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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청천벽력 (113/126)


113. 청천벽력
2022.12.01.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 아닌가!”

황궁에 비상 회의가 열렸다. 소식을 듣고 모인 귀족들의 모습은 혼란 그 자체였다.

그 누구도 아닌 크레미언 데몬이 전사하다니,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진짜 로안이 들었다면 혹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라도 했을까?

그러나 헬리오는 누구보다도 의연한 모습이었다.

충격적인 비보를 전한 심부름꾼은 여전히 거친 숨을 몰아쉬며 떨고 있었다.

몸이 떨릴 만큼 모두가 경악할 만한 믿지 못할 소식이긴 했다.

곧, 증거로 일부만 남은 시신이 황제의 눈앞에 내밀어졌다. 누군가의 것으로 보이는 손이었다.

머리도 아니고, 손이라?

피식.

황제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크레미언 대공이 그렇게 쉽게 당했을 리가.”

놀랍지도 않았다. 말도 안 된다는 말투가 황제의 입에서 절로 나왔다.

그리고 그 철두철미한 자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부하를 곁에 두었다고?


“무엄하다! 폐하, 이는 분명 폐하를 모독하고 황국을 어지럽히려는 술수임이 틀림없습니다.”

“맞습니다. 수습해온 유해가 대공의 것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떤 귀족이 외쳤다. 헬리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거짓임이 분명하다. 파발꾼은 사실로 믿고 질겁하여 달려온 것이겠지만.

하지만 지금 보고가 거짓인지 사실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이 상황을 황제가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하는 거니까. 귀족들의 기대하는 눈빛이 증명하는 바였다.


‘누구의 잔꾀이지?’

귀족들이 뱉은 말은 황제를 자극하려는 말일 수도 있었으나 헬리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 상황은 누가 되었든 황제를 얕잡아본 것이 분명했으니.


“짐이 직접 가겠다.”

바라던 답이 나오자 귀족들이 넙죽 인사를 했다.

대공이 죽었다면 그 시신을 확인할 것이고, 소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황제의 위상을 떨칠 수도 있을 것이다.

크레미언 대공이나 다른 이의 계략이라면 더욱 좋았다. 황제를 능멸한 죄로 처형할 수 있으니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로 없애버리는 것도 나쁠 것 없지.’

어차피 놔두면 거슬리는 것은 분명하니까.

이 순간 헬리오가 고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프시케에게 주술을 먹이고 갈까, 말까?’

흥미로운 실험이 될 것이었다.


‘황후와 그녀 곁에 있는 이들에게도 주술을 먹여놓고 가면 걱정할 것이 없어 편하긴 하겠지.’

물론 주술을 먹일 필요도 없이 황후 주변을 다 죽여버리면 가장 쉽지만, 쉬운 건 재미가 없다. 지금 그에게 재미는 그 존재를 남겨둘지 말지, 존폐를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누가 황후궁 쥐새끼인지 알아볼 기회군.’

입맛을 다신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당장 출정 준비를 해라.”

 

***

황후궁에 황제가 변방으로 직접 출정할 것이라는 소식이 순식간에 전달되었다.

방 안에 갇혀 있던 프시케에게도 시녀장인 백작부인이 그 사실을 알렸다.


“황제 폐하께서 가시기 전에 황후 폐하를 뵙고 가실 듯합니다.”

“그렇겠지. 아마도 나는 이전처럼 이지를 잃게 될지도 모르겠군. 그럴 때면 너무 무리하여 구하려 하지 말게나.”

프시케가 백작부인을 타일렀다.

헬리오가 궁을 떠난다면 분명 자신을 예전처럼 주술의 인형으로 만들고 가겠지 싶었다.

황궁에 있는 모두가 황제의 손아귀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입장인데, 행여나 자신을 구하려다 백작부인과 그 가족들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웠다.


“나 하나는 괜찮으나 부인마저 잘못된다면 대공가에서 우리를 돕기 더 어려워질 것이네.”

“예, 황후 폐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정신이 지배당하는 끔찍한 일도 괜찮다 말하는 황후의 말에 더욱 눈시울이 뜨거워진 백작부인이 조용히 황후 방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분명 자신과 백작가를 걱정하여 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에서 혼자가 되자, 방문을 걸어 잠근 그녀는 고민할 것도 없이 지난번 자이드 왕태자가 황후에게 올린 선물상자를 꺼냈다.

아들에게 받은 시에델의 약차는 이미 이리저리 사용하여 찻잎은 남았으나 푸른 물이 남아 있질 않았다. 왕태자가 주고 간 선물이 남은 희망이었다.


‘분명 그 물에 차를 우려내야 한다고 했어.’

백작부인의 감으로, 찻잎이 아니라 그 물에 약효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직접 확인하기 전이니 우선 지난번 효과를 본 대로 시행하기로 했다.

왕태자가 선물로 전해주고 간 물과 찻잎은 다행히 조금 더 양이 많았다. 찻잎과 물의 반을 포트에 넣은 후 잠시 뒤에 들고 방을 나왔다.


“자네.”

그녀가 차분한 음성으로 황후의 차 시중을 드는 이를 불렀다.


“예, 부인.”

“혹여나 내가 자리를 비우게 되거든, 황후 폐하께 이 차를 나 대신 챙겨드리게.”

은으로 된 포트를 전하며 부인이 당부했다.


“기분 전환과 기억을 돌아오게 하는 것에 탁월한 차이니 나중에 필요할 때 사용하면 되네.”

“예, 알겠습니다.”

백작부인은 생각했다.

황제가 어쩌면, 출정 가는 길에 황후뿐만 아니라 그 곁을 지키는 자신까지도 조종하고 싶을지 모른다고.

***



“다녀오리다. 백작부인은 내가 없는 사이 황후를 잘 보필하여 주시오.”

황제가 간단한 안부만을 남긴 채 황후의 방을 떠났다.

백작부인에게 황후의 건강을 잘 챙기고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직 금하라 이른 것 외에 다른 명이 없었다.


‘이대로 그냥 간다고?’

헬리오가 분명 자신에게 다시 주술을 걸고 갈 것이라 생각했던 프시케는 의아하다 못하여 당황스러웠다.


“신께서 도우시나 봅니다, 황후 폐하. 이제 황제께서 출궁하시는 것만 확인되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백작부인이 밝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궁을 벗어날 수가 없네.”

이미 데몬과 미카일이 데리러 왔었지만 주술이 그녀를 죄어왔다. 곧 죽이려는 듯이. 몸을 안쪽부터 찢어 피를 토하게 하였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백작부인이 청색 도자기로 된 포트를 조심히 들고 왔다.


“지난번 드시고 연기를 토하셨던 차입니다.”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고 황제가 들어왔다.


“폐, 폐하!”

놀란 백작부인이 서둘러 포트를 들고 몸을 뒤로 물렸다.


“무슨 일로 다시 발걸음 하셨습니까.”

프시케가 태연하게 물었다. 하지만 심장은 터질 듯이 쿵쿵 소리 내며 뛰고 있었다.

혹시 밖에서 다 들은 것인가?

이러려고 아무 말 없이 떠나는 척한 거야?


“짐이 황후를 위해 준비한 것을 깜박하였지 뭐요. 여봐라! 가져와라.”

황제가 부르자, 방 앞에서 시종장이 들어왔다.

***



“마시시오.”

황제가 찻잔을 내밀었다.


“짐이 특별히 성하께 남겨놓고 가시라 부탁한 성수요. 국경의 소란을 빠르게 잠재우고 돌아오리다.”

로안의 얼굴로 짓는 서늘한 미소가 프시케의 심장에 날카로운 고통을 새겼다.

그녀는 초록색 눈을 굴려 그가 권하는 찻잔 안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물이 잔 안에서 맑게 찰랑이며 반짝였다.

겉으로는 완벽한 성수였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백차가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프시케는 알고 있었다. 황제 부부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백작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저 사람 같군.’

겉으로는 로안의 모습이나, 속엔 끔찍하고 잔인한 헬리오가 들어앉아 있는 눈앞의 괴물.

프시케는 바르고 우아한 자세로 앉아 두 손을 꼭 쥐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내가 권하는 것이라 싫은 거요?”

“아닙니다. 이제 저는 성수가 필요치 않을 만큼 회복되었다 느끼어…….”

황후의 답을 들은 황제가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아, 그래? 그럼, 대신 백작부인이 마시면 되겠군.”

황제는 잔을 바로 옆에 선 백작부인에게 내밀었다.

그 순간, 프시케가 황제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려 프시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나요, 나의 황후.”

능글맞은 말에 치가 떨리고 속에서 불길이 일었으나 프시케는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다가갔다.


“주십시오. 제가 마시겠습니다.”

“아니, 이제 됐어.”

네까짓 것들 같잖다는 표정으로 황제가 손을 휘저었다.

그의 눈빛을 읽은 황후의 두 손이 달달 떨렸다.


“쥐를 이제 찾았으니까.”

순식간에 황제의 손이 백작부인의 목을 잡아챘다.


“컥!”

“폐하!”

하얗게 질린 프시케가 황제의 팔에 매달렸다.


“제발 고정하십시오.”

“고정하라고? 짐은 화나지 않았소, 황후.”

프시케의 초록 눈이 마구 떨렸다. 백작부인을 죽일 힘도, 명분도 지금 그에게는 충분하다.


“뭘 먹고 풀렸나 했더니, 시에델의 힘이었나?”

정령의 힘. 데몬도 미카일도 손을 써놨는데 어떻게 황후의 주술이 풀렸나 했더니 생각지도 못한 답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말이 딱 맞았군.”

황제가 씨익 웃으며 백작부인의 목을 잡은 손을 그대로 들어 올렸다.


“!”

그 모습을 지켜본 모두가 놀랐다. 처음 본 황제의 무시무시한 모습에 다들 몸을 사리게 될 뿐이었다. 잔인함도 그랬지만, 언제 황제에게 저런 괴력이 있었단 말인가.


“제발 용서해 주세요, 폐하! 그저 백작부인은 심신에 좋다는 이국의 차를 제게 권한 것뿐입니다. 잘못은 제게 있습니다.”

프시케가 황제를 향해 사정하였다. 만족스럽다는 듯이 황제가 웃었다.


“그게 바로 백작부인의 죄야. 황후가 잘못을 저지르도록 한 죄.”

이 무슨 궤변인가. 모시는 분의 건강을 걱정하고 살피는 것이 죄라니.

그녀의 초록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자 황제의 입꼬리가 더욱 위로 솟았다.

귀한 황후의 눈물을 보다니, 이 급한 시기에 이토록 번거로운 일을 한 보람이 있었다.


“흡족하군.”

황제가 웃으며 뇌까렸다.

그러더니.

콰직!

쓸모를 다한 것의 존폐를 그가 결정했다.


“꺄악!!”

황제의 손아귀에서 백작부인의 몸이 축 늘어져 떨어짐과 동시에, 그 모습을 지켜본 시녀들의 날카로운 비명이 황후궁에 울렸다.

프시케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

대공가에 급히 소식이 전해졌다.

집사 제레미가 엘리제와 다니엘에게 비보를 전했다.


“백작부인이 살해되셨습니다.”

“네?”

엘리제는 너무 놀라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다니엘도 깜짝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처형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따르지 않아 그 자리에서 목이 졸리셨다 합니다.”

“!”

엘리제는 망연자실했다.

프시케를 구하기 위해 가장 큰 역할을 할 그녀가 죽임을 당하다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리고 황제가 서슴없이 그토록 잔인한 행동을 궁에서 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절로 탄식 같은 말이 뱉어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이제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지 않을 생각인가 봅니다.”

다니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다 그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하긴, 그는 황제지요.”

그런 절대 권력을 가진 자였다. 그동안 황제의 곁에서 황후가 국정을 지혜롭게 이끌어갔기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황제에게 폭군의 모습이 있다 한들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한번 드러낸 이빨을 감출 이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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