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새로운 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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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새로운 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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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새로운 로안
2022.11.03.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군.’
때마침 황궁에 다시 나타난 흑마법의 기운.
다른 이들에게는 없는 강한 마력.
품에 안고 있는 ‘살아 있는’ 엘리제.
안 그래도 얼마 전 엘리제의 죽음과 관련하여 데몬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돈 상황이었다.
황후 말고는 황궁의 그 누구도 아직 엘리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황제의 몸을 헬리오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프시케 역시 인질로 잡혀 있었다.
유리한 상황은 확실히 아니었다.
무엇보다 데몬은 엘리제를 어떻게든 헬리오로부터 지키고 싶었다.
헬리오 앞에서 그녀가 정령의 힘을 쓰는 일이 없도록.
“확인만 하고 돌아가겠습니다.”
“네.”
작고 여린 목소리가 달콤하고 간지러웠다.
자신에게 미로니카의 안녕과 안전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건 모두 이 목소리의 주인공 때문일 것이다.
기척을 숨기고 흔적 없이 이동하는 것은 데몬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법 큰 검은 두루마리를 안은 상태에도 마찬가지였다.
마력을 사용하며 이동하니 사람들의 눈보다 더 빨랐다.
황제의 방과 집무실 근처에는 사람이 더욱 많았다. 황후가 사라진 상황에 황제까지 쓰러졌으니 말 그대로 초비상이었다. 주치의 외에도 황궁의 모든 의사가 모였다.
‘역시…….’
붉은 눈 안에 흑마법의 기운이 가득한 로안이 비쳤다.
전에 확인했을 때보다 더 강한 기운의.
‘주술이 격상된 것이 맞다.’
조만간 헬리오에게 집어 삼켜진 로안이 검은 눈을 뜨며 일어나 헬리오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겠지.
그때 로안의 주치의가 진찰을 마쳤다.
“아, 아무래도 이 상태는…….”
작게 중얼대는 소리가 먼 거리에 있는 데몬에게도 들렸다. 마치 가까이에 있듯 잘. 주치의는 비틀거리며 황제의 곁에서 한발 물러섰다.
그도 눈치챘을 것이다. 보통의 이유로 황제가 쓰러진 것이 아님을.
이전에 주술을 마신 엘리제 역시 그가 살핀 적이 있었으니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입을 열어 자신이 알아낸 바를 말하지는 못했다.
감히 황제의 상태인데, 멀쩡하다고 거짓으로 고할 수도 없고, 흑마법사가 사라진 시점이니 주술에 걸린 것 같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겠지.’
하지만, 만약 이 상황에 또 다른 흑마법사가 등장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예전에도 소문이 돌았던 누군가라면 어떠한가.
미간이 일그러지고 붉은 눈이 잠시 어둡게 내려앉는 순간.
침상에 누운 로안의 눈꺼풀이 확 열리며 그가 눈을 떴다.
‘왔구나.’
로안의 몸을 장악한 흑마법사는 과연 성하가 맞을까?
“황, 황제 폐하! 정신이 드십니까?”
황제가 무사히 눈을 떴다는 안도에 모두가 반색하며 외쳤다.
침소에서 몸을 일으키는 로안은 지극히 편안하고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조금 전 쓰러졌던 이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놀라는 주변의 이들을 여상히 바라보며 그가 웃었다.
“걱정할 것 없다. 잠시 쉬었던 것뿐이니.”
그 말을 들은 방 안의 모든 이가 한도의 한숨을 뱉을 때.
데몬은 놀라움을 속으로 삼켰다.
‘이런!’
붉은 눈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주술의 단계까지 격상시켰으니 분명 흑마법사가 원하는 대로 로안을 조종하겠지 생각했는데.
로안의 눈이 검은색이 아니었다.
본래 그의 것인 푸른색이었다.
***
“대공께서 돌아오고 계신다 합니다.”
집사 제레미의 말에 귀빈실에 있던 다니엘과 하임은 다행이다 생각했다.
그들의 주군이 일단 돌아오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무사하며 당장의 전투는 피했다는 의미였으니까.
다니엘도 조금 전 하임을 통해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상태였다.
“각하께서 오시면 다시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세계 최강 신성과의 전투를 준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대공가의 병력을 보내라는 명에 맞춰 급히 움직였지만 걱정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대비할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에 하임은 안도했다.
곧 도착할 주군을 맞이할 준비를 위해 하임이 방 밖으로 나가고 다니엘은 배정받은 방에 차분하게 짐을 풀었다.
얼마 후. 가주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대공가를 울렸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각하!”
제레미와 하임이 마중을 나와 일행을 반겼다.
선두의 데몬이 커다란 두루마리를 안고 제일 먼저 말에서 내렸다.
그 모습에 하임과 제레미는 속으로만 끙! 신음을 뱉었다.
‘엘리제 님이시구나.’
‘언제까지 비밀로 하실 생각이신지…….’
대공가 사람들에게는 알리셔야 하지 않을까? 저렇게 요상하게 감추어 안아 들고 다니실 바에야…….
엘리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대공가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겠구나 싶다.
데몬의 뒤로 미카일과 자이드가 그리고 마가렛이 대공가로 들어왔다.
하임과 제레미는 대공가에 처음 방문하는 이국의 왕태자를 정중히 맞이했다.
대공가의 기사들은 전열을 갖추기 위해 돌아가고 제레미는 귀빈을 새로운 방으로 안내하였다.
마가렛도 인사 후 몸을 물리자 데몬의 곁에 미카일만이 남았다. 하임이 데몬에게 작게 속삭였다.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미카일에게는 깜짝 선물이 될 소식이니 데몬은 고개만 끄덕이고 집무실로 향했다. 한 사람을 안고도 빠르게 걷는 그를 미카일과 하임이 따랐다.
데몬의 방에 도착하여 두루마리를 부드러운 카우치에 내리자 엘리제가 망토를 벗으며 얼굴을 드러냈다.
후하.
검은 망토 안에서 내내 참았던 그녀의 숨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에 데몬이 작게 미소 지었다.
“적당한 상황을 만들어 엘리제 님께서 살아계심을 알려야겠습니다.”
하임이 옆에서 조언하자 데몬도 고개를 끄덕였다.
속마음이야 엘리제를 계속 감추고 싶었다. 그녀를 욕심낼 많은 이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고 자신만 바라보고 싶었다. 하지만, 엘리제가 감수해야 하는 불편이 너무 컸다.
땅에 발이 닿자 숨을 뱉어낸 엘리제가 작고 붉은 입을 열었다.
데몬은 그 입술을 삼켜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 억눌렀다.
“아까 각하께서 하신 말씀, 무슨 뜻이셨어요?”
황궁에서 로안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데몬은 그녀를 안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데몬이 로안을 확인할 때 엘리제의 품속 로테와 토리는 무척 강하게 떨고 있었기에 그녀는 혹시나 성하가 직접 나타난 것인가 싶어 덩달아 바짝 긴장했었다.
로안이 흑마법의 주술에 완전히 삼켜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사안이 중하니 대공가로 바로 가서 설명하겠습니다.”
둘을 기다리고 있던 미카일과 자이드를 황궁 근처에서 만나자 데몬은 한마디만 하고 말을 달렸다. 무사히 돌아온 두 사람의 모습에 모두들 안도하고 데몬을 쫓아 말을 달렸었다.
“황제 폐하께 무슨 일이 있는 거지요?”
엘리제는 불안한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 어쩐지 데몬이 황궁을 서둘러 벗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때마침 자이드까지 데몬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그러자 데몬이 천천히 운을 떼었다.
***
정신을 차린 로안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영롱하고 맑아 보였다.
소리 없이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에 주변의 이들도 안부를 묻다가 숨죽여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짐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황후를 찾으러 가겠다.”
“!”
그의 말은 단호하기까지 하였다.
사랑하는 부인을 직접 되찾으러 가겠다는 말로 들려 몇몇은 감동한 눈치였다.
‘크게 앓고 나시더니 제정신이 드신 건가?’
황후를 잃을 뻔한 황제가 크게 앓고 정신을 차려 군주로서의 면모를 되찾은 것일까?
‘하지만 잠깐이겠지.’
그동안 로안이 황제로서 보인 모습에는 위엄보다 무능이 더 컸다. 그래서 다들 놀라기는 했으나 별로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 눈빛이었다. 저러다 어리석은 황제의 모습으로 금방 다시 돌아오겠지 싶어서.
그들의 속내가 ‘로안’은 누구보다 잘 들여다보였다.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지으며 황제가 눈을 감았다.
“!”
그 미소가 무척이나 서늘하여 바라보는 이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황제가 저리 웃은 적이 있던가?
어리석고 담이 작았을 뿐, 그들의 황제는 비정하거나 무도하지는 않았다.
그랬던 이가, 지금, 이 순간, 눈앞의 이들이 하찮고 같잖다는 듯 웃고 있었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
다시 눈을 천천히 들어 올린 황제가 아주 낮고 음산하게 명하며 밖으로 향했다.
***
“황제 폐하는 지금 흑마법에 완전히 장악된 상태를 지나쳤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모두 처음 들어보는 데몬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눈 색깔을 보면 압니다. 주술에 잠식되어 주인에게 지배되는 자는 눈의 색이 빛이 없는 완전한 검은색입니다.”
그런데 분명 황궁에서 본 로안은 자신의 본래 눈 색이었다.
그러니까 주술에 지배된 상태와는 다른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했다.
엘리제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되는 경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빙의.”
엘리제가 중얼댔다.
“예?”
미카일이 놀라서 물었다.
“이제 황제 폐하가 곧, 성하라는 의미예요. 폐하의 몸에 아예 성하의 영혼이 들어와 버린 거예요.”
바로 그녀처럼.
“!”
자이드와 미카일은 크게 놀랐다.
지배하는 상태가 아니라, 황제의 육신을 아예 헬리오가 가져버리다니.
“엘리제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데몬도 수긍하자 미카일은 탄식을 뱉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결국, 자신이 평생을 모셔온 주군이 원하던 것은 성하의 자리가 아니라 황국의 황제 자리였던 것일까?
그것도 황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그렇게까지 로안이 되고 싶었고 황후를 갖고 싶었을까.
미카일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런데 그렇다면 지금 어딘가에 성하의 빈 육체가 남아 있다는 뜻 아닌가요?”
엘리제가 데몬에게 물었다.
“그러네요! 그걸 찾아서 없애면 되지 않겠습니까?”
상황을 이해한 자이드가 외쳤다. 해결 방법을 찾았다는 듯이.
하지만 데몬의 표정은 아직 어두웠다.
“육체와 영혼의 연결이 이미 끊어진 상태라면 성하의 몸을 설사 불태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하여도 황제 폐하께 들어간 성하의 영혼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성하의 껍데기만 어찌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미카일이 절망에 빠진 사람처럼 나직이 중얼댔다.
“성하는 본래도 죽음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습니다. 신성력으로 얼마든지 오래 살 수 있고 죽음에 이르기 전에 그 상태를 되돌릴 수 있으니까요.”
‘그럼 완전 괴물이잖아!’
엘리제가 속으로 생각하는 사이 자이드가 말했다.
“신이네요.”
그의 말이 맞다.
타나가 죽어가며 자신이 모시는 신의 뜻대로 될 거라고 중얼거렸던가.
데몬은 이제야 타나가 그렇게 표현한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신을 무슨 수로 없앤단 말인가.
“신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소멸시킬 수 없습니다.”
“신을 소멸시킨다고요?”
미카일의 말에 엘리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말은 소멸시키는 방법이 있긴 있단 말이잖아!’
그때 번개가 스치듯 번쩍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예전에 그녀가 꾸었던 꿈의 한 조각이.
그 속에서 자신이 중얼대며 읽었던 책의 일부분이.
“신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그 뒤에 뭐라고 읽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