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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혼란 속 당신을 위하여 (117/126)


117. 혼란 속 당신을 위하여
2022.12.15.


국경에서 데몬은 자이드를 보내 자신의 뜻을 대공가의 기사단에게 한 번 더 전했다.


“엘리제 님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라 하셨다.”

데몬에게 받은 서신을 보여주며 자이드가 말했다. 가주의 인장이 찍힌 서신이었다. 기사단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사단을 향해 외쳤다.


“황궁에서 나오는 병력은 단 한 명도 대공가 근처에 이를 수조차 없게 해야 한다!”

“예!”

몸을 숨겼던 대공가의 정예 부대가 황궁의 근처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고 황군을 맞닥뜨린 이유가 이것이었다.

수백 대 수천의 대치였으나 대공가 기사단의 위용과 전투력은 이미 황국 전역에서 이름 높았다.

삽시간에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주변을 휩쓸었고, 검날과 창끝이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에 다친 자들과 피 흘리는 자들이 널브러지기 시작했다.

뿌우우.

그때 황궁에서 뿔피리 소리가 크게 울렸다.

동시에 황궁의 문이 열리고 붉은 머리의 우아한 여인이 나타나 모두를 향해 외쳤다.


“미로니카 황후로서 명한다. 황군은 당장 공격을 멈추라!”

“황, 황후 폐하! 모두 공격을 멈추어라!”

멈추라는 명이 반복되어 울렸다. 황군이 멈추자, 그들을 둘러싼 대공가의 기사단 역시 공격을 멈추었다.

전투의 시작과 동시에 황군은 벌써 제법 전투력이 상실된 상황이었다. 갑옷을 입은 수많은 이들이 황후를 향해 무릎 꿇는 소리가 땅을 울렸다.


“황군은 모두 무장을 해제하고 당장 부상자를 챙겨 궁으로 복귀하라!”

날벼락 같은 황후의 명에 황군은 혼란스러웠다.

황제의 명을 받고 대공가를 공격하러 가기 위해 출발하자마자 궁 앞에 매복해 있던 대공가 기사단을 만났고, 그로 인해 황군은 대공가의 반역에 확신을 가졌던 차였다.

중년의 남자가 황후에게 달려와 물었다. 군을 이끄는 백작 중 하나였다.


“신은 황제 폐하께 당장 대공가를 섬멸할 것을 명 받았습니다! 황제 폐하의 명 없이는 군대를 퇴각시킬 수 없습니다.”

황궁의 통솔권이 황후에게 있다 한들, 황군에게 명을 내린 이는 황제였다.


“참으로 어리석은 백작이로군. 황국을 지키는 두 힘이 서로에게 검을 겨누면 어쩌자는 말이냐! 지금 황국의 적은 대공가가 아니다!”

게다가 전투의 시작과 동시에 벌써 황군은 기습으로 기세가 꺾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황제의 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군을 맡은 백작은 고지식한 자였다. 그는 자신이 아는 바만 뱉을 뿐이었다.


“전시에 군은 최고 지휘권자의 명에만 따릅니다.”

“그 말은, 황후인 나의 명은 거역하겠다는 뜻이더냐?”

프시케의 음성이 더욱 낮아지고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녀의 위엄 있는 태도에 군은 더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으나, 군대를 이끄는 백작과 의견이 대치되자 혼란스러움은 가중되고 있었다.

두 사람 곁으로 궁에서 나온 누군가 급히 달려오며 소식을 전했다.


“구, 국경에서 긴급히 연락이 왔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계시는 곳에 사상자가 이미 너무 많아 부상자를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함께 간 의무병들이 있었을 텐데 지원 요청이 왔다는 것은 그만큼 치열한 전투 현장을 의미했다. 지금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프시케가 당장 고개를 돌려 단호히 명했다.


“이곳에 남은 의사나 구급 대원을 당장 모아오라. 원군 지원이 먼저다.”

그러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된 것도 대공가의 기습을 받아서라며 백작이 서슬 퍼런 안광을 번뜩이며 맞섰다.


“하오나, 지금 그 반란군을 이끄는 자가 크레미언 대공입니다. 황군이 황제 폐하의 명을 따르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국경의 소식을 전한 이가 난처한 표정으로 작게 덧붙였다.


“아뢰옵기 송구합니다만 황후 폐하……, 지원요청 내용에는 황군의 피해가 반란군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적혀 있었습니다.”

예상했다는 듯 차분한 황후 대신에 백작이 더욱 흥분하여 시종을 향해 외쳤다.


“그게 무슨 말인가! 황군 내부에서 분열이라도 일어난 것인가?!”

“그, 그것이…… 황제 폐하께서 사용하시는 권능에 의해 막대한 피해자가 생겼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황제가 사용하는 권능이라니. 황제에게 권능이 있을 턱이 만무했다. 애초에 마력은 크레미언 대공만이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그게 무슨 해괴한 말이냐?”

시종의 말을 들은 백작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


“권능이라니, 황제 폐하를 음해하기 위한 모함입니다! 황후 폐하, 신은 황제 폐하께서 제게 주신 명을 받들어야겠습니다!”

백작이 자신의 소신대로 황군에게 다시 공격의 명을 내리려 하자, 프시케가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백작이 하려는 선택은 지금 황후인 나와 나를 지지하는 모든 세력, 그리고 대공가를 적으로 돌리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라.”

“!”

그 말은 백작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그대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백작가의 군사뿐, 나머지 황군은 나의 명을 따라야 할 것이다.”

백작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곳에서 황군에 섞인 백작의 군대가 기껏해야 얼마나 될까?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눈앞에 선 황군의 지휘권이 임시로 자신에게 있다 하여도, 결국 군은 황후의 명을 따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황제와 황후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택할 것인가.

백작은 고지식한 자이긴 했으나, 세상 물정에 어두운 자는 아니었다.


“……황후 폐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프시케의 명 아래 황군은 속히 궁으로 복귀하고 사상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



“황후 폐하! 마가렛!”

“엘리제!”

나는 마중 나와준 프시케와 마가렛을 향해 달렸다.

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썼던 검은색 후드가 뒤로 넘어가자 앞이 밝아지며 그들이 더욱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다행이야! 무사하구나. 황후 폐하도, 마가렛도!’

나를 믿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무사히 살아 있고 건강한 모습인 걸 확인하자 울컥 가슴이 뜨거워졌다.

프시케와 마가렛 역시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 보였다.


“황후 폐하, 보고 싶었어요. 다시 온전한 모습이시어 다행이에요!”

보고 싶었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만큼 그녀가 걱정되었었다. 주술이 풀린 그녀를 볼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내 인사를 받은 그녀가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정말 나도 많이 보고 싶었단다. 살아 있어 주어 고맙다. 미로니카가 네게 큰 은혜를 입었구나.”

“황후 폐하…….”

프시케는 진심 어린 말로 내게 고마움을 전했다.

데몬을 살리기 위해 타나를 상대했던 것이지만, 프시케의 인사를 받으니 목숨을 걸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뿌듯했다.


“그런데 어찌 다니엘 경과 함께 왔느냐. 크레미언 대공은 널 대공가에 꼭꼭 숨겨놓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

프시케가 고개를 들어 동생 걱정하는 언니의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도 데몬의 계획을 전해 들어 알고 있다고. 그래서 다니엘이 서류를 들고 황궁으로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내가 올 것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문서가 여기 있습니다. 헬리오가 나타나기 전에 황궁에서 속히 진행하셔야 합니다.”

다니엘이 프시케에게 문서를 내밀며 말하는 순간.

갑자기 내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반지!’

데몬이 준 반지가 웅웅 소리를 내며 공명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불안함에 입에서 비명처럼 말이 터졌다.


“……각하께 설마!”

반지는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데몬에게 알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받은 것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도 소리를 내며 빛을 냈다.


“주군께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다니엘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위급한 상황에 전장에서 아무리 빨리 신호를 보낸다 해도 연락이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반지의 경우에는 위험이 생기는 그 즉시 공명했다.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확인해봐야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네 번째 손가락에 걸린 반지의 보석이 탁! 소리를 내며 깨졌다.


“!”

데몬!

반지가 깨지는 모습에 놀라 모두의 눈이 커졌다.

걱정만 하고 있을 여유가 내게 더는 없었다.


“다니엘, 당신은 주군께 명 받은 일을 하세요. 황후 폐하, 제가 가봐야겠어요!”

당신들은 미로니카의 황제를 바꾸는 일을 하세요.


“하지만, 엘리제! 그곳에 가면……!”

프시케가 나를 말렸다. 그 옆에 거의 울 듯한 표정의 마가렛도 보였다.


“저는 제 숙명대로 할게요.”

데몬을 지키는 일을.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미카일이라면, 하임이라면, 마가렛이라면 안 보내주겠지. 그렇지만 다니엘이라면 나를 보내줄 줄 알았어.


‘데몬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을 그 역시 아니까.’

다니엘이 대공가 기사단에게도 내 뒤를 따를 것을 명할 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자이드가 다가왔다.


“제가 모셔드리겠습니다. 말에 정령의 힘을 이용하면 조금 더 빨리 당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대공께 부탁받은 것이 있으니 함께 가겠습니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데몬에게 닿고 싶었다.

자이드가 가진 의도를 따지는 것은 나중 문제였다.


“네, 감사해요. 그럼 황후 폐하, 마가렛, 다니엘 다녀올게요!”

서둘러 인사를 한 후 나는 후드를 다시 뒤집어썼다.

나와 자이드가 탄 말이 국경 지역을 향해 빠르게 바람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

궁으로 돌아온 황후는 남은 치료사와 의사를 지원군으로 편성하여 전투 중인 국경으로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황궁 안에서의 소란은 이제 시작이었다.


“대공은 황국에 반(反)한 것이 아니라, 황후인 나를 지키기 위해 기사단을 보냈던 것입니다.”

황후가 황제와 뜻이 같지 않음을 이미 공표하였기 때문이었다.


“대공가에서 황후를 지키기 위해 반기를 들었다는 말이오?”

“황후께서는 그들이 반기를 든 것이 아니라 하시지 않소!”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대공과 그 일가를 반역의 무리라 하셨지 않습니까.”

“그 역시 전장에서 들려온 이야기이지, 우리가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요.”

예상대로 귀족은 둘로 의견이 나뉘고 있었다. 국경에서 들려온 소식도 그들을 흔드는 것에 한몫하였다.


“황제 폐하께서 황군을 공격하셨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애초에 폐하께는 권능이 없지 않소!”

“크레미언 대공이 첩자를 보내 우리를 음해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 다시 저리 멀쩡하신데 대공가와 뜻을 함께하고 계시지 않소.”

결국 황제의 말을 믿을 것인가, 황후를 믿고 그녀의 편에 설 것인가의 문제였다.

황궁 집무실을 가득 메운 귀족들이 소란스럽게 서로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

알현실에서 집무실로 이어지는 입구가 활짝 열렸다.


“황후 폐하와 크레미언 대공가의 다니엘 경 입장하십니다.”

상석을 향해 차분하게 내딛는 황후를 따라 다니엘이 무언가를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귀족들이 한 차례 더 술렁였다.


“다니엘이라고? 아카데미 최연소 수석졸업자 말인가?”

“그런 수재가 대공가 편에 섰단 말이오?”

어렵기로 소문난 아카데미의 새 역사를 쓴 이례적인 인재였으므로 다니엘은 이미 황국 전체의 유명인이었다.

대공은 어디까지 내다보고, 언제 저런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단 말인가.

귀족들의 예리한 눈빛이 황후와 다니엘을 향해 집중되었다.


“마침 미로니카의 모든 귀족과 관리들이 모인 자리이니, 중대한 사실을 발표하겠습니다.”

황후 프시케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맑은 초록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

미로니카의 국경으로 향하는 변방은 여전히 황폐한 전장이었다.

그곳에 로안의 얼굴을 한 헬리오가 손에 쥔 서신을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구겨 버렸다.

한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그를 분노케 하였다.

「황후께서 방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쥐새끼가…… 하나가 아니었던 모양이군.”

손에 쥐었던 서신이 그가 만든 화염으로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정신을 차렸으니 이제 너는 어찌 나올까? 나의 아름다운 마리오네트.”

구겨졌던 얼굴이 펴지며 다시 화려한 미소가 입에 걸리나 싶더니 맞은편 붉은 눈의 상대를 향해 그가 두 손을 활짝 펼쳤다.

그리고 눈이 멀 듯 강력한 폭발이 쏟아진 것은 찰나였다.

인식도 못 하는 사이, 섬광이 터지며 동시에 데몬이 만든 방어막도 터졌다.

여기저기가 찢겨나가고 피가 튀고 살이 터지며 끔찍한 비명과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황제의 수려한 미소가 광기 어린 모습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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