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황후는 알고 있다
(110/126)
110. 황후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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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황후는 알고 있다
2022.11.21.
“폐하!”
쿨럭쿨럭.
검은 연기를 토해내며 프시케가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십니까?”
사색이 된 백작부인이 프시케의 등을 황급히 두드렸다.
“괜, 괜찮네.”
숨을 돌린 황후가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황후의 생기 도는 눈빛을 보는 것이 며칠 만인가!
백작부인의 입이 반가움에 활짝 벌어지는 찰나.
“내가 궁에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되었는가?”
“!”
다시 백작부인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했건만…….’
아니기를 바랐던 일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조금 전에 본 연기와 황후의 말 한마디가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마주친 황후의 눈은 잘게 떨리고 있었으나 다행히 이전에 백작부인이 알던 초록색이었다.
지혜를 담아 반짝이던, 본래 황후의 눈빛.
“……혹, 그간의 기억이 없으십니까?”
검은 연기를 토해냈고, 며칠 동안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누군가에게 조종되고 있는 인형과 같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설마 황후에게 걸린 것인 주술이었을 줄이야.
그녀도 이미 주술에 걸렸던 엘리제 일을 통해 대략의 증상들은 알고 있었다.
백작부인의 물음에 황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다른 이에게 발설해선 안 되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숲에서 폐하를 구하여 모시고 오셨습니다. 오늘로 사흘 되었습니다.”
“…….”
황제가 데려왔다는 말에 황후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분은……, 진짜 폐하가 아니네.”
“예?”
백작부인이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가 낯설게 느껴지긴 했었다. 하지만 황후가 직접 그렇게 말을 뱉는 순간, 그 사실의 무게가 달라졌다.
‘누군가 황제 폐하를 흉내 내고 있다는 말씀인가? 그토록 닮은 사람이 있다고?’
황후가 아닌 다른 이가 한 말이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황후의 정확한 뜻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황국 최대의 비상 상황이라는 것!
백작부인의 온몸이 긴장으로 빠르게 조여들었다.
“당장 도움을 청해야 하네.”
“대공가에 말씀이십니까?”
“어찌…… 알았는가.”
진실로 다행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통해, 대공이 황후에게 필요한 차를 보냈던 것이 분명해지자 백작부인은 드디어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대공가에서 보낸 차를 드시고 황후 폐하께서 정신이 드셨기에 그리 생각하였습니다.”
“!”
그 말은 크레미언 대공이 이미 황후가 흑마법에 걸렸음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네.”
프시케는 빠르게 짧은 서신을 적었다.
***
황제의 집무실, 헬리오는 종아리를 움켜쥐었다. 정확히는 로안의 종아리를.
“큭!”
종아리가 헬리오의 의지를 벗어나 꿈틀대자 근육을 비틀어 짜는 고통이 느껴졌다. 잘생긴 로안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미소를 잃을 만큼은 아니었다.
“이만 포기하는 것이 네게도 좋은 일이 될 터인데, 로안…….”
입을 비틀어 웃으며 로안의 몸을 한 헬리오가 중얼거렸다.
아직 황제의 몸 안에 남아 있는 로안의 의지가 스스로의 몸을 해하면서 헬리오에게 반항하는 중이었다.
쥐어짜고 비틀고, 꿈틀거렸다.
마치 발악처럼.
자신이 아직 여기에 있음을 누군가에게 알리기라도 하듯.
그래봤자 발악일 뿐이지만.
발작은 특히 밤에 더욱 심해졌다.
프시케를 곁에 두고도 헬리오는 그 옆에 잠시 눕지조차 못하였다.
전신이 떨리는 발작이 그를 막았기 때문이었다.
몸을 장악했다고는 하나, 본래 주인이 30년 가까이 사용한 육신이었다.
강력한 주술을 이겨내고 헬리오의 뜻에 거부하는 순간이 아주 잠깐씩 나타날 때마다 헬리오는 짜릿한 승리감과 동시에 불쾌한 기분에 휩싸였다.
감히.
“훗! 이제 와 아내에 대한 권리라도 주장하고 싶은 건가?”
우스웠다.
“그토록 소중한 황후고 아내였다면 기회가 있을 때 잘했어야지.”
가증스럽게도 육신을 잃고 나니 아쉽기라도 한 것인가?
저 아름답고 지혜로운 황후 프시케가.
“처음부터 네게 그녀는 어림도 없을 만큼 아까웠어.”
그러니 이게 순리다.
“받아들여, 로안.”
집착이 그리 쉬이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헬리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수백 년이 넘어 천년에 가까워지는 삶을 살고 있으나, 그 역시 프시케에 대한 마음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집요하고 질겼으니까.
아, 어리석은 황제여.
“하지만 그 어리석음 덕분에 나의 염원과 그녀의 소원까지도 이룰 수 있게 되었으니, 애초에 이것은 신의 안배가 아니겠는가.”
황제인 로안이 어리석은 것은, 이 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뜻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만 받아들이고 포기해. 나는 다리 하나, 팔 하나쯤 없어도 황제 노릇도, 지아비 노릇도 잘할 자신이 있으니까.”
계속 로안의 의지가 육신의 어딘가에 남아 자신을 방해한다면 그 신체 부위를 기꺼이 잘라 버릴 생각이었다.
“멀쩡한 육신이야, 없으면 불편한 것일 뿐.”
불편하다 하여, 이토록 오랜 세월 기다려온 프시케를 잃을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차차 로안의 의지도 결국은 포기하게 될 것이었다.
“시간은 항상 나의 편이지.”
상처를 지져내듯, 다리를 붙잡은 손으로 마법을 흘려보내자 파지직 빛이 일며 다리에 지독한 고통이 흘렀다.
“으윽!”
피부가 검게 그을리고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동안, 헬리오는 신음하며 웃었다.
곧. 다시 조용해진 다리를 절며 일어난 그가, 이번에는 눈부신 신성력을 터트렸다.
그리고 잠시 후, 멀쩡한 다리로 황제가 자신의 방에서 나와 황후궁을 향해 걸었다.
***
“각하! 황후 폐하께 보냈던 전서구가 돌아왔습니다.”
늦은 밤까지 데몬의 집무실에 모여 있던 모두의 시선이 하임의 말에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서신의 내용을 확인한 데몬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니엘과 하임, 잠시 대공가를 부탁한다.”
“예, 각하!”
몇 시간 전, 그들은 프시케의 전갈을 받았다.
다행히 엘리제가 만든 정령수를 무사히 프시케가 마시고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데몬은 그들이 성하의 진명을 찾는 중이라는 것과 프시케를 바로 대공가로 데려오겠다는 뜻을 전했다.
황후는 허락을 담은 답신을 바로 보내왔다.
그녀가 성하의 진명 일부를 알고 있다는 말과 함께.
성하가 눈치채고 다시 황후에게 흑마법을 사용하기 전에 당장 프시케를 황궁에서 데려와야 했다. 데몬과 미카일이 망토를 두르고 전투복으로 갈아입는 것을 각각 엘리제와 마가렛이 도왔다.
지켜보던 자이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더 늦기 전에 가보셔요, 왕태자님.”
엘리제가 타이르듯 자이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다.
그에게는 그가 지켜야 할 모국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엘리제를 곧 일어날 전장의 한복판에 두고 혼자 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곳에서 다치신다면 제가 왕후 마마를 뵐 낯이 없어요.”
“부디 며칠만 더 도울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시에델로 떠나겠다고 그가 약조하고 나서야 엘리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일어난 후에 시에델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는 사이 데몬과 미카일이 어둠 속에서 각자의 말에 올랐다.
말 위에서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데몬이 기사단장에게 임무를 명했다.
데몬 앞으로 엘리제가 다가섰다.
“부디 황후 폐하를 모시고 무사히 돌아오세요.”
반짝이는 붉은 눈이 황홀하게 휘며 그녀를 향해 웃었다.
“그리하겠습니다.”
몸을 숙인 데몬이 그녀에게 짧게 입 맞추었다.
***
같은 시각, 황후의 방 쪽으로 멀리서 황제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황후는 먼저 잠들었는가?”
방 앞을 지키고 선 백작부인에게 황제가 물었다. 충직한 시녀장은 황제에게 공손히 답을 올렸다.
“예. 잠드신 지 제법 되었습니다.”
“알았네. 자네들도 이제 돌아가서 쉬게.”
황제가 부드럽게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가자 방 앞을 지키고 선 호위들과 백작부인이 짧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윽고 남은 시녀들과 함께 백작부인이 자리를 뜨려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안에서 황제의 고함이 들렸다.
“여봐라!”
호위와 백작부인이 소스라치게 놀라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섰다.
“예, 폐하!”
“황후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얼마나 되었지?”
“무,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을 몰라 당황하는 백작부인에게 황제가 종이를 내밀었다.
『금방 돌아올 테니 찾지 말게.』
분명 황후의 서체였다.
침대 위에는 인형 같은 황후 대신 푹신한 베개와 쿠션만이 가득했다.
“황후 폐하께서 설마 이 밤중에 또 마실을…….”
백작부인이 난감한 듯 중얼거렸다.
말없이 황궁에서 사라져서 소란이 벌어졌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런데 황후가 단 며칠 만에 그런 무모한 행동을 다시 했다니 전혀 그녀답지 않았다. 하지만 황후가 처음 사라졌던 날도 사실 상황은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심지어 그때는 방 안으로 들어갔던 그녀가 흔적도 없이 바로 사라졌었다.
그래서 모두가 납치라 생각하여 궁이 더욱 발칵 뒤집혔던 것이었다.
그러니 상황이 같은 지금, 황제는 크게 야단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직접 황후가 사라진 것은 마음의 병 때문이라고 사람들에게 친히 공표했기 때문이었다.
황후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가장 황당한 사람은 황제였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인형’인 상태니까.
인형이 제 의지로 쪽지를 쓰고 방을 나갔을 리 없다.
“찾아라.”
황제가 입안을 씹으며 나직하게 명했다.
짧은 명 한마디에 순식간에 주변에 냉기가 스며들었다.
“당장 궁을 뒤져 황후를 찾아!”
화가 난 황제가 미친 짐승처럼 포효하자, 호위와 시녀들이 혼비백산하여 달려 나갔다.
다시 사라진 황후를 찾기 위해.
***
“자네가 잘해주어야 하네.”
“예, 폐하. 염려 마십시오.”
데몬과 상의했던 대로, 백작부인에게 부탁을 전하고 프시케는 하녀 옷으로 갈아입었다.
시녀장을 돌아보는 황후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고맙네.”
“부디 무탈하십시오, 폐하.”
마지막 인사라도 전하듯 백작부인이 몸을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하녀 복장을 한 프시케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후 곧 다른 이들 사이에 섞여 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어둠을 틈타 더욱 이동이 수월했다.
‘서둘러야 한다!’
데몬과 약속한 장소는 황궁 밖 시가지였다. 밤이어도 오가는 사람이 많아 병사들이 수색 나오더라도 그녀를 쉽게 찾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늦은 시각인데다가 붉은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해 하녀들의 커다란 보닛을 꾹 눌러 쓰고 그 위에 망토까지 둘렀다.
스치듯 지나가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후드를 내리고 모자를 벗어야 한다면 들킬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제국민 모두가 아는 붉은 머리, 초록 올리브색 눈에 우아하고 아름다운 기품이 느껴지는 외모였으니.
그때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금세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혹 대공인가 싶어 애가 탄 프시케는 긴장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 것은 데몬이 아닌 황궁의 병사들이었다.
‘벌써 여기까지 찾으러 왔단 말인가?!’
이미 궁 안을 모두 뒤지고 궁 밖까지 사람을 보낸 모양이었다. 백작부인은 괜찮을까 걱정하는 사이 병사들이 한 명, 한 명 인상착의를 확인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녀의 등 뒤로 어둠 속에서 횃불이 드리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