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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사라진 황후 (103/126)


103. 사라진 황후
2022.10.27.


데몬은 대공가로 먼저 연락을 보냈다.

곧바로 출병할 수 있는 대공가의 사병부터 우선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출발시키라 하임에게 명했다.

혹시라도 바로 헬리오와 프시케를 찾는다면 당장 구출하기 위해 전투가 불가피할 것이다.

최대한 강한 아군이, 최대한 빠르게 필요했다.


‘준비를 마치고 출발하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다간 프시케를 구할 타이밍을 놓칠지도 모른다.

데몬은 허리춤에 걸려 달그락 소리를 내는 긴 검을 의식하며 정신을 집중시켰다.

떠오르는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하며 자이드가 안내하는 산길을 따라 이동했다.

헬리오를 바로 상대하게 된다면 어떤 싸움이 펼쳐지게 될 것인가.

짧게 주어진 시간이지만, 예상하고 대비를 해야 한다.


‘지난번 타나를 상대할 때 그녀가 한쪽 팔을 잃었음에도 전혀 지치는 기색 없이 나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성하가 뒤에서 도움을 주셨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는 것은 그는 자신의 힘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어쩌면 반대로 누군가로부터 그조차도 힘을 받는 중일지 몰랐다.


‘하지만 엘리제가 타나를 성검으로 무찔렀을 때는 그 타격이 성하에게도 전달되었을 거야.’

그래서 헬리오는 쓰러져 몸을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때 미카일이 황궁을 방문하기 전까지 헬리오는 황궁에서 다친 몸을 치유 중이라고 했었다.


‘타나와 대치했던 것은 보여주기 위한 연기였겠군.’

어쩌면 타나는 자신의 고용주가 성하인 줄은 몰랐을 수도.

하지만 그녀를 통해 직접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는 이미 죽고 없으니까.

사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성하께서도 성검을 통해서만 소멸 가능한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본래 성검을 사용하는 이에게는 막대한 희생이 요구된다.

검의 날이 없었기 때문에 검 대신 특별한 힘을 가진 자만이 그 검을 사용할 수 있었고, 사용한 이는 목숨을 잃어왔다.


‘엘리제만 제외하고.’

그가 사랑하는 그녀는 유일한 예외자였다.

죽었다 살아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성검의 날까지 만들어냈다.

데몬의 허리춤에, 대공가에서부터 가져온, 날이 생긴 바로 그 성검이 메여 흔들렸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성검을 사용한 이가 목숨을 대가로 치르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해보지 않고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성하께서 은신 중이시라는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자이드는 궁금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에 대한 대답을 데몬 대신 미카일이 해 주었다.

내용을 들은 자이드 역시 말할 것도 없이 크게 놀랐다.


“제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미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저도 데몬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랬으니까요. 제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듣고 난 후에도 믿기 어려웠는걸요.”

얼마쯤 더 산을 올라 드디어 자이드가 기억하는 지점이 나타났다.


“이곳입니다. 저쪽 산 깊은 곳을 향해 올라가고 계셨어요.”

“들고 있는 물건이 있었다고 하셨지요?”

“네. 제법 부피가 컸어요. 무거워서인지 안아 들고 계셨습니다.”

자이드의 대답을 들은 미카일과 데몬은 동시에 생각했다.

무거워서가 아니라 사람이었기 때문이었겠지.


“엘리제 님.”

데몬이 말에 함께 오른 엘리제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녀가 후드를 내리자 품에서 토리와 로떼가 나타났다.


“네, 각하. 자, 토리 로떼. 가서 친구들에게 무서운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달라 요청해줄래? 흑마법의 기운 말이야.”

작고 사랑스러운 두 마리가 몸을 떨었지만, 곧 엘리제의 말을 알아듣고 그녀의 몸에서 내려와 숲을 향해 달려갔다.


“토리와 로떼를 돕기 위해 저도 힘을 사용하겠어요.”

엘리제가 두 눈을 감으며 정령의 힘을 일으켰다.

파아아아.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푸르고 눈부신 빛으로 휩싸였다.

숲의 나무 냄새, 흙냄새, 풀 냄새에 그녀의 꽃향기가 더해지자 말할 수 없이 평안하고 황홀한 내음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고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미카일은 몸 안의 신성력이 부푸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신의 축복을 받는 것과 같이 따스하고 성스러운 기운이 체내에 충만했다.

자이드는 이런 신기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아아.”

자신의 몸속 힘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지는 기분이 들어 가슴이 뛰었다.


‘이, 이건!’

그는 모후 그레이스를 통해 태어날 때부터 정령의 힘을 가진 왕족이었지 스스로 각성하여 힘이 발현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생전 처음 느끼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가 있었다.


‘힘이 눈을 뜨고 있어.’

자이드의 정령의 힘이 열리고 있었다.


 

***

동시에 데몬 역시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신의 마력이 차오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한계치 없이 수직 상승하여 쏟아지는 분수처럼, 몸속의 힘이 마구 솟구치고 있었다.


‘이게 엘리제의 더 강해진 힘이구나!’

세 번째 각성을 통해 그녀는 부활했을뿐더러, 다른 이의 특별한 힘을 증폭시키는 능력을 갖게 된 것 같았다. 그런데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데몬의 얼굴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 사실을 성하가 알면 큰일이다!’

헬리오에게도 엘리제는 같은 효과를 줄 것이었고, 그 사실을 헬리오가 알게 된다면 그는 엘리제를 욕심내게 될 것이 분명했다.

끊임없이 자신의 흑마력을 높여줄 존재니까.


‘이런!’

그 생각을 하자, 데몬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당장 엘리제를 이곳에서 벗어나 가장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야 한다. 아니, 아무도 찾지 못하게 숨겨놓아야 했다.

그녀의 힘은 신의 선물일 수도, 동시에 재앙일 수 있었다.


“엘리제 님, 잠시만 멈추어주십시오.”

그가 청하자 엘리제가 감았던 눈을 뜨고 힘을 갈무리했다.


“무슨 일이세요?”

의아해하는 그녀를 향해 데몬이 고개를 내려 귓속말을 전했다.

***

정령의 힘을 너무 많이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줄 알았는데 난데없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내 힘이 다른 마법의 힘들을 증폭시킨다고?’

나는 데몬의 말에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미카일과 자이드가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의 손과 몸 이곳저곳을 살피는 모습이 내 눈에도 보였다.

심지어 자이드는 기쁨으로 얼굴이 환해진 표정이었다.


‘이게 나 때문이라고?’

고개를 돌려 데몬의 붉은 눈을 마주하자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래요, 뭔데 그렇게 또 슬픈 눈빛인가요?’

그의 볼을 손으로 감싸며 그렇게 묻고 싶었다. 무엇이 걱정인 걸까.

손을 들어 올리는데, 멀리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뀨! 뀨!! 뀨우!”

로테의 소리였다.


“뭔가를 찾았나 봐요!”

외치는 나의 품으로 로떼가 달려왔다. 모두가 긴장한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병력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천천히 이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부터는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다가가야 합니다. 엘리제 님께서는 우선 이곳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왕태자님, 저와 함께 가주시죠.”

군대를 통솔해본 적 있는 그가 미카일보다 전투에는 나을 것이었다.


“잠시만요!”

“뀨!”

로떼가 내 품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그리고 곧. 나는 내 손 위에 올라, 입을 오물대는 로떼 덕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갑자기 토끼의 말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뀨! 깊은 동굴 속, 동굴 속, 동굴!]

“동굴 속에 또 동굴, 또 동굴이 있대요.”

“!”

놀란 세 남자 역시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뀨우? 무서워. 아무도 없어.]

“흑마법의 기운은 있는데 사람은 없다고?”

내가 묻자 토리가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은신처를 옮기신 건가 보군!”

미카일이 말했으나 데몬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일단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오는 것이 좋겠어.”

잠시 후 데몬과 자이드가 로떼를 따라 깊은 숲을 다녀왔다.

로떼의 메시지는 사실이었다.


“이미 장소를 옮긴 것이 맞습니다.”

데몬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그들이 황후를 찾아 숲을 뒤지는 동안 황궁은 당연히 난리가 나 있었다.

귀족들이 프시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로안은 그들에게 둘러싸여 비난을 받는 중이었으나, 그 상황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넋이 나가 있었다. 반짝였던 푸른 눈빛이 어두운 동시에, 마치 흘러내린 촛농처럼 흐리멍덩했다.

귀족들이 너도나도 외치는 소리에 알현실은 아수라장이었다.


“당장 황후 폐하를 안전한 곳으로 모셔와야 합니다!”

“어서, 수색대를 편성해 주십시오!”

“범인이 누구인지 반드시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아니! 군대를 출병시켜야 합니다, 폐하!”

“하지만, 어디로 말인가!”

“도대체 누가 이렇게 무엄한 짓을!”

귀족들은 분노했다.

그들의 현명하고 소중한 황후를 누가 감히 납치했단 말인가.

그 아우성 사이에 혼자 고요한 로안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 말의 시작부터 소름을 느낄 뿐이었다.


“모르겠소? 황후는 스스로 사라진 것이오.”

껍질만 로안인 그가 외쳤다.

주먹을 말아 쥐고 뒤이어 토해낸 말에 모든 이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황후가 흑마법을 숭배했던 것이오!”

“힉!”

귀족들의 숨 들이켜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황후가 흑마법을 숭배하다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런데 황제가 직접 뱉은 말이라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부터 그 증거를 짐이 하나하나 나열할 것이니, 경들은 들으시오.”

모두의 경악을 묵시한 채.

어딘가 어두워진 푸른 눈을 하고 로안이 사건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하나, 엘리제에게 주술을 먹였었고, 결국 타나를 시켜 죽음에 이르게 했다.

둘, 엘리제의 회복 축하를 위한 연회장에서 폭발이 일어난 그곳에 황후가 있었다.

셋, 성하께서 쌓아 올리신 결계가 무너지는 그 순간, 황후는 그 현장에 있었다.

넷, 타나가 황제를 납치하려고 했던 그 순간 황후는 안전했다.
 


‘저게 어떻게 황후 폐하가 흑마법을 사용한 증거인가? 전혀 논리 관계가 맞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치면 황제 폐하 역시 흑마법사가 될 수 있지 않은가.’

그 자리의 대부분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였다.

그가 말한 모든 순간에 로안은 프시케와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좌중의 판단에 상관없이 로안은 다음 조건을 강조하여 말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 다섯 번째. 지금 성하께서……!”

툭.

갑자기 로안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멈추었다.

그러더니 삽시간에 굳은 몸을 달달 떨기 시작했다. 마치 매서운 추위와 강풍을 직접 마주한 사람처럼.


“!”

“폐! 폐하!”

로안이 기어이 눈을 뒤집으며 고꾸라지자,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순식간에 곁에 있던 호위 기사들이 황제를 둘러쌌다.

***

내 품 속에 있던 토리와 로떼가 바람에 마른 잎 흔들리듯 벌벌 떨었다.


“왜 그래? 로떼 토리?”

우리 일행은 황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데몬과 자이드가 숲에 다녀온 이야기를 황궁에 직접 전하기 위해서였다.

헬리오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황궁의 병력을 지원받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런데 황궁이 가까워질수록 나의 다람쥐와 토끼가 두려워하는 것이 역력히 느껴졌다.


“저, 각하…….”

내가 토리와 로떼에게 작게 중얼대는 소리를 들었는지 데몬이 얼른 대답했다.


“무슨 뜻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자이드와 미카일을 향해 말했다.


“황궁이 아무래도 이미 위험한 듯해. 대공가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며 나를 말 위에 두고 그는 내리는 것이 아닌가.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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