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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신은 너희 편이 아니다 (116/126)


116. 신은 너희 편이 아니다
2022.12.12.



 


‘아직은 안 돼!’

데몬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프시케의 안전이 확보되었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헬리오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어쩔 수 없이 막아내는 정도여야만 한다.

공격은 프시케가 대공가의 기사들과 안전하게 만난 이후가 되어야만 했다.


‘제발!’

그때까지 공격 없이 헬리오를 버텨낼 수 있기를.

정체가 드러났으니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다행이었다.


“반역자를 즉각 처단하겠다!”

선언을 마친 황제가 곧바로 대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검을 치켜든 채로.

동시에, 방어를 위해 자세를 잡은 데몬이 온몸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스스스스.

거대한 반원 모양의 방어막이 그의 기사와 병사 부대 전체를 에워쌌다.

빛의 공격이 그가 만든 방어막 위로 눈부시게 터지며 쏟아져 내렸다.

***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후궁까지 가야 하는데!’

마가렛은 필사적이었다.

황궁에 들어가는 정문 외에는 성벽이 아주 높긴 하지만 무척 넓기도 하였기에 당연히 빈틈이 있었다. 밖에서는 안 보이지만 성벽 아래 수풀에 가려진 일명 개구멍 같은 곳이.


‘운이 좋으면 가능할지도 몰라.’

구멍 너머 궁 안에 경비병이 지나지 않는다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거기가 어디더라? 아! 찾았다!”

손으로 더듬어 가며 벽을 훑던 마가렛이 수풀 사이 어두운 틈을 발견했다.


“처음부터 이곳으로 올 걸 그랬네.”

괜히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가려 했나 보다. 마가렛은 치마를 걷어 올리고 몸을 숙여 겨우겨우 기어 어두운 구멍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엉금엉금 기다 보니 어느덧 황궁의 두꺼운 담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런데 빛이 쏟아지는 정원의 아름다운 수풀이 아니라, 어두운 복장의 사대가 가득 모여 있는 어두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떻게 된 일이지?”

황궁은 흡사 곧 일어날 전쟁의 준비를 이미 마친 모습이었다.

수백, 아니 수천의 군사가 도열해 있었다.

분명 많은 병사가 황제를 따라 국경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많은 병사는 또 어디서 나타났을까.


“황제 폐하께서 대공가를 공격하라 명하셨다!”

마가렛의 의아함이 누군가의 목소리에 허공으로 날아갔다. 듣는 순간 온 신경이 그 말의 진위에 집중된 탓이었다.

남자의 명이 떨어지자 수천의 검날과 창끝을 하늘로 향하게 한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고, 커다란 소리에 궁 전체가 울려 흔들렸다.


‘대공가를 공격하라 하셨다고??’

순간 마가렛은 너무 놀라서 몸을 숨기는 것조차 잊었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굳어 있던 그때.


“게 누구냐!”

거칠고 커다란 남자의 손이 마가렛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잡아챘다.

***

같은 시각, 황후궁 프시케의 방에서 기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폐, 폐하!”

컥컥. 콜록. 콜록!

차를 마신 황후가 차와 함께 연기를 토해내자 시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괜찮으십니까?”

몽롱했던 프시케의 눈에 점차 진한 초록 올리브 빛이 돌아왔다. 고개를 돌리니 그리운 백작부인 대신 평소 자신의 시중을 들던 이들 중 하나가 보였다.


“네가 내게 시에델의 차를 주었나 보구나…….”

“저는 그저…… 부인의 마지막 부탁을 따랐을 뿐입니다.”

황후가 깨어난 감격과 앞으로 다가올 두려움이 섞여 시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던 찰나.

밖에서 함성이 들렸다. 커다란 울림에 프시케는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누가 출정이라도 하는 것인가?”

“그, 그게……. 크레미언 대공이 국경의 반역자에게 죽임을 당하여 황제 폐하께서 직접 그곳으로 군을 이끌고 가셨습니다. 아마 후발대가 출정하기 위해 대열을 정비한 모양입니다.”

“뭐라고? 당장 막아야 한다.”

대공이 죽었다는 소식은 사실이 아닐 것이나, 지금 출정하는 군대는 막는 편이 나았다. 그 ‘잔인한 황제’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 너무도 뻔했으니까.

프시케는 서둘러 소리가 났던 황궁 정원의 입구를 향해 달렸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그녀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낯익은 얼굴에게 커다란 도끼를 드리운 두 명의 남자였다.

순식간에 커다래진 올리브색 눈이 단호하게 번쩍였다.


“그 손을 멈춰라!”

황후의 목소리에 마가렛의 몸을 꽉 잡은 두 문지기가 깜짝 놀라 몸을 낮추었다.


“황, 황후 폐하!”

“그 아이를 당장 놔주거라! 내가 긴히 시킬 일이 있어 궁으로 불렀건만, 대체 여기서 이 무슨 수모를 겪는 중이란 말이냐!”

역시나 가까이에서 확인하니 엘리제의 곁에 있던 마가렛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포박된 그녀의 몸이 무자비한 형벌을 앞두고 마구 떨리고 있었다. 그녀를 처형하려던 문지기 중 하나가 입을 열어 변명했다.


“죄……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하, 하오나 황제 폐하께서 황궁에 드는 이는 그 누구도 용서치 말고 효수하라 하시어…….”

“지금 황제께서 이 자리에 계시느냐?”

“!!”

문지기는 입을 다물고 두 무릎을 꿇었다.


“송구합니다!”

황제가 없는 지금, 궁 안의 최고 권력자이자 그들의 주인은 황후였다.


“내가 필요한 하녀 하나 부르는 것도 일일이 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지금 네가 날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소신들이 멍청하여……,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되었다. 너희에게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을 것이니 돌아가서 문을 지키고, 이후 들어오려는 이들은 내게 허락을 받고 들이라.”

문지기 둘이 고개를 조아리며 황급히 자리를 떠나자, 마가렛이 울먹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떻게 흑마법의 주술을 푼 것인지는 몰라도 황후가 기적처럼 나타나 목숨까지 구해주었다.


“황후 폐하! 무사하시어 정말 다행입니다! 그리고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궁에 오자마자 군대가 대공가를 공격하기 위해 출발한다는 말에 당황하여 잡히고 말…….”

“지금 무어라 했느냐?”

깜짝 놀란 프시케가 마가렛의 말을 잘랐다.


“황제 폐하의 부대를 지원하는 후발대가 아니라, 대공가를 공격하기 위해서라고?”

프시케는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헬리오의 주술에 취해 있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마가렛의 표정 역시 창백하고 위급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아마도…….”

그 순간 황궁의 시종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왔다.


“황후 폐하!! 대공가의 습격이옵니다! 궁을 나선 황군이 황궁 앞 길목에서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

창백해진 프시케가 외쳤다.


“아마도 황후 폐하를 기다리던 대공가의 기사단이 황군이 대공가를 향해 나선 것을 알고 공격한 모양입니다.”

곁에 있던 마가렛이 덧붙였다.

국경으로 향하는 데몬은 대공가의 기사단에게 황후를 무사히 모셔오라는 명을 내렸으나, 모든 임무보다 앞서는 것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공가에 있는 엘리제를 지킬 것.


“이런!”

상황 파악을 끝낸 프시케가 정신을 가다듬었다.

황제가 대공가를 적으로 명시하고 군대를 시켜 공격을 가하게 한 것이고, 황궁 근처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대공가의 기사단과 군대가 마주쳐 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큰 희생을 치르기 전에 어서 자신이 나서야 했다.


“황후 폐하께서 지금 나와주시어 정말 영광입니다.”

“그 이야기는 황군과 대공가 기사단 양쪽 모두를 멈춘 이후에 나누자꾸나.”

마가렛을 데리고 프시케가 서둘러 몸을 옮기며 시종에게 물었다.


“전투가 벌어진 곳이 어디인가?”

 

***

헬리오가 쏘아대는 공격에 데몬의 방어막 안도 진동이 일었다.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밖은 이미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황군의 대부분이 쓰러지고 피를 토해 처참한 모습이었다.

공포에 떠는 것은 오히려 황제를 따라온 황군이었으나, 헬리오는 걱정하지 않았다.

죽은 자들은 알 바가 아니었고, 숨이 붙어만 있다면 자신의 신성력으로 고쳐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황제이자 성자로도 받들어지겠지. 다시 한번.

터지는 빛을 연신 쏟아내며 로안의 얼굴이 만족스럽게 입을 벌려 웃었다.

방어막 아래 데몬이 두 손을 모아 그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부터 이리 약해지신 거지? 이 모습이라 공격하기 겁이 나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헬리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력을 다하지 않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상대를 도발하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라 헬리오에게는 그마저도 참으로 유쾌한 자극이 되었다.


‘즐겁다! 즐거워!’

공격을 세게 가해도 죽지 않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만족스러워 입이 절로 찢어졌다. 웃음이 끊이질 않고 결국 터져 나왔다.


“아하하하하! 타나가 왜 그렇게 소리를 높여 웃나 했더니만.”

이런 기분이었나?

대적할 만한 상대가 있다는 것이 이토록 흡족한 일일 줄이야.


“과도하게 흥분한 것 같군.”

갑자기 정색한 헬리오가 공격을 멈추고 땅에 발을 디뎠다.

하아. 하아.

단시간 내에 쏟아부은 공격 덕분에 황제의 입에서 가쁜 숨소리가 이어졌다.

데몬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표정인데, 설마 바라는 것이 있는 건가?”

예를 들면 황궁으로부터의 기별이라든가.


“어쩌나? 기다리는 소식 대신 비보가 곧 도착할 것인데 말이야.”

대공가가 습격을 받았다든지, 황군이 대공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든지.


“도와달라든지 하는.”

크크크크큭.

저열한 웃음소리가 아랫배부터 끓어올라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하하.”

시원하게 웃고 나니 헬리오의 몸에서 열기가 가라앉고 폭풍이 한차례 지나간 듯 평온해졌다.


“하아.”

긴 숨을 뱉어낸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단호히 말했다.


“잘 기억해 둬, 데몬. 지금 신이 너희 편이 아님을.”

신인 나를 적으로 돌린 너희가 치르게 될 대가를. 네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과연 신의 가호 없는 네가 지킬 수 있는 것이 무얼까?”

미로니카? 아니면 황후?


“전부 다 지켜봤자 네 것인 것이 하나도 없지 않나? 어차피 황국도 내 것, 황후도 내 것인데.”

싸우는 이유를 모르겠군.


“너는 곧 대공가도 잃을 것이 분명한데.”

씨익. 소리 없이 웃은 입꼬리가 귀를 향해 찢어져 솟는 순간.

저 멀리서 붉은 깃발이 펄럭였다.

황궁에서 온 긴급 사항을 알리기 위해 황군 중 누군가가 급히 황제를 향해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

말없이 구겨진 황제의 표정을 보고 조용히 데몬이 입을 열었다.


“신의 가호 아래의 황궁에 위급한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로군.”

서늘하고 차가운 푸른 눈이 붉은 눈을 무시무시하게 쏘아 보았다.


 

***



“가시지요, 엘리제 님.”

고개를 끄덕인 엘리제가 다니엘과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그녀의 품에는 토리와 로떼가, 다니엘의 품에는 돌돌 말린 옛 두루마리 서신들이 있었다.

무사히 프시케를 만났다는 마가렛의 연락을 받았으니 그들이 나설 차례였다.

황후가 제정신으로 돌아왔으니 이제 대공가에서 오래도록 준비해 온 것을 꺼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멀리 황궁 입구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는 낯익은 얼굴들이 보이자, 엘리제가 마차에서 내려 그들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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