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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폭풍전야 (109/126)


109. 폭풍전야
2022.11.17.



“시에델의 약초는 심신을 편안케 하기로 유명합니다. 무척 귀해 보통은 구할 수조차 없다 들었습니다.”

백작부인은 푸른색 상자를 들고 어젯밤 황제를 긴히 찾아갔었다.


“저녁때 황후 폐하께 한 잔 타 드려 숙면에 도움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

“…….”

부탁을 들은 황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조금 가늘어진 파란 눈으로 백작부인을 향해 타이르듯 조곤조곤 말했다.


“자네는 너무 염려 말게. 황후는 요즘 밤에 아주 편히 자거든. 아마도 내가 곁에 있기 때문이지 않겠나?”

그는 여상히 웃는 것뿐인데, 황제의 미소가 왜 이리 요사스럽게 느껴질까. 백작부인은 스스로 가진 불충한 생각에 민망하여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예, 폐하. 알겠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황제는 그녀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푸른색 상자 안에 든 차를 당장 황후에게는 올리지 못할 것이 아쉬워 백작부인은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돌아왔었다.

그런데, 다음 날인 지금.

같은 찻잎으로 보이는 선물이 그녀 앞에 놓여 있었다.

아들이 어머니의 무릎이 걱정되어 보냈다는 그 선물이.


‘분명 대공가로부터 받은 선물이라 하였는데…….’

백작가가 대공가와 오랜 세월 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고, 아들과 친분 있는 이가 대공의 보좌관이기도 하여 선물은 분명 믿을 만한 물건일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시에델의 찻잎이라니!’

그것도 쉬이 구할 수 없는, 황후가 어제 받았던 그 찻잎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절묘하지 않은가.


‘황후 폐하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혹 크레미언 대공께서 아는 것인가?’

평소 비밀리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던 황후와 대공이다.

그렇다면, 역시 이 차는 황후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판단을 위해서는 찻잎을 직접 먹어보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미 아들은 복용 후 효과가 탁월하여 어머니께 보내드린다고 했었다.

필체도 아들의 것이 맞았으며, 집사 역시 자신이 믿고 있는 자였다.

백작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금 전 읽었던 편지를 펼쳐서 차를 우리는 방법을 다시 읽어보았다.

『……꼭, 함께 보내드리는 물에 찻잎을 띄워 복용하셔야 합니다.』
 


‘함께 보내는 물?’

찻잎을 들추자 그 아래에서 유리병이 나왔다.

투명한 병을 꺼내어 들자, 담긴 물이 찰랑이며 은은한 파란빛을 띠었다.

백작부인은 조심스레 병에 담긴 물을 소량만 따라내었다.

***

꼬박 이틀간 데몬의 집무실에서 우리는 함께 밤을 새웠다.

역할을 나누어 나와 미카일이 성하의 이름에 대한 흔적을 찾고, 데몬과 하임, 다니엘, 자이드는 당장 대응을 위한 전략을 구상했다.

틈틈이 다니엘이 나와 미카일을 도와 대공가에 있는 고서부터 금서까지 방대한 자료를 살피며 성하의 진명을 찾기 위해 애썼다.

마침내 그의 이름이 빛의 뜻을 가진 ‘헬리오’로 시작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그 뒤만 알아내면 되는데…….’

이토록 많은 책을 쉼 없이 찾았는데 성하의 성을 포함한 이름은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막막함에 눈앞이 캄캄했다. 대대로 성하의 성과 이름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카일의 말에 의하면 성하들은 이름과 성 모두 부모에게 받는 것이 아니라 했다.


“전대 성하께서 다음 대 성하의 미래를 미리 본 후에 지어주신다 했죠?”

“맞습니다.”

내 질문에 미카일이 수긍했다.


‘현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긴 해.’

어느 종교적 지도자는 다음 생에 자신이 누구로 환생하게 되는지 예견하여 알려주고 열반에 든다고 했던가?

작품 속에도 같은 세계관이 투영되었나 보다 생각하며 보지도 못한 전대의 성하를 떠올렸다.

과연 그의 스승은 헬리오의 미래에서 빛과 함께 무엇을 보았을까?


“각하, 엘리제 님. 부디 잠시라도 쉬세요.”

먹을 걸 카트에 가득 담아 방으로 들어오는 마가렛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와 제레미는 우리 모두의 식사를 특별히 신경 써주고 있었다. 이러다 누구 하나 쓰러지면 어쩌나 싶은 얼굴에 걱정과 응원이 가득한 것이 느껴졌다.

그 말을 들은 데몬이 잠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더니 집무실의 모두에게 말했다.


“그게 좋겠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여섯 시간 후에 다시 모이겠습니다.”

데몬이 나와 그의 몫의 음식을 따로 챙기더니 나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피곤하지는 않으세요?”

붉은 눈을 올려다보며 내가 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뒷말 대신 서둘러 방문이 닫히고 따뜻한 입술이 내게로 내려왔다.

곧이어 서로의 숨이 섞이며 그의 향긋한 입술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마력이 느껴졌다.

그전까지 긴장으로 몰랐는데, 갑자기 부드럽고 따스한 감각이 전신에 퍼지자, 힘이 빠지고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 만에 입술을 떼어낸 그가 여전히 나를 안은 채 속삭였다.


“황후 폐하께서 정신이 드신다면 분명 먼저 기별을 보내실 겁니다.”

“!”

프시케가 정령수를 마실 수 있을 거라 예상하는구나.


“그런 후에는요?”

다음 이야기를 조르듯 내가 물었다.


“사실 성하의 진명을 완벽히 알기 전까지는 공격하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알고 있다.

죽일 수 없는 이를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을 테니.


“하지만 이름을 알지 못하더라도 우선 황후 폐하를 모시고 있는 편이 유리합니다.”

“그렇네요!”

헬리오는 시간과 공을 들여 로안의 몸을 빌어서까지 프시케 옆에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헬리오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그 목표부터 탈환해야 한다.


“그러니 황후께서 정신이 드신다면 제일 먼저 그분을 탈출시킬 생각입니다.”

“어떻게요?”

말이 좋아 탈출이지, 다른 이들 눈에 납치로 보이지 않을까?

그의 눈빛이 어쩐지 더욱 다정해진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전면전을 피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아…….”

전투를 예상도 했고, 각오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직접 들으니 가슴이 철렁했다.


“저는 절대.”

당신 혼자 보내지 않겠다는 말을 이으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다.

내 허리에 감겨 있던 그의 단단한 팔에 강한 힘이 실렸다.

나를 온통 끌어안고 그가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강하게 내 입술을 삼켰다.


 

***



‘마시자마자 씻은 듯이 나았다. 마치 아픈 적이 없었던 것처럼. 황후 폐하께도 어쩌면!’

차의 효과는 정말이지 거짓말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 마치 마법처럼 평생의 고질병이 사라지고 새로운 무릎을 얻은 기분이었으니.

하지만 백작부인이 황후에게 차를 올리기 위해서는 기회를 살펴야 했다. 황제가 얼마나 황후 곁을 떠나지 않는지를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고민 끝에 백작부인은 조용히 황실의 식사를 준비하는 곳을 찾았다. 백작부인을 통해서도 황제가 특별히 황후의 음식들을 신경 쓰고 있어서 다행히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었다.


‘찻잎을 아주 소량만 포트에 넣는다면…….’

색이 거의 나지 않을 것이니 마시게 할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식사 시간에는 시중을 드는 이가 황제 내외의 옆에 각각 배치되어 작은 식기를 놓는 것부터 시작하여, 마실 물을 따르는 것까지 편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미리 준비한 찻물을 마실 물이 담긴 포트에 섞었다.

하지만 실패였다. 황후는 약간의 과일만 먹고 물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식사를 마쳤다.

그 뒤로도 첩보전을 연상시키는 백작부인의 노력이 이어졌다.

결국, 황후의 목욕 시중 직후 겨우 기회를 잡아 한 잔의 차를 올릴 수 있었다. 그때가 유일하게 황제가 곁에 없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쩍 말수가 줄은 황후가 백작부인이 건네는 찻잔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었다. 백작부인은 내색하지 않은 채 숨죽여 기다릴 뿐이었다. 황후가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대기를.

언제 당도할지 모르는 황제 덕에 백작부인은 황후와 문을 번갈아 의식하고 있었다.

***

엘리제가 식사를 마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데몬은 다시 그녀를 안고 입맞춤을 이어갔다.

시에델을 떠나 있는 동안에도 그의 마력을 통해 그녀의 힘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 사실이 그의 가슴을 더욱 거세게 뛰게 하였다.

이제, 그는 자신의 가문에 내려진 저주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였다.

마력 폭주로 인해 모친을 잃고, 부친마저 미쳐버렸었기에 그에게 마력은 얼마 전까지도 저주받은 힘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하는 그녀와 연결될 수 있게 해주는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입맞춤할수록 자신의 마력 역시 계속 채워지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향기롭고 부드러운 엘리제의 입술을 머금을 때마다, 영원히 타오르는 촛불을 삼켜, 더욱 뜨겁게 스스로 타오르는 태양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기력을 회복시키고 부족한 잠을 보충해주고 싶었다. 마력을 흘려보내자, 곧 부드러운 그녀의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잠드셨구나.’

완전하게 안긴 그녀를 보듬고, 빛나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고르게 오르내리는 가슴과 편안하게 닫힌 두 눈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이 순간이 소중하고 행복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에 영원히 머물고 싶을 만큼.

움켜쥐었던 시간의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순식간에 시간이 흐르고.

잠시 후, 품 안에서 사랑스럽고 눈부신 금안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깨셨습니까?”

고단했는지 그녀에게서 작고 향기로운 하품이 이어졌다.


“네. 시간이 많이 지났나요? 어렴풋이 잠든 것 같은데요…….”

“마침 알맞게 일어나셨습니다.”

데몬이 웃으며 그녀의 몸을 천천히 일으켜주었다.

이토록 달콤하고 꿈만 같이 평온한 시간을 내일도 맞을 수 있을까?

내일 하루만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그에게 평생에 걸쳐 이루고 싶은 소망이 생겼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기꺼이 치르리라.

잠에서 깨어 잠시 멍해 보인 엘리제가 비장한 얼굴로 자이드를 찾았다.


“왕태자님을 시에델로 보내드려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가 전술을 짜는 것에 의견을 보태기도 하였고, 정령의 힘이 있으니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또 그가 있어서 프시케에게 정령수를 전달할 수도 있었다.

하나, 이후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다.


“그분이 돌아가실 수 있을 때 보내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강력한 폭풍이 몰아치기 전 마지막 잠깐의 평화가 지금뿐이라는 것을 데몬 역시 알고 있었다.

엘리제의 말에 데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뜻대로 하십시오.”

 

***

황후 프시케의 손이 자연스러운 호선을 그리며 올려지자, 찻잔에 담겼던 푸른 물이 자연히 그녀의 목을 타고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백작부인은 긴장으로 숨조차 편히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백작부인.”

갑자기 들린 문밖 시종의 목소리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무슨 일이오.”

“황제 폐하께서 급한 용무가 생기시어 도착이 조금 지체되신다 합니다.”

천만다행인 소식이었으나 이미 놀란 백작부인은 수명이 반으로 줄어든 기분이었다.

그때, 손쓸 틈도 없이 황후의 상체가 앞으로 휙 접혔다.


“웩!”

“황후 폐하!”

백작부인은 작게 황후를 부르며 재빨리 그녀의 몸을 부축했다.

카우치에 앉은 자리로 푸른 물이 쏟아졌다. 황후가 마셨던 차를 모두 토해낸 것이었다.


“!”

약효가 있는 차를 토해내다니, 이 무슨 일인가.

분명 자신과 아들에게는 효험이 좋은 차였는데.


‘황후 폐하께는 되레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면 어쩐다. 정말 큰일이구나.’

황후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각오할 수 있었다. 그녀가 황제의 눈을 속여 황후에게 차를 마시게 할 결심을 한 순간, 이미 그것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황후에게 찻물이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다.

때문에 더욱 백작부인이 느끼는 절망이 컸다.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이제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절망 속에서도 생각을 잇던 바로 그 순간.


“!”

백작부인의 몸이 삽시간에 소름으로 뒤덮였다.

황후의 열린 입과 코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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