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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한 치 앞도 모르다 (114/126)


114. 한 치 앞도 모르다
2022.12.05.



 
황제의 비정함이 황궁에 퍼짐과 동시에, 엘리제의 일행은 꼭 필요한 아군을 잃었다.


“백작부인이 그리되셨으니 이제 황후 폐하의 남은 주술을 풀고 황궁에서 꺼내올 사람이 없는 거 아닌가요?”

엘리제는 절망스러웠다. 백작부인을 잘 아는 것은 아니나 가여웠고, 가까운 이를 잃은 프시케가 받았을 충격도 걱정스러웠다.

창백해진 엘리제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이 경우를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닙니다만…….”

엘리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럼 생각해 두신 바가 있다는 말씀이세요?”

“대공 각하께서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대비해 놓으셨습니다.”

“!”

엘리제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행이다! 희망이 있어.’

데몬의 대비 덕분에 헬리오와의 승부가 해 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하지만 위험한 일이기에 자신에게 미리 이야기해주지 않은 것이겠지.


“준비해 놓으셨다는 걸 제가 들어볼 수 있을까요?”

데몬이라면 절대 말해주지 않았을 일. 그러나 눈앞의 다니엘이라면 말해줄 것 같았다. 이 싸움의 승리를 데몬이 쥐길 그가 누구보다 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잠시 고민한 다니엘이 엘리제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

마가렛은 황궁으로 출발하는 마차에 올랐다.

황제가 황후 주변의 이들을 모두 흑마법을 이용하여 조종하거나 목숨을 앗아갈 경우를 대비해 데몬이 생각해 놓은 수가 ‘마가렛’이었다.

그녀는 이미 황궁에서 황후궁 소속이었다가 엘리제의 하녀가 된 경우였으므로 다시 황후궁 배속이 가능했다. 마가렛은 기꺼이 황궁으로 돌아가 세작의 역할을 하고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었다.

더구나 정령수를 사용하여 황후를 구하는 일에 누구보다 그녀가 적임이었다.


“황제가 돌아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니 반드시 그전에 황후를 모시고 함께 탈출해야 한다.”

떠나는 여동생을 향해 하임이 당부했다. 대답 대신 그녀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가 만들어준 정령수를 따로 들고 마가렛은 출발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연락해야 해!”

마차가 출발하기 직전 엘리제가 마가렛에게 했던 당부가 귓가를 맴돌았다.

엘리제가 알게 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궁에 가지 말라고 말릴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르게 자신을 담담히 보내주었다.

마가렛은 어쩐지 그 모습이 더 마음에 걸렸다.


‘설마 다른 생각이 있으신 건 아니겠지?’

워낙 생각을 서슴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엘리제인 데다, 지난번 타나를 상대할 때도 자신의 안전은 뒷전이었기에 마가렛은 은근히 엘리제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다니엘 님이 옆에 계시니 괜찮겠지.”

단호하고 철저한 다니엘이니 엘리제를 곁에서 잘 지킬 거라 믿음이 갔다.

마차는 이미 황궁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걱정을 내려놓고 다시 자신이 행할 중대한 임무를 생각했다.

같은 시각.

황제는 크레미언 대공이 전사한 지역을 향해 진격 중이었다.

하얀 말에 오른 황제는 금색 망토를 나부끼며 붉은 황제복 위에 금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수천의 황금빛 군대가 그의 뒤를 따랐다.

황제가 직접 전장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반란을 일으켰던 귀족은 금방 투항할 가능성이 높았다. 명분 없이 일으킨 무력 행동은 그저 폭동에 불과하니까.

그 폭동을 일으킨 가문이 무척 한미하여 이름도 기억하기 힘든 것이었다면 차라리 무시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폭동을 일으켰다는 베이어스 후작 가문은 대공가와 척을 지고 대립을 하고 있었어도 황궁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황후 프시케를 배출한 로즈벨 백작가와 매우 가까운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베이어스가 로즈벨 백작가와 함께 일을 도모한 것은 아니겠습니까?”

함께 출정한 기사단장이 황제의 뒤를 바짝 쫓아오며 물었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요즘 황후를 향한 황제의 태도가 어떤 소문으로 황궁에 돌고 있는지 헬리오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니까.

로즈벨 백작가는 황후의 가문이니 불만을 직접 표출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와 가까운 가문에서 대신 황제에게 항의하고 불안을 조성하는 것일 수 있었다.

여전히 앞을 향해 달리며 황제가 대답했다.


“그랬다면 황후가 소란을 잠재우는 현명한 모습을 보여서 황제의 이름을 낮추는 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지.”

황제가 로안이었다면 그들의 계획대로 성공할 수도 있겠으나, 그는 로안이 아니었다.

황후의 가문 따위가 어찌 되든, 그와 가까운 이들이 어찌 되든 알 바가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모두 섬멸할 것이다.”

단 한마디로 이미 정한 결정을 전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거라는 황제의 말에 기사단장은 긴장을 집어삼켰다.

그는 수없이 많은 전장에서 그만큼 많은 종류의 인간들과 부딪히고 죽음을 보아오며 본능적으로 상대의 강함과 잔인함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눈앞의 황제가 어떤 계기로 마음을 먹은 것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겪었던 모습 중에 가장 무자비하고, 몰인정한 모습임이 분명했다. 기사단장의 몸이 떨려왔다.


‘이번 황제의 출정이 많은 이의 희생을 불러오겠구나.’

“예, 폐하.”

무장으로서,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는 기사단장으로서 황제의 변화는 나쁘지 않은 현상이었다.

황권이 흔들릴 때는 그 대상이 황후의 가문이라 할지라도 본때를 보여 힘의 우위를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도 생각했으니까.

그런 것이 그가 생각하는 전쟁이었다.

오직 승자와 패자만이 있으며, 힘의 우열로 생사가 결정되는 것.

그는 처음 보는 황제의 모습에 희열을 느꼈다. 그동안 타고난 성품이 전사나 전장의 지도자에는 맞지 않다고 여겼었기에 자신의 지난 판단이 깨지게 되는 게 썩 나쁘지 않았다.

되레 황제의 명을 따를 생각에 그의 피가 뜨겁게 끓는 기분이었다.

밤낮없이 달려 어느덧 국경 근처였다. 그동안 보아온 바와는 다르게 황제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뒤따라오는 자들이 처지기 시작할 것을 우려하여 기사단장은 황제에게 쉬어갈 것을 권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사양뿐이었다.


“그대들은 쉬고 오라. 나는 대공의 떨어진 목을 보기 전까지는 쉴 수가 없어서 말이야.”

황제는 계속해서 말을 달렸다.

***

백작부인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데몬에게도 전해졌다.

다니엘은 준비했던 대로 마가렛을 움직였으며, 자신이 맡은 일도 착실히 진행 중이라는 소식도 포함하여 전서구를 보내왔다.

데몬이 가장 걱정할 엘리제에 대한 내용 한 줄도 포함하여.


“괜찮겠는가?”

서신을 함께 읽은 미카일이 데몬에게 물었다. 그들은 몸을 숨기고 황제의 군대가 그곳까지 당도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황군에게 먼저 공격을 가해도 정확히 누구인지 알기 어렵게 하기 위해서였다. 보통은 반란을 일으킨 가문에서 선공하리라 판단할 것이었으니. 그러나 황제의 몸 안에 있는 자, 헬리오는 영악한 이였다. 방심할 수 없었다.


“엘리제가 안전하니 아직은.”

대답을 들은 미카일의 입에서 허무함에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났다.


“이토록 바보가 될 줄은 몰랐네.”

“바보라고? 내 어디가?”

의아해하는 모습이 우스워 더 웃음이 흘렀다.

미카일은 사랑에 빠진 데몬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엘리제 덕분에 그가 얼마나 행복한지가 누구보다 잘 느껴졌다. 다만 그만큼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아닌지 여전히 걱정이었다.


“그녀밖에 모르는 바보 아닌가.”

그건 인정.

데몬 역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흘렀으니까.


“그럴지도. 게다가 겁쟁이고.”

“자네가?”

천하의 데몬이 이런 소리를 뱉는 날도 오는구나 싶어 정직한 갈색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솔직하게 말해서 예전에 나는 두려운 것이 없었어. 전쟁도, 죽음도. 내가 잃을 것은 그저 아버지가 저주하던 크레미언 가와 내 숨, 오직 그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두렵네.”

붉은 눈이 진지하게 변하고 무게 있는 음색이 이어지자, 미카일도 함께 바짝 몸에 힘이 들어갔다.

오래된 친우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일까?


“그녀를 잃을까 그것이 두려운지 알았는데, 지금 보니 나는 그녀가 받을 모든 상처와 슬픔까지도 두려워하고 있어.”

“그렇다면 겁쟁이가 맞군.”

그녀를 슬프게 할 일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헬리오와의 전투를 가능한 황궁과 대공가에서 먼 곳에서 하기 위해 계책을 짜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자네가 겁쟁이가 되어 다행이야. 엘리제는 대공가의 누가 다치든 슬퍼할 것이니 자네는 그 모두를 지켜내려 할 것 아닌가.”

데몬은 미카일의 판단을 순순히 수긍했다.


“맞아. 그리할 거야.”

그리고 두 사람이 있는 어두운 천막 안으로 정찰을 나간 자이드와 대공가의 기사가 재빠르게 들어왔다.


“곧 입니다!”

검은 옷으로 변복한 대공가의 기사가 외치자 같이 들어온 자이드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를 받은 데몬이 검은 두건과 망토를 뒤집어썼다.


“그럼 왕태자님, 부탁합니다.”

데몬과 자이드가 함께 천막을 나섰다.

***

쾅쾅! 사방에서 폭발과 비명이 터졌다.


“기습이다!”

“뭐라고? 아직 국경까지는 길이 남았잖아!”

황제의 군대는 우왕좌왕했다. 이동 중 예측하지 못한 공격을 받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들이 당황한 진짜 이유는 상대가 예상외로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강한 군대가 베이어스라고?”

기사단장 역시 당황하여 외쳤다. 베이어스 후작가는 국경을 지키는 변방의 가문이다.

황궁에서 알아주는 주요 가문이 아닐 뿐이지, 국경을 지키는 가문이 대체로 싸움에 강한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곧 외적의 침입을 막을 힘이니까.

그러나 미로니카 황국의 경우는 최전선에 있는 변방의 가문보다, 대공가의 병력이 훨씬 강하고 훨씬 컸다. 그런데 지금 황군을 공격하고 있는 이들은 거의 대공가에 비할 정도 아닌가.

앞서가던 기사단장은 서둘러 말 머리를 황제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


“예상외로 반란군이 너무 강합니다. 폐하, 명을 내려주십시오.”

이동 중 예상치 못한 선공을 받았고, 이미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황제는 홀로 태연했다.


“폭동을 일으킨 가문이 베이어스가 맞는가?”

“깃발로 보면 그러합니다.”

헬리오가 무섭도록 차가운 파란 눈으로 웃었다.


“그렇다면 군대를 이끄는 자도 후작인가?”

“그것은 아직, 직접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보나 마나 후작이 아닐 것이다. 로안의 몸에 남은 기억을 더듬어 보면 베이어스 그 중년의 남자는 애초에 황제에게 반기를 들 만큼 그리 용기 있는 자가 아니니까.


“베이어스가 그동안 변방을 맡아 버틴 것이 용했지.”

어차피 국경을 맡아도 대공가에서 나라의 위기 때마다 빛의 속도로 달려와 위험을 해결했기 때문에 그저 다른 가문보다 조금 더 우직하고 병력이 조금 더 준비된 후작가를 둔 것뿐이었다.


‘무능한 황제의 선택이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고.’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어차피 이번 전투에 모두 스러질 미물들에 불과하니까.


“직접 선두로 나서겠다.”

“예?”

친히 황제가 전장에 바로 임하겠다는 말에 기사단장은 깜짝 놀랐다. 다음에 이어진 말은 더욱 놀라웠다.


“방해되니 날 지킬 병력은 필요 없다.”

놀란 기사단장을 남겨두고 말을 마친 곧바로 황제는 말에서 내려 포화 속으로 걸어 나갔다.

무수히 많은 병사들이 눈앞에 쓰러져 있었다. 헬리오는 익숙하다는 듯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쓰러진 주검을 밟으며 그는 가벼운 걸음으로 나아갔다.

저 멀리 검은 망토를 나부끼며 사람들을 쓰러트리고 있는 남자를 향해.

***

마가렛은 황궁의 입구에서 저지당했다.


“황제께서 아무도 궁에 들이지 말라 하셨다. 황제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완전히 닫힌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돌아가라.”

식량과 식수를 한꺼번에 들이고 황제는 궁을 떠나며 황궁을 밖에서부터 폐쇄했다.


“어쩌지?”

마가렛의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쯤이면 전투가 시작되었을 것이었다.

황제가 출발한 지 반나절이 지났고, 데몬은 중간에서 황군을 기습하기로 계획했었으니까.


‘내가 반드시 황궁으로 들어가서 황후 폐하께 정령수를 드려야 하는데!’

다급한 마음에 긴장으로 마가렛의 목이 조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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