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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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희망
2022.10.24.
멀리서 자이드가 백마를 타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엘리제 일행을 발견하자, 그는 말에서 황급히 뛰어내렸다.
“엘리제 님!”
자이드가 엘리제를 부르는 소리에 데몬의 수려한 미간이 일그러지며 단단한 팔로 그녀를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조금 전, 미로니카가 위험하니 그녀를 잠시 시에델에 보내는 게 어떨까 잠시 고민했었는데.
짧은 그 순간마저 후회되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자이드의 눈빛이 그의 열기와 갈망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제는 절대 못 보낸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데몬의 붉은 눈빛에서도 그의 의지가 극명히 드러났다.
엘리제를 시에델로 다시 데려가기 위해 미로니카까지 뒤쫓아온 사람답게, 자이드는 곧바로 엘리제에게 간청하였다.
“부디 저와 함께 다시 시에델로 돌아가 주십시오. 저희의 성녀가 되어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엘리제에게 지금 성녀가 되는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그것보다 큰일이 벌어졌어요. 황후 폐하께서 납치되신 것 같아요.”
“예?”
자이드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놀랐다.
“그렇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금 황후 폐하를 찾는 것이 먼저예요.”
엘리제의 말을 들은 자이드는 사색이 되었다. 한시라도 빨리 시에델로 엘리제를 데리고 가고 싶은데 엘리제는 황후를 찾기 전에는 미로니카를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상황 파악을 끝낸 자이드는 마음을 정했다.
“저도 돕겠습니다.”
“고마워요.”
엘리제가 웃었다. 데몬은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로안에게 황군을 움직여 달라 한 번 더 말해볼 생각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대공가의 인력을 총동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혹시 누가 어디로 납치한 것인지는 아시는 겁니까?”
자이드의 물음에 모두가 말을 아꼈다. 그에게 사실을 말해도 되는지 망설여지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자이드가 신성국의 왕을 어떤 식으로 알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헬리오가 미로니카의 황궁에 머무는 동안, 자이드는 시에델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만난 적 역시 없었다.
미카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저희 신성국의 왕이신 성하를 아시는지요.”
미카일의 물음에 자이드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분의 선행은 시에델에서도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태자가 곧 빠르게 덧붙여 물었다.
“설마 성하께서도 함께 납치되신 겁니까??”
맙소사! 어쩌다 그런 일이. 자이드가 중얼거렸다.
“저, 그런 것이 아니라…….”
미카일은 등 뒤가 오싹해졌다. 눈앞의 왕태자는 모든 사람이 보통 그렇듯, 헬리오를 존경받는 성인으로 알고 있었다.
그의 입으로 직접 자신이 모시던 신성국의 존경스러운 국왕이, 미로니카의 황후를 납치했다고 말을 하려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난처했다. 손에 땀이 찰 만큼.
어렵사리 뒷말을 이으려는 순간, 자이드의 혼잣말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럼 역시 아까 내가 뵌 분이 성하?”
“네?”
엘리제와 미카일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누굴 봤다고?
실낱같은 희망으로 엘리제가 몸을 확 내밀며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제가 아무래도 오는 길에 두 분을 뵌 것 같아서요.”
“네에??”
여전히 놀라 입을 벌린 엘리제와 미카일 뒤로, 그제야 인상을 편 데몬이 입을 열었다.
“보신 바를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왕태자님.”
***
대관식을 박차고 나온 데몬과 엘리제의 뒤를 자이드는 바짝 추격했었다.
시에델에서 미로니카의 황궁까지 쉼 없이 말을 달려 쫓았으나 그 이후 길을 잘못 들었다.
크레미언 대공가는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데몬이 워낙 빠른 속도로 달려 사실 방도가 없었다.
황궁에서 대공가로 향하는 과정에서 길을 잃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큰 숲과 산맥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지나쳐간 데몬 덕분에, 자이드는 더욱 헤맬 수밖에 없었다. 길을 찾지 못해 꼬박 하루를 숲에서 버렸다.
다음 날이 되어 주변이 밝아지자 대공가로 가는 길은 몰라도, 황궁으로 되돌아가는 방향은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숲의 어둠은 순식간에 찾아온다.
지난밤은 어찌어찌 넘겼지만, 오늘도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밤이 되면 빛을 모두 잃어 또다시 방향마저 구분하기 어려워질 것이었다. 그러니 그전에 아는 길이라도 찾아서 우선 숲을 빠져나가는 것이 현명했다.
‘황궁 근처로 가서 대공가로 가는 길을 알아내어 출발하는 편이 낫겠다.’
정령의 힘으로 몸을 보호할 수 있다 하여도 타국에서는 최대한 힘을 아끼는 것이 필요했다. 게다가 몹시 허기가 졌다. 지금이라면 미로니카 황궁까지는 갈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말머리를 돌려 숲을 빠져나오려는 그때.
‘응?’
저 멀리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흰옷의 사제 하나가 보였다.
무언가 제법 큰 짐을 들고 산속으로 숨어드는 모습이었다.
‘숲에서 기도를 올리러 들어가는 것인가?’
사제들이 신께 기도를 올리기 위해 숲에 제단을 지어두는 경우도 더러 있었기에 자이드는 별생각 없이 황궁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저 사제께 대공가로 가는 길을 한 번 물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몸을 다시 돌렸을 때는 이미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가만…….’
산을 내려오며 자이드는 순간, 조금 전 그가 본 이가 혹 성하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신성국의 왕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예전부터 들은 바는 있었다.
국경 없이 모든 대륙을 건너다니며 병들고 약한 이를 구원하시는 은빛 긴 머리의 성인.
‘분명, 조금 전 그분께서…….’
검고 긴 로브를 쓰고 있긴 했으나 밝은 낮이라 멀리서도 짙은 수풀 사이 그의 모습이 잘 보였다.
안에 입은 옷이 새하얀 사제복이었고, 그 사이로 쏟아지는 은색 긴 머리가 빛나고 있었다.
분명 성하의 증표였다.
‘은발은 매우 드무니, 아무래도 그분께서 성하가 맞으신 것 같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숲에서 나와 황궁 근처에 있다가 마침 엘리제 일행을 마주한 것이었다.
“성하께서 흑마법을 물리쳐 주시기 위해 미로니카에 머물며 결계를 쳐주셨다고 들었는데 아직 미로니카에 남아 계신 것인가 싶었습니다.”
자이드는 계속하여 자신이 본 바를 이야기했다.
“그런데 성하께서 급히 발걸음을 옮기시는 것처럼 보이긴 했으나 무언가에 쫓기는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군요.”
만일 납치범으로부터 도망치는 모습이었다면 조금 더 절박하고 위태로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이드의 기억 속에 하얀 옷을 입은 성인은 잰걸음으로 움직이고는 있으나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숲으로 숨어드는 형색이었다.
“그럴 수밖에요.”
감미로운 저음이 자이드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었다.
“그분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은신 중이니까요.”
“은신이요?”
“자세한 것은 이동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왕태자님께서는 말씀하신 곳이 어디쯤인지 기억하실 수 있으십니까?”
“예. 얼마 되지 않았으니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어서 같이 가요!”
***
자이드가 도움이 되는 일이 생길 줄이야.
시에델에서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사실 참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 덕분에 프시케의 행방을 알 수 있게 되자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엘리제 님께서는 황궁에 남아 주십시오.”
“네?”
데몬이 나를 막아섰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낮은 목소리로.
아니! 이제야 막 프시케를 구할 희망이 보이는데?
“어서 가서 황후 폐하를 구해야 해요. 왜…….”
“그래서입니다.”
데몬의 붉은 눈이 진지하게 나를 향했다.
“숲을 수색하는 것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합니다. 숲의 어디인지 알아도 정확히 은신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 폐하를 설득하시어 황군을 이끌고 와주십시오.”
“제가요?”
갑작스러운 요청에 나는 당황했다. 그럴 수밖에. 나는 죽은 사람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로안이 나를 보고 귀신인 줄 알고 기절할 텐데?
“죽은 제가 무슨 수로…….”
“방법을 찾아주십시오. 그리고 황궁에서 확인할 것이 있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맞다!
그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황후 폐하를 찾는 것이 가장 먼저예요.”
“황후 폐하를 반드시 찾아서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아……
내가 걱정되어서 데려가기 싫구나.
“제가 위험해질까 봐 그러시는 거 다 알아요.”
내 말에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예, 그렇습니다.”
순순히 인정하며 그가 쓸쓸한 눈빛을 지었다.
“엘리제. 당신을 지키지 못하는 순간이 다시 온다면 나는 제 자신을 용서치 못할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타나의 낫이 내 몸의 일부를 통과했을 때, 그의 붉은 눈이 얼마나 텅 비었었는지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슬픈 눈이었는지를.
“하지만 제가 가면 각하, 많은 군사가 필요 없어요.”
“!”
내 말의 뜻을 금세 알아차린 그가 놀라 붉은 눈이 커졌다.
“제 힘으로 숲의 친구들을 부르면 되니까요.”
시에델 사냥대회에서 사용했던 방법을 미로니카 숲에서도 써보면 되지 않을까?
토리와 로떼에게 부탁하여 숲속의 토끼와 다람쥐들을 부른다면, 성하가 프시케를 숨겨 놓은 곳을 예상보다는 빠르게 찾을 수 있을 거였다.
나는 자신 있게 외쳤지만 그 말을 들은 데몬의 눈은 흔들렸다.
아. 날 정말 놓고 가고 싶은가 봐.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요.”
죽더라도 당신 곁에서 죽고 싶어요.
지난번에도 한 번 그랬듯이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의 붉은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의 잘생기고 윤기나는 입술이 열렸다.
“그렇다면 반드시…….”
주변 사람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그가 매력적인 그 입술로 내 입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
제국의 수재들만이 입학 가능한 곳, 아카데미.
그곳에서 최연소 수석을 차지한 다니엘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갈색 눈이 단정하고 투명하게 빛났다.
“대공가로.”
갈색 눈의 미소년이 목적지를 마부에게 전하며 자리에 앉았다.
「모든 과목 모든 시험에서 최고점을 기록하여, 무려 2년이나 앞당긴 조기 졸업이라니! 축하드립니다, 다니엘 도련님. 대공가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임 올림.」
그는 서신에 적힌 글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에 접어서 품속에 넣었다.
최고의 석학답게 짐의 대부분이 서적이었으나, 다른 것들은 모두 짐마차에 먼저 옮기고 단 한 권만을 손에 들었다.
마부가 앉은 쪽을 향해 짧게 두 번 노크하자 덜컹 소리를 내며 마차가 출발하였다.
그는 들고 있는 책을 펼쳐 방금까지 읽던 부분을 찾아 눈으로 마저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차의 창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책 표지에 황금색으로 수놓아진 제목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미로니카 건국 설화』