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착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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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착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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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착각이었나?
2022.10.31.
“먼저 대공가에 가 계십시오. 한 가지만 직접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절대 허락할 수 없어요. 저랑 반드시 같이 가셔야 해요.”
저 호랑이 소굴에 내 남자만 보낼 수는 없다. 절대로.
내가 물러서지 않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어요.”
위험한 곳에 데몬 혼자 보낼 수는 없다. 숲이든 황궁이든.
“하아.”
한참 만에 그의 입에서 숨이 작게 뱉어졌다.
결국 데몬은 나를 완전히 검은 망토와 후드에 둘둘 말은 후에야 나 역시 말에서 내려주었다.
검은 천에 내 거의 모든 곳이 가려지고 겨우 눈만이 밖으로 빼꼼 나왔다.
“절대 제게서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떨어지고 싶어도 불가능해요. 옴짝달싹조차 못 하겠는걸요.
“저 때문에 오히려 더 수상해 보이는 거 아닐까요?”
멀리서 보면 거대한 김밥처럼 보일 거 같아.
“이대로 황궁을 드나드는 짐꾼들 사이에 숨어들 참입니다.”
현재 황궁이 비상 상황인 만큼 대공이 나타난다면 당장 황후를 찾아달라 귀족들이 매달릴지도 몰랐다. 아니, 그 이상의 역할과 책임을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기에 데몬은 짐꾼으로 위장하여 기척을 숨긴 채 황궁 내로 들어갈 생각이라 했다. 데몬 역시도 검은색 긴 망토를 두르고 후드를 써서 얼굴을 가렸다.
‘하긴 이렇게 하면 얼핏 보아서는 우리가 누군지 모를 것 같긴 하네.’
준비를 마친 그가 아예 나를 자신의 몸에 밀착시키더니 단숨에 안아 들었다.
‘앗!’
넓은 품에 안겨서 이동하려니 마치 어미에게 안겨 있는 아기 코알라나 캥거루가 된 기분이다.
‘조……, 좋다.’
이 와중에도 그의 품에 꼬옥 안긴 것이 무척이나 흡족하여 채신없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얼굴도 화끈거리고.
밖에선 눈만 보일 테니 그것참 다행이야.
“혹시 모르니,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겠네.”
미카일의 말을 듣고 데몬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만일을 위해 자이드와 마가렛도 함께 밖에서 대기하기로 하고, 신속을 요하는 일인 만큼 기동력을 높이기 위해 데몬과 나만 서둘러 다녀오기로 했다.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라며 마가렛이 걱정하는 말을 전했다. 나는 눈으로 웃어주었다.
데몬에게 안긴 내 품속으로 토리와 로떼가 파고들었다.
***
“황궁에서 확인하셔야 할 것이 있다 하셨지요?”
내가 먼저 물었다.
“예. 지금 느껴지는 기운의 발원지를 파악하고자 합니다.”
맞아. 흑마법의 기운이 어디서 흘러나오고 있는지 쫓아가면 단서를 찾을지도 몰라.
어쩌면 모든 일의 원흉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성하를 맞닥뜨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긴장되는 것이 맞는데, 나는 다른 이유로 목이 타고 있었다.
그가 나를 안고 있어서. 아니, 몸이 완전히 밀착되어 닿아 있어서 그가 대답할 때마다 넓고 단단한 그의 가슴이 울려 내 몸에 자르르 진동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자꾸 함께 보낸 그 밤이 상기되었다. 꼼짝없이 그의 품에 갇혀서, 그의 숨결과 심장 소리를 들으며 행복을 느꼈던 상황이 비슷하니 절로 연상되나 보다.
심장의 고동만으로도 너무 좋은데 진동까지 더해지니 이런 긴박한 상황이 어쩐지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서 이건 그가 너무 멋진 탓이라며 합리화를 하고 있는데.
“엘리제 님께서 원하시는 곳 먼저 가겠습니다.”
나를 안고도 빠르게 달리며, 그가 흔들림 없는 말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황후궁으로 부탁드려요.”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도리질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직접 가서 보자. 꿈속에서 보았던 그 서고가 프시케의 방 아래에 있던 비밀창고가 맞는지.
알겠다고 짧게 대답을 마친 데몬이 금세 황후궁까지 닿았다.
큰 키에 나를 안고도 데몬은 귀신같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곳으로 잘도 숨으며 이동했다. 긴장되어 나도 모르게 손에서 땀이 난다. 토리와 로떼도 낑낑대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해. 조금만 참아 애들아.
그런데 경비가 삼엄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황후궁은 안까지 들어가는 일이 수월했다.
어찌 된 일이지?
‘사라진 프시케를 찾느라 모두 정신이 없는 상태라 그런가?’
그때, 근처를 지나는 경비병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자네 아직 못 들었나? 당장 본궁 현관 앞으로 집합하라는 명이네.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라 하시니 우선 가세.”
“무슨 일이 있습니까?”
“황후 폐하를 찾는 수색대를 조직하려는 거겠지. 게다가 조금 전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셨다더군. 이래저래 상황이 좋지 않아.”
로안이 쓰러졌다고?
내가 숨을 죽였는데도 놀라는 걸 느꼈는지 데몬이 조금 더 나를 꽉 끌어안았다.
쿵쿵쿵.
그의 것인지 내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울린다.
경비병들이 사라지고 나니 이동하기 한결 수월해졌다. 하지만 황후궁 아래에 있는 비밀창고로 가기 위해서는 프시케의 방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황후가 사라졌다고는 하나 방을 지키는 이들이 있을 터인데.’
아니나 다를까 프시케를 모시던 이들이 방의 안과 밖을 드나들며 분주한 모습이었다.
백작 부인과 하인들은 여전히 긴장이 가득하고 당황한 얼굴로 여기저기를 찾고 있었다.
덕분에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지만 사람이 너무 많다.
몰래 들어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제 어쩌지?’
***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다니엘 도련님.”
대공가의 입구에서 하임은 귀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청년은 한눈에 보아도 학식과 예법을 갖춘 귀공자의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보좌관님, 집사님.”
다니엘은 하임과 제레미에게 정중하게 인사하였다. 움직임이 단순하고 절도 있으면서도 특유의 고상함이 느껴졌다.
훤칠한 키에 단정하고 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우아하고 정결한 말투와 동작 때문인 듯했다.
“오는 길에 대공가의 병력이 이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나요?”
그의 물음에 하임이 현재 황궁의 비상 상황을 간단히 알렸다.
“그래서 그곳에 대공 각하와 사제님께서 함께 가 계십니다.”
대답을 들은 다니엘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혹시 그 여인도 함께 있습니까?”
어쩐지 질문의 끝이 묘하게 날카로운 느낌이라 하임은 순간 흠칫하였다.
“그 여인이라 하심은, 엘리제 님 말씀이십니까?”
“아! 성함이 그러했군요.”
다니엘이 무감각한 얼굴에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한때는 대공가의 일원이었다가, 얼마 전까지는 황제의 첩이었다 했던가?
쯧.
“?”
어디서 혀 차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하임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가 사용하게 될 방으로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각하와 자주 소통해야 하니 가능하면 각하 집무실 근처면 좋겠습니다.”
다니엘의 요청에 집사 제레미가 공손히 안내를 시작하였다.
“예. 안 그래도 그렇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자, 이쪽으로 드십시오.”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따라 하임도 걸음을 옮겼다.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며.
‘방금 굉장히 못마땅해하는 거 같았는데 착각이었나?’
하임은 앞서가는 다니엘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
몸을 숨긴 나와 데몬은 아직 프시케의 방 앞이었다.
“황후 폐하의 방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요.”
내가 데몬에게 작게 소곤댔다. 그러자, 그가 잠시만 기다려 보라며 밖을 주시하였다. 잠시 후.
“백작 부인! 잠시만…….”
마침 로안을 모시는 시종장이 멀리서 다가오며 급히 부인을 불렀다. 소란을 틈타 누가 황후 방의 귀한 물건에 손이라도 대면 안 되니 부인이 모두를 데리고 방 밖으로 나왔다.
방문이 닫히고, 이제 방을 지키고 선 이는 문 앞의 호위 둘.
그때, 데몬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나를 안고 그들 앞에 섰다. 절로 내 몸이 경직되었다.
후드를 내리는 데몬을 보고 그들이 외쳤다.
“크레미언 대공 아니십니까?”
“급한 명을 받고 왔다.”
데몬의 말에 호위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문을 열었다. 명을 받고 왔다는 말에, 아마도 당연히 황제가 대공을 보내 황후가 사라진 일의 조사를 시작한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데몬이 문을 닫고 나를 내려놓았다. 토리 로떼도 이제 살겠다는 듯 쪼르르 내 품에서 내려왔다.
“백작 부인이 돌아오기 전이 좋겠습니다.”
“네. 저를 따라오세요.”
나는 황후의 방 아래에 있는 비밀창고로 데몬을 인도했다.
***
다행히 누가 황후 방에 들어오기 전에 용건을 마쳤다. 데몬을 본 사람도 호위 둘뿐이니 크게 문제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데몬이 말했다. 그러나.
‘꿈속의 그곳이 아니었어. 어쩌지?’
현실이 내 예상을 빗나갔다.
비밀창고 내의 서고가 아니라면 꿈에서 보았던 곳은 어디일까?
분명 무언가 결정적인 책을 서고에서 찾는 꿈이었는데.
‘내 착각이었나?’
하긴 생각해보니, 꿈속의 인물들이 모두 모이지는 못했네.
데몬과 미카일, 그리고 키 크고 젊은 남자가 하나 더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건 누구지?’
나를 예전 꿈에서는 호되게 혼냈던 사람.
어쩐지 느낌이나 분위기가 내가 아는 누구와 참 비슷한 사람.
‘혹시 그 사람을 만나야 실마리가 풀리는 건가?’
다시 나는 둘둘 말린 채 데몬에게 안겨 이동되었다.
‘아, 자꾸 일이 꼬이는 느낌이 들어 불안해.’
사라진 프시케, 종적을 감춘 성하, 남아 있지 않은 단서.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이미 나로 인해 원작이 뒤틀렸는데, 이러다 여주인공인 프시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지?’
그때, 데몬이 어두운 곳으로 몸을 숨기고 멈추었다.
곧이어 따듯하고 큰 손이 가만히 내 머리를 감싸왔다.
“!”
머리에 이어 조용히 볼을 감싼 손이 그대로 부드럽게 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은 눈과 마주치고 따스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어둠 속에서 내 입술을 찾는다.
“아…….”
그것만으로도 편안해지고 든든해지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지금부터는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이겠습니다.”
“어, 어디로 가시는데요?”
“지금 궁 안에 흑마법의 기운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곳…….”
뒷말을 듣지 않았는데도 어딘지 알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두려움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내 품 안의 토리와 로떼의 몸도 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황제 폐하의 방 쪽으로 갑니다.”
***
사실 데몬이 처음 황궁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은 혹시 헬리오가 남겼을지도 모르는 흔적이었다.
그러나 황후의 방 앞에서 경비병들의 대화를 듣고는 로안에게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술이 몸 안에 담긴 로안이 다시 한번 쓰러졌다면, 지난번 엘리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술이 격상되는 상태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로안의 몸에 직접 들어올 차례겠지.’
엘리제의 몸을 장악하고 그 안에 들어와 데몬을 유혹했던 타나처럼.
몸을 장악하고 있는 이가 헬리오라는 것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그가 모든 것의 배후라는 가장 정확한 증거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확인을 하여도 당장 로안의 몸에서 헬리오를 내보낼 수는 없었다.
로안의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은 나중 문제이고, 다른 이들은 로안이 주술에 걸린 상태임을 모르는 데다가 그가 황제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황제에게 대항한 것으로 비쳐 낭패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지금 엘리제까지 안고 있지 않은가. 죽은 사람으로 되어 있는 그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