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이능자와 반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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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이능자와 반역자
2022.12.08.
“들어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네 목을 문에 걸긴 싫으니.”
문을 지키는 병사의 말에 마가렛은 기함하였다. 경비가 삼엄해졌을 것은 이미 각오하였으나 들어가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줄이야.
“황제께서 명을 어기고 궁 안에 들어오려는 자는 목을 베어 효수하라 하셨단 말이다!”
“말, 말도 안 됩니다.”
“한 명이라도 들어갔을 때는 우리의 목이 떨어져.”
“지금 황제 폐하께서 전에 없이 단호하신 것은 소문으로 들었을 테지? 자비를 기대하지 말게.”
다른 경비병 역시 음산하게 외쳤다.
궁의 모두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황제가 얼마나 쉬이 사람을 죽이는지를.
놀라 벌어진 입을 가린 마가렛의 손이 떨렸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곳이 미로니카의 황궁이 맞나요?”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명령을!
“우리도 황제 폐하의 명이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지금은 반란이 일어난 시점이다! 황궁에 들어오려는 모든 이를 수상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한 시기야.”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단호한 경비병의 말에 마가렛은 우선 발길을 돌리고 다른 방도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
“백작부인께서 그리되셨는데 황후 폐하까지 다시 말씀이 적어지시니, 너무 무섭습니다…….”
“쉿! 제발 입조심하게나. 그러다 경을 치네!”
임시 시녀장을 맡은 후작부인이 젊은 시녀 하나를 혼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황제의 손이 백작부인의 목을 조르고 으드득 소리를 내며 뼈를 부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 사람의 목숨이 너무나도 쉽게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볕과 바람에 바짝 말라 손에 쥐면 아스라이 바스러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어찌 평생 곁에 둔 사람의 생명을 그리……!’
백작부인의 죽음은 황후궁 모두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에 슬픔을 넘어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황제가 황후를 대하는 모습은 더욱 공포스러웠다.
직접 본 이들 대부분이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황제의 눈은 아름다운 파란 색이 아니었다.
무섭도록 차갑고 소름 끼치는 창백한 푸른색이었다.
공포를 느낀 황후궁의 이들은 하나둘씩 두 손을 모으고 신께 기도하였다.
매달리듯 신을 부르자 차츰 두려운 마음이 누그러들었고,
어느 순간 곳곳에서 시녀들이 기도를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황후 폐하께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해주세요.”
“신께서 황국을 위험과 공포로부터 부디 구해 주소서.”
후작부인에게 혼이 났던 젊은 시녀 역시 중얼대었다.
“아! 이럴 때 성하라도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
하녀들과 시녀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할 때 후작부인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백작부인을 대신하여 황후가 성수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성수를 마신 황후가 어찌 변하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천천히 물에 잠기듯, 분명 황후의 얼굴과 몸이 서서히 차갑게 얼음처럼 변해가던 모습을.
그리고 순식간에 황후의 창백한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마치 밀랍 인형과 같이.
그 순간 후작부인의 마음도 잠식되어 그녀는 지금 신을 부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신께서 미로니카를 버린 것이 분명하구나!’
황제가 황후에게 먹인 물이 성수가 아니었거나.
신께서 미로니카와 함께 계신다면 성하께서 주신 성수가 황후를 인형으로 만들어버릴 리는 없을 테니까.
소리 없이 숨을 집어삼키는 후작부인의 뒤로, 시녀 하나가 포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집어삼킨 후작부인의 숨처럼, 그녀의 손 역시 잘게 떨리고 있었다.
***
바람에 붉은 망토가 휘날렸다.
그 위로 수 놓인 빛나는 금사는 그 망토의 주인이 미로니카의 황제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한 마리의 사자가 사냥 후 느긋이 평원을 거닐듯, 그는 고요하게 전장을 걷고 있었다.
이곳마저 편안한 자신의 영역인 듯이.
“폐하! 이곳은 위험……! 윽!”
그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기사들이 활이나 검을 맞아 앞다투어 쓰러져갔다.
기습이 시작될 당시 떨어진 포탄들로 여기저기 타는 냄새와 연기가 자욱했다.
그러나 쓰러진 이들은 여전히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를 깨달은 황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쯧.”
번거롭게.
하나같이 전투력을 잃을 만큼 다치게 하고 목숨은 붙여놓다니.
“같잖은 동정심이군, 데몬.”
답지 않게 죄 없는 이의 목숨은 거두지 않겠다는 건가?
붉은 눈의 전장귀라 불리던 자가 언제부터 그렇게 고귀하셨다고?
우스워 피식 웃음이 났다.
결국 찰나를 살고 가는 것들의 발버둥일 뿐.
뒤집어진 벌레들이 바둥거려 봤자 기다리는 것은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이지 구원이 아니다.
스읍.
“후우.”
그가 천천히 들이마신 포화를 뱉어내자 하얀 얼굴에 문득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재미있군.”
전력을 다해 싸워본 지가 언제였던가.
너무 오래되어 기억조차 바랄 지경이었는데, 얼마만의 흥분이 솟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난번 타나를 위해 힘을 보내줄 때도 전력을 다하진 않았다.
그저 연결된 존재이기에 타나가 죽음을 맞이할 때 그 충격이 반사되어 내상을 입었을 뿐.
유일하게 흑마법으로 공유되어 있던 그녀도 그에게는 그저 잠깐 곁을 스쳐 간 존재였다.
하나, 프시케는 다를 것이었다.
지난 세월이 입증하듯, 어쩌면 앞으로의 긴 시간을 함께 공유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였다.
“이미 미로니카의 황제의 몸으로 살기로 했으니, 이능이 있는 황제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니, 외려 기사와 황국민들은 반기지 않을까?
전장에서 각성하여 돌아온 황제!
열광할 이들이 득실할 것이었다.
“판을 깔아준 것이 고마울 지경이군. 나 역시 즐겨주마.”
콰직.
“크윽!”
발에 걸린 누군가의 일부를 부수며 그가 자리를 박찼다.
멀리 막강한 힘의 차이로 금색 병사와 기사들을 쓰러뜨리는 이가 보였다.
“데몬!”
황제가 검은 옷을 입은 그자를 향해 죽은 대공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들었다.
쾅!!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의 검이 번쩍 빛을 내며 부딪혔다.
황제에게 괴력이 생겼다는 소문을 같은 공간에 있는 이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저분께서 황제시라고?”
멀리서 본 이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크게 떠야 했다.
복면을 쓴 채 정체를 숨긴 장신의 남자를 향해, 분명 붉은색과 금색으로 수놓아진 망토를 두른 황제가 무서운 속도로 공격을 쏟아냈다.
본래 검술에 능했던 황제가 아니다. 그러나 눈앞의 황제는 누가 보아도 강했다.
“폐, 폐하께서!”
가까이에서 보면 더욱 믿어지지 않는 전투력이었다.
흡사 마법이라도 쓰는 것처럼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공간을 가르는 소리가 일었다.
황제와 검을 맞대던 이가 돌연 몸을 뒤로 날리고 멈추었다.
검은 망토의 그가 후작가의 깃발 아래 모인 병사들을 향해 수신호를 보내자, 역시 검은 망토에 검은 복면을 한 자들이 모두 검은 물결처럼 빠르게 한참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전장에, 오직 황제와 그에 맞선 검은 옷의 남자만이 섰다.
“불필요한 희생은 줄이겠다는 건가?”
황제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검은 복면의 남자를 향해 다시 한번 죽은 이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내가 해봤는데 다 재미없었어, 데몬.”
말을 마친 황제가 순식간에 손에서 눈부신 빛을 쏟아내었다.
“!”
그 빛을 본 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제께서 마법을!”
그러나 본 바를 다 말로 마치지 못하고 피를 쏟거나 신음을 뱉었다.
황제가 쏟아낸 빛이 무차별적으로 날아와 그들을 쓰러뜨렸기 때문이었다.
무자비하게도, 그가 쏜 빛이 형체를 가진 모든 것들을 찢고 부수고 통과하며 무너뜨렸다.
“끄아악!”
귀를 찢을 듯 고통스러운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황제의 기사, 검은 옷의 병사 가릴 것 없이 순식간에 비명과 외마디가 휘몰아치고, 피와 연기가 공간을 뒤덮었다.
“내가 하면 재미없지만, 남이 하는 꼴은 또 보기 싫어서 말이야.”
‘로안의 얼굴’이 다시 한번 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검은 복면의 남자는 그 얼굴 뒤 숨겨진 헬리오를 보았다.
선하고 무해하여 아무런 욕심도 없는 듯 평온했던 그 얼굴이.
왜 그토록 소름 끼치게 느껴지는가 의아했었는데.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아 절로 공포를 가져오던 괴물의 얼굴에 이제 웃음이 가득 들어찼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남자가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전장에 있는 이들에게 진정한 지옥이 열렸다.
***
황후의 방 한쪽 자신의 자리에 선 시녀는 백작부인이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남긴 말을 떠올렸다.
심신에 좋다는 차를 황후에게 올린 이유로 백작부인이 죽임을 당한 것이 불과 하루 전이었다.
혹 부인이 자신에게 전해준 차가, 황후에게 올렸던 그 차는 아닐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마른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손이 떨렸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황제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무자비한 황제 아래에 있으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 사실이 오히려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황제는 후작부인에게 황후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을 통제하라 명했다.
그러니 황후에게 차를 올리려면 다른 이는 모르게 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소임을 기억했다. 정해진 시간에 황후에게 차를 올리는 일.
만일, 황후가 먼저 차를 마시고 싶다고 한다면 어떨까?
“황……황후 폐하, 혹 차를 한 잔 드릴까요?”
후작부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방 안에 대기 중이던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
믿을 수 없게도 고상하게 틀어 올린 황후의 붉은색 머리가 살짝 끄덕여졌다.
말없이 꼿꼿한 자세로 우아하게 앉아 있는 황후를 향해 시녀가 조용히 다가갔다.
“그러시면 드시던…… 차로 올리겠습니다.”
여전히 황후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어쩌면……!’
떨리는 손으로 시녀는 차를 따랐다.
하얀 찻잔에 뜨거운 물이 담기자 미세하게 바다와 같이 파란 빛을 띠는 착각이 들었다.
찻잔을 전한 시녀는 이제 눈까지 떨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천천히 황후가 찻잔을 들어 올리는 것에 귀를 기울일 뿐 다른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
‘이러지 않을까 예상은 하였지만…….’
복면으로 가린 데몬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일부러 주변에 숲이 없고, 민가가 없는 곳을 골랐다.
국경으로 향하는 곳 중 가장 피해가 적을 곳을.
전투에 임하게 되는 황제의 군대든, 대공가의 군대든, 후작가의 병사든 무사하기 어려울 것은 예상했다.
그렇지만 설마 이토록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헬리오가 공격을 퍼부어 댈 줄이야.
이건 그냥 우월한 이능을 가진 이의 일방적인 학살이 아닌가.
검술에 아무리 능한 인간이어도, 마력이나 흑마법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헬리오는 자신이 파괴의 신이라도 되는 양 눈에 띄는 모든 것을 없애고 죽일 셈인 모양이었다.
‘확실히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군.’
친우가 신처럼 믿고 받드는 성하로 헬리오가 손색이 없을 때도, 데몬은 그가 역할이 남과는 좀 다른 한 명일 뿐이라 생각했었다.
비율이 사람마다 다를지라도 감정과 이성이 존재하는 인간.
그러나 지금 보니,
눈앞의 괴물은 다니엘과 엘리제가 찾아낸 바와 같이 정말 인간이 아닌 존재인 모양이었다.
생명을 향한 감정이나, 감성 따위는 조금도 남지 않고 학살조차 지겨운 듯한 눈빛.
그런 존재의 마지막을 위한 물건이 세상에 있다니,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망토 아래로 감추어둔 검이 그림자처럼 그에게 붙어 있었다.
눈앞의 괴물을 없앨 수 있다는 세상 유일의 검이.
그 순간 황제가 쏜 빛이 그의 복면을 스쳤다.
“!”
잘려 나간 복면 조각이 날아가자, 붉은 두 눈과 잘생긴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얀 살결 위 얇은 실금처럼 붉은 피가 번졌다.
멀리서도 잘생긴 얼굴과 마력을 담은 붉은 두 눈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역시 너였군, 데몬.”
황제가 입 끝을 비스듬히 틀어 올리며 웃었다.
“이 반역자.”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을 향해 손을 올렸다.
살아남은 황제의 군사들이 신음을 토해내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정말 대공 각하께서 살아계셨잖아?!”
반가움을 밀어내고 쏟아내는 말에 절망적인 어조가 섞였다.
황국을 지키던 대공을 적으로 돌려야 한다니.
“지금 이 순간부터, 크레미언 대공과 그의 세력을 반역의 무리로 간주한다.”
높낮이가 없는 차가운 어조로 황제가 이어서 외쳤다.
“그 주모자 데몬 크레미언을 내 손으로 직접, 즉각 처단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