굴을 향해 데몬이 애원하듯 말을 이었다.
“제발 나를 위해 이 위험한 행동을 당장 그만두면 안 되겠습니까?”
그 순간 푸른 눈을 한 황제의 광기 어린 목소리가 다시금 전장을 울렸다.
“너희 둘, 내가 함께 없애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