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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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
2022.11.24.
“대공! 사제님!”
뒤를 돌아보니 횃불 아래 얼굴을 가린 데몬과 미카일이 서 있었다.
신께서 도우셨구나!
프시케가 안도의 숨을 뱉었다.
“무사히 빠져나오셔서 다행입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네, 어서 가지요.”
시가지를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하자 검은 말과 흰 말이 한 필씩 준비되어 있었다.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함께 말에 오르게 됨을 용서해주십시오.”
프시케의 허락을 받은 데몬이 그녀를 들어 말 위로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흡!”
프시케가 숨을 들이마시며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녀에게만 들리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돌아와. 내게로.」
공포가 삽시간에 온몸을 장악했다.
달달달 떨리는 숨과 불안정한 호흡, 눈물이 차오르는 프시케의 눈을 바라보며 데몬이 눈을 붉게 물들였다.
“이런…….”
아직 몸속에 남아 있는 흑마법의 기운이 그녀의 몸을 옭아매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에도 보였다.
“저는 안…… 되겠습니다.”
검은 말과 데몬을 밀어내며 프시케가 숨을 헐떡였다.
이 이상 궁에서 멀어지려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직 여기서 죽어선 안 된다.
“폐하!”
미카일이 놀라 두 손을 모아 신성력을 쏟아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멈춰, 미카일!”
데몬이 빠르게 외쳤다.
쿨럭!
신성력이 닿자 황후가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주술에 묶어놓다니…….”
데몬이 휘청이는 프시케를 부축했다.
명령에 반하면 깨질듯한 고통을 주었던 엘리제와는 다르게 헬리오가 프시케에게 걸어놓은 주술은 더욱 강력하게 피주술자를 파괴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맙소사.”
눈물이 왈칵 솟으며 안경을 쓴 성직자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가 알던 성하가 이토록 잔인한 사람일 줄이야. 다른 이도 아닌 성하 자신이 원하는 황후에게까지 말이다.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을 바에야 죽음을 주겠다는 것인가.’
헬리오의 의도가 짐작되자 데몬은 더욱 소름이 돋았다.
“저는…… 괜찮으니 두 분은 어서 자리를…… 피하세요. 성하가 가까워지는 게…… 느껴집니다.”
프시케의 말에 미카일이 짧은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은 전면전을 할 때가 아니다. 성검이 있다 해도 아직 성하의 진명 전체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제가 알고 있는 이름은…… ‘타나’입니다. 자신이 키운 아이여서…… 이름의 일부를 주었다고 분명 말했었어요.”
“!”
‘타나’라고? 데몬과 미카일의 동공이 커졌다.
헉헉. 프시케가 힘들게 숨을 몰아쉬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하지만, 폐하.”
“명령입니다! 가세요! 어서…….”
데몬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반드시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황궁을 향해 다시 걷는 황후를 확인하고 데몬과 미카일은 서둘러 말을 달렸다.
***
“황후 폐하를 모셔오지 못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대공가에 들어서는 데몬과 미카일의 얼굴이 어두웠다. 엘리제가 애써 두 사람을 위로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하지만 프시케를 향한 걱정으로 모두의 마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황후 폐하께 걸린 주술을 완벽히 풀기 전까지는 모셔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성하께서 그 정도로 잔인하실 줄은…….”
데몬의 뒤를 이어 입을 연 미카일은 실망감에 말을 채 마치지도 못했다.
헬리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 벌어진 일이니, 지금부터라도 만전을 기해야 했다.
데몬은 프시케가 말해준 이름을 모두에게도 알려주었다.
“타나요?”
놀란 엘리제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들려온 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흑마법사의 이름이자, 그녀가 직접 성검으로 찌른 이의 이름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성하의 이름 중 일부를 어떻게 아셨을까요?”
다니엘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그들이 며칠간 고생하여 찾아보았으나 헬리오의 성은 어디에도 기록이 없었는데 말이다.
“일전에 황후 폐하께서 직접 들으셨다고 하네.”
데몬의 대답에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름 뒤에 타나로 시작되는 성이 올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제가 엘리제 님과 함께 신화를 찾겠습니다. ‘헬리오’처럼 나머지 부분도 신화 속에 답이 있을 것입니다.”
모처럼 반가운 말에 엘리제가 밝아진 얼굴로 외쳤다.
“타나로 시작되는 신의 이름을 찾는 거라면 어렵지 않겠어요!”
그러자 데몬도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답했다.
“찾으시는 즉시 다시 황궁으로 향할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구하지 못한 프시케를 위해서라도 한시가 급했다.
***
그녀의 주술이 어떻게 흩어졌을까.
그녀가 연기를 스스로 토했을 리는 없을 텐데.
황후를 직접 찾아서 돌아온 황제는 황후의 방으로 들어섰다.
늦은 밤은 이미 깊어져 칠흑처럼 어두운 새벽이었다.
“프시케…….”
카우치에 다소곳이 앉은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인형과 같은 멍한 눈빛 대신 투명하고 아름다운 초록빛 눈을 깜박였다.
“지금 네가 하려는 모든 것은 헛수고야.”
도망부터, 반항까지 모두.
“결국은 내 뜻대로 될 터이니.”
여유롭게 웃으며 그녀의 턱을 쥔 황제가 그녀의 고개를 올리며 눈을 맞추었다.
그를 바라보는 황후의 얼굴에 예상했던 경멸과 분노가, 그리고 예상치 못한 안쓰러움이 섞여 있었다.
저 표정을 잘 알고 있다.
주로 자신이 구원할 사람들을 바라볼 때 저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곤 했었으니까. 불쌍한 이들을 향해 연민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연기해야 할 때 선택하던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입장이 반대 아닌가.
그녀가 자신에게 연민을 느껴야 할 때가 아니다.
프시케의 목숨줄과 자유가 온통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으니까.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입장을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황제는 여전히 궁금했다.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떻게 그녀의 주술이 풀릴 수 있었던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신성력은 그가 가장 잘 아는 힘이었다. 그래서 프시케가 신성력에 의해 치료나 보호를 받는다면 주술이 더욱 강하게 그녀의 몸을 파고들도록 설계해놓았다.
흑마법과는 종류가 달라도 마력 역시 파괴의 힘을 가졌기에 헬리오는 프시케의 몸에 마력이 닿으면 더욱 주술이 증폭하도록 그 역시 계산하여 걸어놓았다.
황후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다면 결국엔 데몬과 미카일이 구하러 올 거라 예상했기에 이 두 가지를 미리 계산하여 주술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 아는 한, 지금 미로니카 황국 안에 그녀에게 걸린 흑마법을 풀 수 있는 이는 없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헬리오는 초조했지만 그 역시 오랜만에 느끼는 삶의 유희였다.
“이 세상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둘뿐이라 생각했는데. 안타깝군.”
그녀의 뜻이 자신과 다르다면 같게 만들면 된다. 하지만 당장은 반항하는 눈빛도 마음에 들어 잠시만 의식이 있는 상태로 둘까 싶은 변덕이 일었다.
“시종장.”
“예, 폐하.”
“황궁의 경비를 더욱 삼엄하게 하고, 황후의 모든 것을 내 허락하에 행하라.”
“예? 하, 하오나…….”
황후의 모든 것을 황제가 통제하겠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기에 시종장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서늘한 푸른 눈은 여전히 확고한 황제의 뜻을 전할 뿐이었다.
“사랑하는 황후가 심신이 미약한 듯하니 내가 모든 순간 친히 곁에서 보살피겠다.”
“……예, 명을 받듭니다.”
누가 황국의 최고 권력자의 명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황후는 주변 이들이 보아도 걱정이 될 만한 행동을 연이어 행하고 있었다.
그 따스하고 지혜로운 분께서 왜 갑자기 이렇게까지 되셨을까.
의아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한 시종장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황제의 얼굴과 음성으로 뱉은 말에 프시케는 곱게 모으고 있던 손을 꽉 쥐었다.
예상하던 바였지만 참담한 심정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처지가 마치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로안…….’
그녀는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이름과 함께 눈물을 삼켰다.
그를 잃었는데도 자신은 아직 회귀하지 않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낭떠러지 앞에 선 그녀를 버티게 하고 있었다.
***
대공가의 사람들은 모두 엘리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데몬을 배웅하는 모습을 늦은 밤이었지만 지켜본 이가 한둘이 아니었고, 그 상황을 이용하여 하임과 제레미가 엘리제 님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돌아가신 것으로 위장한 것이었다고 설명하였다.
모두가 그동안 황제의 첩을 향한 집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금세 수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황제의 집착이 첩이 사라지고 나니 황후를 향하는 모양이라고 다들 수군거렸다.
황제가 황후와 늘 함께 하는 것도 부족하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모양이라고 황궁의 소식이 대공가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황후 폐하를 숨도 못 쉬게 가둬 둔 모양인데……. 어떻게 구해드리지?”
황궁에서 고생하고 있을 프시케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진 엘리제가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책장을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마가렛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까요. 부디 괜찮으셔야 할 텐데요…….”
대공가의 오래된 비밀 서고 안, 두 사람은 가득 쌓인 서적을 함께 뒤적이며 걱정을 나누는 중이었다.
현실의 신화와 같은 내용의 서적들도 있었지만, 작품의 세계관이 반영된 새로운 신화도 많았기에 엘리제는 하나하나 읽어가며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 있을까? 타나로 시작되는 신의 이름이.
“찾았습니다!”
그 순간, 기쁨에 차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절로 엘리제와 마가렛의 고개가 돌아갔다. 서고 한쪽 구석의 다니엘이었다.
“여기입니다, 엘리제 님.”
다니엘이 펼친 신화 속에는 검은색 낫을 든 어두운 신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타나토스」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자, 파괴의 본능.
“죽음의 신이라고?”
이름이 빛의 신인데, 성은 죽음과 파괴의 신을 의미하다니.
잘못 찾은 것이 아닌가 싶어 아래 내용을 읽어 나갔다.
「……이 신의 권능이자 본능은 인간 자신을 사멸시키는 것이며, ……그로 인해 타인이나 환경을 처벌하며, 파괴시키려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책에 서술된 신의 특성에 대한 내용이, 그동안 헬리오가 로안에게 한 행동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었다.
‘헬리오의 스승은 알고 있었구나!’
이름을 듣기 전에는 몰랐을 뿐.
애초에 그의 스승은 이름을 통해 미래를 말해주고 싶었으리라.
헬리오가 결국에는 살아 있는 것들을 스스로 파멸하는 길로 이끌고 죽음에 이르게 만들 것임을.
“그래서 가능했나 봅니다. 그가 신성력과 흑마법을 동시에 다루는 것이.”
“!”
그가 ‘빛’과 동시에 ‘죽음’을 관장하는 존재임은 즉, 성하가 신성력과 흑마법을 동시에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아귀가 들어맞았다. 그의 이중적인 행적과 그 이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정반대 성향의 강력한 능력까지.
다니엘의 말이 엘리제에게 강한 확신을 주었다.
“그러네요!”
이곳이 작품 속이기 때문에, 신과 동격의 능력을 가진 헬리오는 이 안에서 일종의 신이다.
빛과 동시에 죽음을 관장하는 신.
그가 행하고 있는 능력이 그 증거였다.
“아무래도 이것이 성하의 진명 맞는 것 같아요.”
“예. 헬리오 타나토스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헬리오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